제목: 말씀 앞에서

본문: 느헤미야 8장

설교자: 최종혁

에스라와 느헤미야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회복’이다. 3차에 걸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던 유대 백성들은 3차에 걸쳐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에스라와 느헤미야다. 에스라에는 성전 회복에 대한 말씀이, 느헤미야에는 성벽 회복에 대한 말씀이 각 책의 전반부에 중요하게 다뤄진다.

귀환한 백성들에게 있어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 즉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외세의 공격에서 안전한 성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곳으로서 당연히 영적인 모든 활동의 중심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성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예배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다른 신을 예배했다. 그리고 성전은 제대로 관리조차 되지 않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위한 제단을 만들기도 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났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전은 이방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따라서 돌아온 백성들은 그 성전부터 재건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아야했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중심, 즉 하나님께로 그들이 돌아왔다는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지난 시편 87편에서 봤던 것처럼,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성이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통해 계속해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평안히 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져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복을 누릴 수가 없었다. 약속의 땅에 돌아오기만 했을 뿐 여전히 포로되었을 때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느헤미야의 시작에서 느헤미야는 귀환한 자들이 그런 안타까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었다.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울며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벽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언약의 백성이 언약의 땅에서 사는데 있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와 지혜로 준비하여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공사를 마쳤다.

이렇게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단순히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회복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하지만 성전과 성벽을 회복했다고 해서 백성들이 영적으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

2022년 한해 우리는 ‘회복’을 주제로 하여 특별히 코로나 이후 교회가 회복해야할 예배, 교제, 섬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코로나19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모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올해는 어떻게든 더 모이기위해 노력했고 모여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는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모이는데 종종 어려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점점 본래의 사역들을 회복해가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다고 해서 저절로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도 모이기만 하면 저절로 영적인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외형적인 회복이 눈에 띈다고 해서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적인 회복이다.

그럼 내적인 회복은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면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활동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의 내적인 회복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에 대한 말씀이 그렇게 실제적으로 성취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힘을 얻고 또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외부의 방해를 이겨내고 건축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영적인 큰 도전을 받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 스스로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통한 회복은 한계가 분명하다. 일이 끝나고 나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쉽다. 또한 계속해서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금방 지치거나 혹은 타성에 젖게 된다. 과거에 엄청난 회복을 경험했던 일을 다시 한다고 해도 그때만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게 된다. 회복은 좋았던 어떤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포함되는데, 단순히 일을 통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한 답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성전 건축이 마무리되고 나서 귀환한 자들은 함께 모여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즐거움으로 지켰다. 회복의 측면에서 보면 이제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에스라가 등장한다. 에스라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제사장이면서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익숙하다는 것은 능숙하다는 의미다.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에스라는 최고의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에스라는 세가지를 결심했다.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이미 율법에 익숙했지만 계속해서 연구하고 또한 스스로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아닥사스다 왕은 그런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며 이렇게 명령했다.

7:25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능숙했던 에스라가 백성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애굽을 빼내야했던 것처럼,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자들에게서는 바벨론을 빼내야했다. 그들은 돌아온 바벨론의 포로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진짜 회복이고,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했다. 스스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회복을 원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성도들이 은사에 따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하거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외적으로 이제는 이전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말씀으로 회복해야 한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공동체인지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버리라고 하시는 것을 버려야 하고 채우라고 하시는 것을 채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회복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말씀과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다. 느헤미야 8장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여기서는 에스라가 “학사”라고 되어 있지만 앞서 말했던 “학자”와 같은 단어다. 신약에서는 ‘서기관’으로 주로 번역되었다.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그들은 율법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에스라는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 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회복을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율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하지만 율법책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읽어야 했고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해석해야 했다. 즉,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의미 없이 주신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곧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넘쳐나는 시대다. 집에도 성경책이 여러권 있고 스마트폰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성경을 볼 수 있다. 예배당에도 몇 권씩 굴러다닌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먼저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또한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누가 꼭 해석을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고, 문맥에 맞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를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에스라와 같이 말씀에 익숙한 학자와 같은 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도움이 되는 책들도 많고 강의도 많다. 설교도 많다.

우리는 지금 얼마든 우리를 회복하는 말씀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 있다. 그러니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더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주일에 한번이라도 설교를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조금이라도 더 말씀 앞에 나를 세우고 비춰봐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적극성과 자발성이 필요하다. 1절의 표현을 보면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와서 백성들을 앉혀두고 좀 들으라고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반대로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요청했다. 2-3절을 보면 일곱째 달 초하루에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어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들었다고 말한다. 일곱째 달 초하루면 이들이 성벽 재건을 마친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동안 전쟁같은 건축을 쉼없이 해왔기 때문에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텐데 이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또한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모였다. 율법에 따라서 남자들만 모여도 되었을테지만, 이들은 가능한 모든 사람이 율법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을 들었다. 6시간 정도를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3절을 보면 백성들은 다음날에도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이들은 초막절을 지키면서 일주일을 계속해서 날마나 말씀을 읽었던 것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든 최소한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들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곤했지만 말씀을 듣기 원했고, 일부만 들어도 되었지만 모두가 듣기를 원했고, 짧게 들을 수도 있었지만 긴 시간을 말씀 듣는데 사용하였다.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렇게 했다.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말씀을 가까이 했던 것이다. 말씀 앞에 나왔던 것이다.

참된 회복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씀 앞에 나오고 말씀 앞에 서야 한다. 그냥 성경책만 가까이 두면 되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만큼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이 더 자주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청하여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 우리는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이 말씀 앞에 나올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한다.

그렇게 말씀 앞에 설 때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거나 설교 들을 때 똑바로 앉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태도가 올바라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는 집중이다.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이 읽어질 때 귀를 기울였다. 집중했다는 말이다. 어떤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쉽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제나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여기에 큰 몫을 한다. 심지어 TV를 봐도 예전에는 TV만 온전히 집중해서 봤는데, 요새는 그렇지 않다. TV는 TV대로 틀어져 있고 폰으로는 뭔가 다른 일을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뭔가 허전하고 시간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설거지나 청소, 운동 등을 하면서 설교를 듣거나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더 말씀을 대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온전히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함께 한다고 해도 따로 둘 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다른 방해가 될만한 것들을 치워두고 일정시간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그런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하고 또한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시간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게 통제된 환경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많지 않다. 지금도 유튜브 라이브로 예배를 중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차선이지 대체는 아니다. 교회에 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렇게라도 함께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시라는 의미이지, 그것으로 교회에 오는 것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물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면 자동으로 집중하게 되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럴 요소는 줄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순간에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알고 그 모든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둘째 태도로 이어진다. 바로 존중이다.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책을 폈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두루마리를 펼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에스라가 그렇게 했을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 존중의 표시다. 마치 어떤 행사 자리에 주인공이나 중요한 사람이 들어올 때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로 맞이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에스라가 대단한 학자여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그가 펼친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부터 읽고 해석할 글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명령을 기록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그 말씀이 펼쳐질 때 일어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6절은 이어지는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에스라는 바로 책을 읽지 않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행하신 일을 언급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고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존중으로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많은 교회들이 함께 말씀을 읽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것이 그저 형식처럼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말씀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존중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말씀도 그렇다.

가끔씩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는데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장유유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말을 하면 그래도 들어야 하는 것 아니야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성경을 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대 인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려울 수도 있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존중 받아야 한다. 그것이 마땅하다. 말씀을 읽을 때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그 마음 속에 이제부터 읽을 말씀은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하고 말씀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나와서 말씀을 암송하면 귀엽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씀 자체가 귀여운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

설교 같은 경우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 들어가기 때문에 조금 더 고려해야할 부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올바르게 해석된 말씀에 대해서는 그 설교를 누가 했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설교자들이 악용하여 자기 권위를 세우는데 사용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말씀을 비판적으로 듣고 어디 한번 잘 설득해보라는 태도로 들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존중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해석이다.

8: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앞서 존중에 대해서 말했지만 설교의 경우 ‘이렇게’ 전해지는 말씀을 존중해야 한다.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성경만 읽는다고 말씀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의미없는 일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면서 성경 말씀을 계속해서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성경 말씀이 계속 나오니까 정말 그런가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문맥을 벗어나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말씀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그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의도하신 의미를 알게되는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기 원하는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다.

점점 세상에서 권위도 사라지고 절대적인 진리도 사라져가고 있다. 당위성보다는 실효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려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미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의미로 만족하려고 한다. 말씀이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그게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마음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들어야 한다. 그것에 말씀 앞에선 우리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끝으로 적용이다.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바르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었다. 너무나 감동적인 설교여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남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말씀으로 듣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자신들이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었는지,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말씀을 통해 밝히 알게 되었을 때 그 죄로 인해 울고 슬퍼하며 근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을 바르게 적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8: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백성들의 반응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서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올바른 반응이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잘못된 반응이다.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반응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그 앞에 서면 우리의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그 죄에 대하여 우리는 통회해야 한다. 슬퍼하고 근심해야 한다. 울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를 죄책감으로 사로잡으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책망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책감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죄로 인해 슬퍼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은 죄책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죄를 용서하고 해결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억하고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 마지막 올바른 태도다.

 

주님이 허락하시면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다른 한 해를 시작하게 된다. 우리가 다음에 모일 때는 2023년 1월 1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올해는 우리가 ‘회복’을 강조했었지만 내년에는 또 다른 무엇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회복은 사실 끝이 없다는 것이다. 회복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우리가 돌아가야할 본래의 상태는 코로나 전이 아니라 타락 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회복해야 하고 말씀으로 그렇게 해야한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삶에서 바벨론을 빼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 세상의 죄악을 빼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말씀을 존중해야 한다.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나에게 확실히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올 한해를 그렇게 살아오셨다면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길 바란다. 혹 올 한해가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말씀으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기 바란다. 말씀의 홍수 속에서 기름 방울처럼 떠나니지 말고, 그 안에 뛰어들기 바란다.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말씀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말씀 앞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최종적인 회복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