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마르다와 마리아
본문 : 누가복음 10장 38~42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은 영접한 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접한 자, 제자가 된 자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전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습니다. 한 율법교사의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일입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당연히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많은 종교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고 너는 거기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전에 여러 가지 봉사와 섬김 보다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나는 할 수 없다’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따를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들, 믿는 자들의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38-39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40절에서는 마르다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생긴 문제점을, 41-4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주시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아야할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38-39절)

먼저 예수님을 영접한 두 여인을 만나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길로 향하고 있는지 혹시 예상이 되십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승천할 기약이 가까움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하시고 가고 계셨습니다(눅 9:51). 그 전에 70명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대사로서 먼저 보내셨고 그들이 돌아온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방문했던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배경이 되는 “한 마을”이 어디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요 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근에서 사역하실 때 사역의 본부가 된 지역입니다. 베다니는 ‘가난한 자의 집’, ‘고통받는 자의 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영접한 한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그녀의 이름이 마르다였다고 소개합니다. 아마도 처음 주를 만나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마르다’라는 이름의 뜻은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뜻처럼 그녀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했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대접하고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따르고 그분의 제자가 되길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영접하다는 단어를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사용했습니다(눅 19:6). 또 이 단어는 야고보서에서 기생 라합에 대해 설명할 때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믿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약 2:25).

영접하는 것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영접하는 자들이 있거든, 너희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평안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거부하는 사람들,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 화가 있으리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예수님을 거절한 그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한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십니까? 예수님의 이름 뜻처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곳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들을 자신의 희생으로 의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또 주님을 영접한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로 히브리어로 미리암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발치에 앉았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있었던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at the feet of)에서 교육을 받았다(행 22:3)’고 말했을 때 ‘문하’는 발치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말씀에 청종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수천 귀신이 들린 자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하여졌을 때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고 말합니다(눅 8:35).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마리아가 발치에 앉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의 집과 같다고 하셨고(눅 6:4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내 참 부모, 동생이라고 하셨습니다(눅 8:21).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1:28). 주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였고 마리아가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주를 영접한 이들의 신실함은 요한복음에서 더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요 11-12)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는 나사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하셨습니다. 두 여인이 자기의 오빠를 말하면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들 중에 한 사람으로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지역에서 여러 번 예수님을 위해 장소와 필요를 제공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의 절정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로 가장 슬픔이 깊었을 때 고통과 괴로움이 극심했을 때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르다는 이에 대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2-27)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고백했던 것처럼 마르다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동생 마리아 역시 큰 믿음의 자녀였습니다. 그녀는 나사로를 살리시고 유월절 엿새 전에 잔치를 벌였을 때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 비싼 향유를 어찌 낭비하느냐고 했을 때 주님은 그녀를 칭찬하시며 마리아가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했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제자들조차 준비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죽음을, 주님의 말씀을 발치에서 진지하게 들어왔던 이 여인이 준비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에 대해 예수님께서 세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요 11:5).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에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드리길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는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평화의 메시지가 되기를 원합니다. 당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고향사람도, 가족들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지금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늘까지 높아지려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 정도는 괜찮아. 이 정도면 잘 살고 있어. 굳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처럼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은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화있을진저…’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맺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늦기 전에 하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영접한 자의 우선순위 변화(40)

주를 영접한 자들, 마르다,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오늘 여러분의 집에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준비되셨습니까? 갑자기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여러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발 씻을 물과 음식, 청소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매우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화는 남자와 여자가 엄격히 분리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서 다른 남자 제자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은 당시 문화로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누가는 마리아의 내면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언니가 일하니 나는 말씀 들어야지.’라는 이기적이거나 게으른 경우 등의 마리아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가 관심을 가지고 기록한 것은 마르다의 마음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방문에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들에 그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마음이 분주하다(페리스파오)’는 말의 뜻은 ‘끌려가다’라는 뜻으로 목표점으로 가야 하는데 방해물 때문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노래를 하는데 옆에서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다른 노래를 하면 나도 모르게 끌려가게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다른 이의 방해로 끌려가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그녀가 해야 할 많은 일 때문에 ‘섬기려는 사람’,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섬기기 위한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폭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라는 말은 성급하게 갑자기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르다는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원망하고 있는 대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불평의 내용은 ‘주님 왜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까.’입니다. ‘왜 이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은 불공평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이 ‘주님이 주신 여인 하와 때문에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비난의 내용도 잘못되었습니다. 마리아의 동기를 오해하고 잘못된 원인으로 잘못된 대상에 불평하고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동기로 섬기고 있었지만, 마르다는 마리아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모든 불평과 비난 앞에 ‘주여’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주라고 부르는 분께 오히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왜 신경을 쓰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몇 가지 꼭 필요한 음식만 준비해도 됐습니다. 당장 필요한 몇 가지만 하고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예수님 곁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그 일이 가장 큰 우선순위에 왔을 때 큰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의 우선순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에서 그분을 위해 할 일들에 집중되었을 때, 주를 섬기는 일이 아름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접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에서 멀어졌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우선순위를 보여줍니다.

주를 위한 섬김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 여러 부분에서 그것을 가르칩니다.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히 13: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벧전 4:9)’ 특별히 장로와 집사들의 기준으로 ‘손님 접대를 잘하며(딤전 3:2; 디도서 1:8)’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가 돌보아야할 과부의 조건에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의 발을 씻기고 환난 구제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딤전 5:10). 이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섬김이지만 그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먼저 왔을 때,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과 경외심, 찬양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길 때 에너지와 힘과 능력을 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일이 먼저 왔을 때 힘과 능력을 잃게 되고, 다른 성도를 판단하게 되며 불평과 원망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원망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여러 섬기는 일이 있습니다. 애찬당번, 화장실 청소, 정수기 관리, 쓰레기 분리수거, 설거지 당번, 마당 쓸기, 걸레 빨아 널기 등이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훌륭한 일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섬김보다 먼저 우선순위에 와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주가 가르치신 우선순위(41-42)

예수님은 마르다를 부드럽게 부르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그리고 긍휼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상하고 연약한 여인의 마음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택한 것이 더 좋은 것, 우선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있어서 우선되어야 하는 일, 그 “한 가지” “좋은 편”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내 그분을 따르라고 하실 때, 그 말의 의미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열광적인 종교활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그분께 완전히 내맡기라는 것이다(윌코크, BST, 167)’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고 그분을 아는 능력으로 그분을 섬깁니다. 율법교사가 ‘나는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영생을 얻는 것 아닙니까’라고 했을 때 우선순위를 주신 것처럼,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분을 아는 능력에서 나오는 힘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주님을 아는 것이 더 먼저 올까요? 이것이 영생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말씀 중간에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셨을 때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내 말을 듣는 자’라고 하셨고,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계속적으로 우선순위를 잡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아들밖에 모르고 아들을 통해 계시를 받은 자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옆에서 알아가고 배워가는 너희가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고, 앞으로 배울 기도에 대한 말씀(눅 11:1-13)에서는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계속적으로 영생, 구원에 대한 말씀의 중간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얘기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영생의 본질에 가까운 것, 우선순위가 되는 것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요 1:12)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영생을 얻기 위해서도,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선택한 옳은 우선순위에 대해 절대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영생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3세기 밀라노 주교, 어거스틴의 스승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아무도 우리한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을 얻도록 노력합시다. 성실히 귀 기울여 듣는 일을 우리 몫으로 삼읍시다…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당시에도 지금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가장 우선순위에 와야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많은 섬김의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영역이 섬김의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고 했습니다(롬 12). 예배는 영어로 서비스입니다.

섬기는 일에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나같이 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비판과 정죄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선순위가 뒤바뀐 삶을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그리스도를 힘써 아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마르다처럼 불평하게 되고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십시오. 모두가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가장 종교적인 열심을 낼 수 있는 위치가 바로 저의 위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제게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채우지 않는다면 일에 치여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시간표를 펼치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는지, 집중해서 우선순위를 두고 힘쓰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벧후 3:18). 우리 모두가 예수님 발치에 앉은 마리아처럼 많은 일들을 뒤로하고 주 앞에 나와서 그분을 알아가고, 우리가 섬기는 분이 얼마나 귀하신 분인지 깨달아가기를 바랍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교훈하시고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도 권면하시고 그들을 사랑하는 친구라고 불러주신,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아는 즐거움으로 차오르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그 능력이 드러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우선순위에 주님을 힘써 아는 일을 두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