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를 의지하는 자의 기도
본문 : 시편 31편
설교자 : 최종혁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다윗의 상황과 그가 드린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고, 특별히 다윗의 기도의 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며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상황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1). 내가 주께 피한다는 것은 다윗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의미가 있고 본문에서도 반복해서 나옵니다(6절, 14절). 다윗은 좀 더 시적인 표현으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라고도 말합니다. 굳이 피한다고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내가 피할 만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럼 다윗은 어떤 상황에 있었을까요?

많은 시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상황이 무엇이고 어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보다는, 그런 상황을 자신이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떤 마음 상태인지를 주관적인 입장에서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의 경우 신분이 왕이었고 군인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이 입장에 서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상황에서 느꼈던 괴로움, 외로움 등은 우리가 다른 상황 속에 있어도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를 대할 때 우리는 공감하고 동질감을 갖고 삶에 필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31편의 상황도 구체적으로는 무엇이 원인인지 알기 어렵지만, 몇 가지 중요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1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17절) 먼저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부끄러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약간 창피한 감정이나 내적인 당혹스러움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로 공적으로 망신 당하는 일이나 치욕스러운 일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좀더 강하게 말하면 수치, 치욕, 굴욕 당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가 지금 그런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무엇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패하고 나라를 잃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렘 2:36~37).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오는 수치가 아니라 다윗의 신앙이 걸린 문제,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있는 중대한 일입니다. 다윗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곧 그의 원수들에게 있어서는 다윗이 믿는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데, 지금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4절). 두 번째로 다윗이 처한 상황은 어떤 자연재해나 우연한 상황으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치밀하게 계획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마치 사냥꾼이 몰래 설치해 둔 그물에 걸린 사냥감처럼 자신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13절 하) 사람들이 다윗을 넘어뜨리고 그 생명을 빼앗으려고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고 지금 그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런 일들을 했을까요? 이들에 대해서 “원수”(8절), “대적”(11절), “핍박하는 자들”(15절), “악인”(17절)이라고 말합니다. 6절에서는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바로 앞에 5절을 보면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5절)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섬기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대적들이 가치를 두는 것은 허탄한 거짓, 거짓된 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다윗의 대적이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을 버리고 아무 의미 없는 거짓을 예배하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의 대적이면서 하나님의 대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다윗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의인으로서 당하고 있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9절). 그들로 인해 다윗은 심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이 고통은 육적인 것이며 동시에 영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영혼과 몸이 모두 쇠하였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구약에서 눈이 힘과 건강에 대한 지표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힘을 잃고 건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10절). 다윗은 지금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슬픔과 탄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원인으로 “나의 죄악”을 지목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괴롭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도 원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 것이라 보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연약해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11절). 대적들에게 욕을 당할 뿐 아니라 특히 이웃에게도 같은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친구들조차 그의 상황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고, 길에서 보는 사람들도 피합니다.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이 당하고 있는 일을 자신들도 함께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13절).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두려움에 포위된 상황입니다. 다윗은 지금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잊혀지는 외로움에 대해서 말합니다. 철저히 혼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12절). 다윗은 지금 자신이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졌다고 말합니다. 마치 죽은 자가 사람들이 기억에서 사라지듯이 그렇게 잊혀졌습니다. 깨진 그릇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버려집니다. “그 그릇 어디갔지?”하고 가끔 찾게 되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거 깨져서 버렸어”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다윗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다윗을 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이 잘 맞아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몸과 영이 쇠하여 가고 있고, 주변에 사람들은 다윗을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며 오히려 그를 비방하고 함께 있으면 자신들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마치 죽은 자와 같았고 아무 쓸모 없는 깨진 그릇과 같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삶에서 이런 큰 어려움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조금씩 이런 경험들을 했을 수 있고 앞으로 그런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에 의존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형태로 자신의 괴로움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자신의 필요를 구했습니다.

기도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구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이 기도를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이 기도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기도입니다.

  1. 공의에 기초한 기도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1절). 다윗이 영원히 부끄럽게 되는 것은 지금 원수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피하는 다윗이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다윗의 논리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다윗이 아닌 악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17절).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드러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주를 불렀으니” 악인들과 다르게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진리의 하나님이 아닌 허탄한 거짓을 따르지만, 다윗은 진리의 하나님을 따르고 지금 그분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고 다윗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면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공의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를 건지소서”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1절),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2절)라고 기도합니다. 이 상황이 속히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바위와 산성은 이미 여러 차례 시편에서 나온 표현인데, 다윗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바로 바위와 산성입니다. 다윗은 도망할 때 바위를 의지하여 숨기도 하고 쉬기도 했습니다. 전쟁 중 산성만큼 큰 의지가 되는 장소가 없습니다. 다윗에게 있어 그런 바위와 산성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골리앗과 싸울 때 그가 들었던 무기는 칼이나 단창, 심지어 당시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물매도 아닌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그가 피할 곳, 의지할 곳도 바위나 산성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3절). 여기서는 “인도하고 지도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조금 다른 표현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는 같은 의미입니다. 그 이유를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 공의로우신 속성에 합당한 것이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일관성 있게 일 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평판이 걸린 문제이니 이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4절). 그들이 누구인지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지만, 이 시에서는 여기서 조금은 갑작스럽게 등장합니다. 다윗은 여기서도 그렇고 6절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자신을 “그들”과 구분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신다면 하나님의 편에 섰던 자신은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기도입니다.

 

  1. 은혜에 기초한 기도

9절부터 이어지는 기도는 앞의 기도와 다윗의 태도가 조금은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지에 초점이 있었다면, 여기서는 다윗이 조금 더 낮은 자세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9절).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해야 하는 어떤 합당한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이 고통 중에 있으니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10절), 더욱 낮아진 자세로 구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있고 괴로운 상황에 있는지를 언급하면서 단지 은혜를 구합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16절). “얼굴을 비추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하심”은 헤세드, 언약에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약속하신 사랑을 지금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공의로 건지소서”가 “사랑하심으로 구원하소서”로 바뀌었습니다. 19절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로운 분이시고 언약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그 은혜의 약속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그분의 속성에 기초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 조금 특징적인 것이 있는데, 이 기도에 다윗의 확신이 녹아 있다는 것입니다.

 

확신

9~13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다윗은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할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14절에서 반전이 찾아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14절).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다윗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당신이 내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시 한 번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저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보려고 해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앞의 말씀처럼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긍정적이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원수들의 손 안에 있음을 알았습니다(15절, 8절).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15절). “앞날”이라고 번역되었지만, 문자적으로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정해진 시간, 즉 우리의 인생, 삶, 운명을 의미합니다. 나의 미래 뿐 아니라 나의 과거, 현재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내가 보는 상황이 원수의 손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원수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모든 환경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주권자’라고 말할 때 갖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원수의 손에 있으면서 괴로워할 때에 붙든 생각입니다. 그래서 5절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5절). 참 당연한 고백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먼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6절)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기도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하셨던 말씀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어쩌면 죽고 싶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 그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저 막연하게, 혹은 맹목적으로 그냥 그렇게라도 생각하면 좋으니까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서 그 능력과 은혜의 손을 드러내신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7절). 하나님은 다윗의 고난을 보시고 그의 상황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관심을 끄시지 않으십니다. 그냥 이제 알아서 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주목해서 보고 계시고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8절). 다윗의 고난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를 원수의 손에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건져내시고 넓은 곳에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 능력의 큰 손을 펴십니다. 누군가에게는 심판의 손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의 손입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삶을 통해서 경험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서 더 큰 손으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삶을 주님의 손에 의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해서 가져야할 확신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저 막연하게 내가 구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관자는 누구일까요? 우리 자신일까요? 자신이 제 삶의 주관자라면 이렇게 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돈도 더 많고 외모도 이보다 더 뛰어날 것입니다. 그럼 자연일까요? 어떤 의지도 없는 자연이 주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조상이나 혹은 다른 신일까요? 인간이 만들어낸 무엇이 주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에 주관자가 되신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말의 의미를 꼭 마음속에 새겨 두십시오. 그분은 내 삶의 즐거운 순간 뿐 아니라, 내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 가장 힘겨운 순간에도 주관자가 되고 계십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내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우실 수 있고 돕기를 원하십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