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본문 : 에베소서 3장 14-21절

설교자 : 최종혁

 

누군가에게 무언가 부탁을 할 때는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지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려고 하는지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부탁할 수 없고, 반대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부탁할 이유가 없다.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의미가 있다.

부탁하기 애매할 때도 있다. 능력이 애매하거나 의지가 애매할 때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잘 모르겠을 때는 부탁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이 된다. 반대로 부탁이 쉬울 때가 있다. 능력도 충분하고 의지도 넘쳐날 때다. 그럴 때는 부탁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부탁을 들어준다. 도움이 필요할 때 그런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그 도움이 절실할수록 이런 사람의 존재는 큰 힘이 된다.

에베소서의 시작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찬양했고 그 복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바울의 기도는 특히 하나님께서 어떤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셨는지를 알게 하여주시기를 강조했었다.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의 풍성함을 기다리며,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구원’이라는 말에 개인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공동체적인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한다. 구원은 영적으로 죽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이다. 또한 구원은 영적으로 멀어졌던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가까워진 것이다. 구원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간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4장부터는 이 삶이 더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가 나온다. 개인, 가정, 교회, 사회의 신앙의 영역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우리는 4-6장의 말씀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영적 싸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엡 6:12–13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싸움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단순한 개인간의 다툼이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하나씩 나열한다. 하지만 무기만 있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엡 6: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영적 승리는 약한 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의 주인처럼 행동하며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한다. 세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유혹하며 영원이 아닌 이 땅을 바라보고 살게 하려 한다. 우리의 육신은 성령을 거스르기를 기뻐한다.

이런 상황에서 에베소서 4-6장에서 말하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니다. 힘겨운 싸움이고 사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할까?

여기서 서두에 잠깐 언급했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금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주변에 혹시 이 싸움에서 우리를 도울 사람이 있는가? 그럴 능력이 있고 그럴 의지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다행히 그런 ‘사람’들이 있다.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성도들이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아군들로서 함께 적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전우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능력과 의지는 제한적이다. 아무리 우리의 의지가 불타올라도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경험하다보면 의지도 함께 사그라든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게도 우리에게는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의 대장으로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을 20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엡 3: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 둘 다 차고 넘치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강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기도한다. 그 기도의 내용을 보자.

엡 3:14–21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4-15절은 기도의 대상, 16-19는 기도의 내용, 그리고 20-21은 기도의 확신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서 바울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기도의 대상
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바울은 1장에 이어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1장의 기도가 항상 계속해서 드리는 기도였다면, 여기 기도는 무릎을 꿇고 낮아진 자세로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므로”(14절)
사실 3:1에서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이라고 말한 후에 바로 이 기도가 이어졌어야 했는데,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또한 자신이 그런 놀라운 복음을 전하는 귀한 직분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16절에서 다시 본래 의도로 돌아와서 영적 전쟁을 하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기도를 기록한다.

바울은 기도의 내용 이전에 특별히 이 기도의 대상, 즉, 이 기도가 누구에게 드려지는 것인지를 자세하게 기록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16-17절)
바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항상 사용하였던 표현이며,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아버지에 대해서 각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다를 수 있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기도에 등장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무엇보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하나님과 우리가 이런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엡 2:2),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엡 2:3).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셔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5).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엡 2:19). 기업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엡 3:6).

갈라디아서에서는 입양된 자녀로서 우리의 권리를 이렇게 말한다.

갈 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나아간다. 그래서 3:1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아들이기에 두려움과 떨림이 아니라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시다. 여기서 하늘에 있는 족속, 땅에 있는 족속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은 불필요하다. 바울은 그들을 구분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들 모두를 합한 ‘모든 족속’을 말하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이든 땅이든, 어디에 있는 누구든, 모두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들을 창조하셨고 통치하는 권세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우리의 대적들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있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큼 도움을 구하기에 적합한 분이 없다. 우릴 돕기 원하고 도울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바로 그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 ‘어떻게 하여주시기를’ 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신자들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성도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누구가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 성도가 용서하기를 구하는 기도다. 실제로 그 성도가 기도의 내용을 듣는다면, 그 성도에게 용서해야할 것을 권면하는 기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 바울이 기도의 내용을 기록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고, 그가 이렇게 기도한다고 성도들에게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권면이기도 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하며’, ‘-하고’, ‘-해서’와 같은 표현이 쭉 이어져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내용을 보면 각각이 ‘독립된’ 기도 제목이라기 보다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도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도가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19절 끝에 기록되어 있다.

목적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어쩌면 너무나 당돌하고 한편으로 신성모독처럼도 보이는 기도의 내용이다. 골 1:19는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말씀이다. 아버지의 모든 충만이 예수님 안에 있기에 예수님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와 이 골로새서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면,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기를 구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스윈돌은 이것을 통에 담아온 바닷물에 비유했다. 통에 가득 바닷물을 담아 오면, 바다의 전부는 아니지만 통의 용량으로서는 가득하다(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양적으로는 바다의 일부이지만, 질적으로는 바닷물의 속성이 그대로 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작은 통이 아니시다. 따라서 같은 표현이라도 예수님께 적용될 때와 우리에게 적용될 때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충만함을 모두 품으시는 무한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뒷부분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되는 것은 모두 비슷한 의미다. 우리가 비워지고 삼위의 하나님이 우리를 채우는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 온전히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것, 그리하여서 우리의 말과 행동, 모든 삶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온전히 그분을 닮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 궁극적인 결과를 위해 바울은 두 가지를 하나님께 구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 가운데 굳게 서는 것이다. 속사람이 강건하여 지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과 관련이 있고, 사랑 가운데 굳게 서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동기와 관련이 있다.

노력 – 속사람이 강건할 수 있도록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사람”이라 하면 날로 낡고 썩어가는 “겉사람”과는 대조되는 말이다. 우리의 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여주시기를 구한다.

특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풍성함을 따라’라는 것은 ‘풍성한 만큼’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풍성한 능력 가운데 그저 얼마를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만큼, 풍성하게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1억이 있는 사람한테 100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줄 것을 구한 것이다.

바울의 이 기도는 너무나 당연하고 직접적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인 싸움을 한다면 겉사람이 강해야겠지만, 영적인 싸움이라면 우리의 영, 즉 속사람이 강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여주시기를 구했다.

여기서 잠깐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도 이 당연한 기도를 하고 있느냐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닌 영적인 싸움인데, 우리의 기도도 그러한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온통 육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거나, 정신이 나간 군사일 것이다.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 항상 가장 기본에 있어야할 기도가 바로 이것인 것이다.

그럼 이런 기도만 하면 우리 속사람은 저절로 강건해지는 것일까? 마치 마법 주문처럼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실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이어지는 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기도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도는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을 위한 기도이고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시기를 위해 기도할까?

성경에는 가끔씩 이런 명령들이 있다. 이미 거룩한 자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한다. 이미 참된 안식을 소유한 자들에게 안식하라고 말하고, 평안과 기쁨을 가진 자들에게 평안하고 기뻐하라고 말한다.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가지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믿는 자의 마음에 이미 그리스도는 계시다. 하지만 그분이 진짜, 제대로, 계신가? 우리 안에 그리스도는 편안히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연약할 수 밖에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즉 “거주하시게” 해달라고 구했다. 집을 예로 들어 보자. 내가 사는 집에 그리스도께서 세를 들어 사시는 집은 어떨까? 여전히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원하는 모습이 조금씩은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그 집은 누가봐도 최종혁의 집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눈치를 보며 불편하게 약간의 존재감만 드러낼 뿐일 것이다.

그럼, 반대로 내 집을 그리스도께서 사서 주인으로 계시고 내가 그 집에서 살고 있다면 어떨까? 여전히 나와 그리스도가 한 집에 살고 있지만, 그 집은 그리스도의 집이다. 그리스도가 원하시는대로 채워지고 가꿔진 집이 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통해 그렇게 하시는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하시겠지’하고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특히 여기서는 “속사람” 대신 “마음”이라고 말했다. 우리 생각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으로 가능하다. 세상은 우리 생각에 온갖 거짓을 심어 놓는다. 성경대로 살면 안될 것 같은 불안함을 심어 놓는다. 그럴 때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대로 순종하며 따라갈 수 없다. 믿음으로 계속해서 내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인되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골로새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골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속사람의 강건함을 구하며 노력해야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고, 무엇이든 다 내 마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육체의 강건함에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듯, 영적인 강건함도 그렇다.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도 않고, 말씀을 가까이 하지도 않으면서, 영적인 나약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잘 먹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왜 나는 키가 크지 않고 힘이 약하냐고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속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한다. 끊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더 많이 그렇게 해야한다.

다음으로 바울은 계속해서 그렇게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위해 기도한다. 동기 없이 하는 일은 절대 오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적인 강건함을 위한 노력의 동기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동기 – 사랑 가운데 굳게 설 수 있도록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궁극적으로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다 알 수 없는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꼭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어떤 모습을 강조하려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게 크고 온전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다만 이 표현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여러 측면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어떤 사람이든 관계 없이 차별이 없다는 면에서 그 사랑의 너비를 볼 수 있다. 그 사랑의 창세 전에 시작되었고 영원히 계속된다는 면에서 사랑의 길이를 볼 수 있다.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는 죄인인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시고, 또한 우리를 자신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키시어 함께 다스리게 하시는 것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지식으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는 일들을 그리스도는 기꺼이 하셨기에 그 사랑은 참 사랑이고, 그 사랑을 아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다만 우리는 그 사랑의 크기를 모두 알지는 못한다. 다 알 수도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알기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욥기를 읽으면서 참 안타까왔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지식은 제한적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러했다. 뜻하지 않은 고난을 만나 그 고난의 이유나 목적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욥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수가 되시고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위대한 신앙인인었던 욥이 고난 중에 흔들렸던 주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같은 삶을 감당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감당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감당하느니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야 한다. 비록 우리의 지식을 뛰어 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넓게, 더 길게, 더 높게, 더 깊이 그 사랑을 깨달아 알수록 우리는 더욱 견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당연히 말씀을 읽으면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징계를 통해서도 그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런 개인적인 차원 뿐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그 사랑을 알아가는 것을 언급한다. 즉, 성도들 각자가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닮아서, 사랑 안에 견고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른 성도를 통해 경험할 수 있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알아가는 선순환을 기대할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해야 상처를 덜 받는 그런 모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서로 덜 보고 교제도 덜 해야 다툼이 없고 갈등이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 교회가 그렇다면 우리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우리가 알고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모두가 그리고 각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안에 견고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정리하면, 우리는 우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하며(기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도록 노력해야 한다(말씀). 그 모든 노력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동력으로 가능하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바울은 확신 가운데 이 기도를 찬양으로 마무리 한다.

기도의 확신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다. 바울의 기도는 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구한 기도였다. 하지만 그 능력 역시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능력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바울은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지어 구하지 못하고 생각만 한 것까지도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에 모든 것을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영적으로 강건해 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영적으로 자라간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런 하나님께 대대로 영원무궁하게 영광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도전
다음 에베소서 시간부터는 우리가 어떤 전쟁을 싸워야 하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우리의 ‘일상’이다. 나 개인의 삶, 가정, 교회, 사회가 우리의 전쟁터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벗어나 편하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기운을 잃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싸움을 멈추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땅에서 싸움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항복하는 것 뿐이다. 항복하고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기만 하다면, 어쩌면 마땅히 싸워야할 싸움을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전쟁터는 결코 편하지 않다. 만약에 지금 그런 상태에 있다면 계속되는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정신을 차리고 깨기 바란다.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는 성도들은 너무 힘들어 멈추고 싶고 항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에베소서 1-3장을 다시 읽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오늘 배운 3장 끝의 이 기도를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분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와 구하기 바란다.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아버지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