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하가 보라
본문 : 누가복음 11장 33~36절
설교자 : 조정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등불의 비유:(눅 8:16-18; 마 5; 막 4)입니다. 본문은 비유뿐만 아니라 우리 눈의 등불이라는 말까지 이어지고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는 질문으로 우리에게 비유를 적용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의 장르는 비유입니다. 존 맥아더목사님은 이 비유에 대해서 ‘심오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는 간결하면서도 독창적인 그림 언어’(하나님 나라의 비유, 8p)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림이나 예술을 통해 받는 인상이나 감동처럼 비유는 우리에게 세세한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한 그림과 의미를 부각시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마 13:44)’ 천국에 대한 이 비유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 비유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2천억짜리 보화가 2억짜리 밭에 숨겨져 있다면 여러분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이 밭을 사고 싶지 않으십니까? 가치가 있는 밭이라면 모든 것을 희생해서 밭을 사지 않겠느냐는 것에 이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 50여개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주신 목적은 첫째로 진리를 은폐(막 4:10-12)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비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숨기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비유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셨습니다.(눅 10:21)

오늘 본문의 대상을 생각해볼 때 이 비유는 사람들을 심판하고자 하는 목적이 더 강했습니다. 이 비유를 듣는 자들 중에는 예수의 기적에 놀란 자, 예수님의 능력이 귀신에게서 왔다고 왜곡하는 자, 표적을 구하는 자, 예수를 거부하는 자,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라는 마음으로 비유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들 중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해 심판을 받을 것이고 겸손한 자들은 예수님께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37절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 서기관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심판의 목적이 강했고 예수님은 비유의 의미도 설명해주지 않으셨습니다.

33절에서 예수님은 등불의 비유에 대해서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하십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을 합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을 등불이 상징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33절)’

과거에는 호롱불, 등경이 있었습니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밝게 보기 위함입니다. 이 당시 등불(lychnos)은 촛불, 기름 등불을 말합니다.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려는 목적, 컴컴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밝히 보려는 목적, 원하는 위치로 이동하고 활동하기 위한 목적, 장애물과 방해물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어두움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등불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그 등불을 켜 놓고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움(krypte)은 ‘은밀할 장소’, ‘지하실’, 포도주나 기름의 저장소인 셀러(cellar)를 지칭합니다. 말(modios)은 곡식을 재는 ‘됫박’(마른 곡식 1말, 8.75리터)을 말합니다. 한 모디오스를 담는 바구니, 그릇(눅 8:16)을 가리킵니다. 그릇으로 등불을 가려서 덮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누가 등불을 켜서 그 불빛을 가리려고 하겠느냐? 등경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밝게 비추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히 보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그 빛을 가리려고 켜지 않고 오히려 등경 위에 둬서 환하게 비추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빛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너희 앞에서 밝게 비추고 계시는 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등불은 ‘루크노스’라는 단어로 계시록 21장에서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또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사도요한도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또 예루살렘에서 어린 예수님을 안았던 시므온은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32)’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한 선지자 요나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솔로몬보다 위대한 지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빛에 대해 증거하러 온 그 많은 선지자들보다위대한 참 빛이셨습니다. 그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서서 숨김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를 각 사람에게 비추고 계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를, 그 분의 사역은 하나님의 권능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말과 행동(성품, 삶)은 하나님의 속성인 은혜, 자비, 인자, 사랑을 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가지고 계신 영광의 빛(변화산)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등불을 켜서 감추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빛을 너희에게 감추지 않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유가 발전됩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34절)’ 저는 예수님의 비유가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제 얼굴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빛 때문입니다. 우리가 밤 10시에 불을 다 끄고 여기 모였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린 서로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광원(스스로 빛을 내는 물체)에서 나온 빛이 눈에 들어오거나 물체에서 반사 빛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나쁘다면 빛이 확실하더라도 서로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몸의 등불은 눈으로 눈이 나쁘면 당연히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빛으로 비추고 있는 예수님 자신도 중요하지만 빛을 받아들이고 있는 너희 등불은 어떤지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추지 않고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문제가 없어도 그것을 보는 눈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상태의 눈이 있다고 하십니다. 첫째로 성한(건강한, 제 기능을 다하는) 눈입니다. 눈이 성하다면 잘 볼 수 있습니다. 진리와 접목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진지하게, 솔직하고 편견이 없이 겸손히’ 듣는 자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병든, 기능을 상실한 눈) 눈이 있습니다. 이 나쁜 눈의 의미는 사악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악한 세대(29절)’라고 비판하실 때 비판하실 때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눈이 나쁘다면 악해서 빛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자입니다. 빛이 아무리 강렬해도 눈이 상하면 빛의 유익을 조금도 누릴 수 없습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는 그 빛을 충분히 이용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빛의 유익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다면 몸의 다른 지체가 아무리 멀쩡해도 온 몸이 고통을 받으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가르침, 확증하는 능력을 보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비춰지는 강렬한 빛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놀랐지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귀신의 짓이라고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그들은 들었지만 시험하기 위한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각각의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놀라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존경스러운 인격과 놀라운 통찰력, 특별한 가르침에 대해 감탄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참 빛이심을 인정하고 내 안에 영접해야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내 속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 빛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위대한 성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내 안의 어두운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부활하셔서 영생을 허락하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에는 반항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성경이 꾸며낸 얘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빛이 숨기지 않고 너희에게 비추었으니 너희가 어떻게 들을지 잘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전달되는 메시지, 성경에 기록된 진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들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참 빛을 보내신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야할 날이 올 것입니다.

세 번째로 더 많은 표적을 구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교회에 나와서 더 대단한 표적이 나타나면 믿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보다 더 분명한 빛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빛,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 피조물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고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부활하셔서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빛입니다. 이 빛을 거절하면서 어떻게 더 강력한 표적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어떻게 듣고 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어서 35-36절에서 이 비유의 적용을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어두운 빛이라니 조금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참 빛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 강렬한 빛이라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그분이 빛으로 비추고 계시지 않는다면 내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태도와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말씀, 가르침, 성경에 대한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절)’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은 34절의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34절)’와 같은 표현입니다. 듣는 자세가 올바르다면 등불의 빛이 나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아는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받는, 보호받고 변화된 사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 그분을 참된 빛으로 영접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족할 수 있으나 우리 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겠다고 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거룩한 자로 변화될 것입니다. 또 우리에겐 성경이 주어져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선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겸손히 이 빛을 인정하는 자들이라면 빛을 통해 온전히 밝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도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18-21)’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 빛을 환하게 비춰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빛을 거부했고 세리와 죄인들은 참 빛을 알아보고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두움을 몰아내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 나쁜 눈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비추고 계신 등불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빛은 여러분 앞에 밝히 비치고 있으나 문제는 우리 눈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도 없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의를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가 우리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은 고장 난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눈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강한 빛을 비춰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참 빛을 알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편견 없이 단순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강력한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게 되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시지 않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생각해보십시오. 가끔 그리스도임에도 내 인생이 힘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속에서 역사하심에도 나에겐 힘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가 우리 기도가 되기 바랍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여러분 안에서 강력하게 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내 속에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 마음을 빼앗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물들어가면서 우리 안의 강력한 빛을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변화산의 빛나는 영광의 주가 내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더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그 진리를 날마다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등불, 참 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