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본문 : 로마서 15장 7-13절

설교자 : 이병권

오늘 설교의 제목은 유명한 연설에서 가져온 제목입니다. 이 연설을 했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노벨평화상의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연설에서 말했던 꿈은 이러합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흑인 소년소녀들이 백인 소년소녀들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피부색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그러한 꿈을 말하면서 그는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이 연설이 유명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마도 듣는 사람들이 그의 꿈을 공감했고 함께 꿈꾸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우리의 소망으로 바꾸었기에,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바울에게도 그런 꿈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직접 꿈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이 바라는 것, 그 꿈을 그의 기도를 통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의 소원이 담겨있는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를 통해 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했던 것, 그가 바라고 기대했던 로마 교회의 모습은 단지 바울의 꿈이 아니라 로마 교회의 꿈이 되고 로마 교회의 소망이자 목표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꿈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이루어 가야하는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의 꿈이 우리 모두의 꿈이 되고 바울의 기도가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목표이자 소망이 되는 꿈을 함께 가지게 되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의 기도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로마 교회를 위해 소망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하시기를, 성령님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의 이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로마 교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바울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보면 모든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소망이 넘치도록 풍성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교회가 꿈꾸고 이루어야 할 모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기도를 전체적인 문맥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넓은 단락에서 보면, 오늘 본문은 14:1부터 시작되는 큰 단락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큰 단락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권면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기도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14장을 시작하면서 로마 교회에 있었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로 구분되는 두 그룹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로인해 교회가 나누어져 서로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형제를 실족하게 만드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처럼 유대인이지만 유대교의 전통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방인이지만 유대교의 배경을 가졌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유대인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율법을 따랐고 음식을 먹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이방인들과 함께 할 때 서로가 겪게 되는 어려움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 모두에게 소망을 불어넣기를 원합니다. 소망이 그냥 가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차고 넘치도록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로마 교회에 있었던 문제를 생각하면 바울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바울이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소망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보다 가까운 문맥에서 바울의 기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바울의 꿈, 그의 소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에 앞서서 네 번에 걸쳐서 구약을 인용합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구약을 인용하면서 그가 전하는 복음과 권면을 더욱 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대표할 수 있는 율법서와 시가서와 선지서에서 인용하는데 인용된 모든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15:9 …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15:10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15: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15:12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구절마다 “열방”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우리 성경에 열방으로 번역된 단어가 8절에는 “이방인들”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열방으로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으로 하면 이방인들입니다. 반복해서 이방인을 말합니다.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즐거워하며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이새의 뿌리, 다윗의 자손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셨고 모든 민족과 나라와 백성 가운데서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소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바울이 말하는 이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하는 소망은 이방인유대인과 함께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그것이 13절에서 바울이 기도했던 소망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져있는 로마 교회가 이루어야 할 모습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울의 기도이며 바울의 소망이며 바울의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은 1963년에 있었던 연설입니다. 이 연설이 있기 100년 전인 1863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 의해 노예 해방령이 공포되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에 흑인들에게 자유가 선언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은 여전히 투표, 교육, 직업, 공공시설 이용 등 많은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링컨 기념관에서 이 연설을 했던 것입니다. 링컨을 통해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차별은 계속되었고 갈등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운 현실은 꿈을 꾸게 합니다. 소망을 품게 합니다.

로마 교회의 상황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 있었던 장벽보다 더 높고 더 두꺼운 장벽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장벽입니다. 사람이 절대로 뚫을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장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장벽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차별 없이 이방인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로 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두를 부르셔서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계획이며 얼마나 놀라운 성취입니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관계없습니다. 신분이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나이와 성별이 달라도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두를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이 놀랍고도 엄청난 일의 결과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인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로마 교회에 있던 문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다름으로 인해 업신여기고 비판하며 싸웁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서로 상처를 주고 마음에 담아두고 미워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보다 나보다 남을 낮게 여깁니다.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기보다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바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연약함을 보듬어주기보다 허물을 들추어내고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리스도 희생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워진 교회가 이정도의 수준으로 살아야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교회가 그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로 인해 가려지고 왜곡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괜찮은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를 두고 지내느라 어쩌면 서로 부딪힐 일이 없어서 잘 모르고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봉사의 기회가 줄었고 함께 하는 시간이 줄었기에 별문제 없이 그냥 그렇게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참석조차 잘하지 못해서 갈등이라는 것을 잊고 지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 교회의 여러 사역들이 회복될수록,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런 일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서로 다름으로 인해, 누군가의 연약함으로 인해 속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생각 없이 한 말로 인해 화가 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나만 고생인 것 같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과 갖은 수고와 희생이 있더라도 우리가 함께 이루고자 하는 꿈은 훨씬 더 값지고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는 것,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모두가 한 뜻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따라야 할 명령은 확실합니다. 하나의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바울은 14장을 시작하면서 했던 명령을 다시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처방입니다. “받으라”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교회가 하나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받으라” 우리는 이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름이 있더라도 연약함이 있더라도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기꺼이 형제의 짐을 들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 어려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가 서로 받아주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7절은 우리가 어떻게 서로 받아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라고 되어 있는데, 의미를 정확하게 하면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7절을 다시 말하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받아 주신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같은 방식으로 같은 방법으로 같은 태도로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 주어야합니다.

주님이 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합니다. 그 모든 일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뜻하신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기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때로는 어려움이 있고 악한 세력들의 방해가 있더라도 수고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셨기에 우리도 주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자가 우리들이기에, 주님이 내 삶의 목적이고 주님이 내 삶의 이유가 되시기에, 주님의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주님이 사랑하여 받아주신 형제자매를 나도 받아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위해 주님이 하신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5: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받아주시기 위해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습니다. 추종자로 번역된 단어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의 “사역자”(13:4)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라고 하셨을 때 그 “섬기는 자”(마20:26)가 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섬기는 자 혹은 종으로 번역되고 일꾼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기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할례로 비유되는 유대인을 섬기는 자가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오히려 사람이 되셨고 유대인으로 태어나셨고 유대인을 위해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이것은 구원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표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유대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대상으로 이방인이 제외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의 주제라 할 수 있는 1:16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먼저는 유대인이고 그리고 헬라인입니다. 순서는 있지만 차별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할례의 추종자가 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해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15:8 …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15: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정리하면, 유대인에 대해서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려고 하나님의 진실하심, 그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려고 예수님은 유대인을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 대해서는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시려고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고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모든 약속을 지키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하나 될 수 없었던 자들이 하나 되어서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예수님을 찬양대를 지휘하는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예수님의 지휘 아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어서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받아주고 하나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뜻하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품어야 할 소망이며 우리의 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다시 바울의 기도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하는 것, 주님과 같이 서로를 받아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받아주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많은 경우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한 두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하기에 그만큼 섬기는 자가 되어서 형제자매를 받아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기에 그분의 능력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기도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소망이 우리의 꿈이 되고 그 꿈을 위해 서로를 받아주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