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라가 임하시오며

본문 :  시편 72편

설교자 : 최종혁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20절)

시편의 2권의 마지막 시편. 이후로도 다윗의 시편이 나오기는 하지만 1, 2권만큼은 아님. 1, 2권은 다윗이 주저자로서 다윗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마무리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시인 72편이고 이 시는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부푼 기대를 담고 있다.

시편의 장르 구분 : 내용과 형식에 따라, 1, 2권의 주된 장르는 애통, 탄식. 특히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의 왕으로서 그가 보고 경험했던 세상의 불의, 악함 등에 대해서 탄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나님의 구원을 구했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시편 72편의 내용은 다윗의 기도 선집의 결론으로서 매우 적합하다. 가장 이상적인 왕, 왕의 통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는 처음 왕이 세워질 때 최고치에 달하는데,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72편을 왕의 대관식에서 사용된 시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시편은 왕의 대관식에 분명 잘 어울리지만, 내용을 고려해보면 그때 뿐 아니라 왕을 위해 기도한다면, 항상 이런 내용의 기도가 합당하다. 이상적인 왕의 통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하면서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 기도에 해당되는 기도가 시편 72편이다. 왕이라는 단어를 지금의 대통령이나, 다른 어떤 위정자로 바꾸면 우리의 기도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편 72편은 모든 지도자를 위한 기대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지도자도 이에 100% 부합한 적은 없다. 역사를 보면 이런 기준에 따라 볼 때 더 나은 사람도 있었지만,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평가를 받은 다윗도 이런 통치를 원했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다. 다윗의 아들이자 이 시편의 저자인 솔로몬은 많은 기대를 받았고 자원도 충분했지만, 그 자신도 하나님을 떠났었다. 율법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로 돌이켰던 요시야 왕이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히스기야 왕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훌륭한 왕들이었지만 모든 면에서 시편 72편이 말하는 이상적인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편 72편은 현재의 지도자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되기도 하지만, 미래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에 해당되는 기도가 바로 시편 72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편을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함께 살펴보고 교훈을 나누기 원한다.

시편 72편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특징을 크게 4가지 정도 발견할 수 있다.

  1. 의로운 통치(1-4절)
  2. 강력한 통치(5-11절)
  3. 자비한 통치(12-14절)
  4. 복있는 통치(15-17절)

 

왕의 의로운 통치(1-4절)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1절)

왕과 왕의 아들 – 왕과 그의 아들을 따로 말하고 있다기 보다는 이제 왕이 된 왕의 아들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이 시편을 대관식의 시편으로 보기도 한다.

왕을 위해 구하는 것은 바로 주의 판단력, 주의 공의다. 이는 솔로몬을 생각나게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라고 답했었다. 공의로 다스리는데 있어 올바른 판단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솔로몬 하나님께 그것을 구했었던 것이고, 여기 시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왕을 위해 그런 판단력과 공의를 구한다.

특히 이런 판단력과 공의는 “주의 판단력”, “주의 공의”여야 한다. 공의는 가장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사실 사람에게 있어 공의는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각자가 가진 가치관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정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공의라고 생각했던 일이 후에는 그렇지 않게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의 공의는 진짜 공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를 왕에게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2절은 그 목적에 대해서 말한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2절)

하나님의 공의가 왕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공의로 통치해야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왕들은 사람들을 더 쉽게 통치하기 위해 신을 만들고 자신을 신의 대리인으로 칭하며 스스로 신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 참된 왕이시고 이 땅의 왕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의 대리인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왕은 신이 아니고 신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따라서 백성들은 인간 왕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다. 따라서 인간 왕은 자기 공의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더 중요하다.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신명기 17장 18-20절(이스라엘의 왕) : 왕은 율법서를 자기 손으로 기록하고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그 말씀을 지켜야 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니의 말씀을 잘 알아야 했던 것이다. 자기 뜻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공의대로 백성을 다스려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는 하나님의 공의가 특징적으로 드러나야 했다.

3-4절은 왕의 의로운 통치의 결과가 어떻게 드러날지를 말한다.

“3 의로 말미암아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4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3-4절)

왕의 의로운 통치에 산이나 작은 산 같은 자연 만물도 화답하고, 특히 가난한 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고, 궁핍한 자도 구원을 얻고 반대로 압박하는 자, 즉 압제하는 사람들은 꺾일 것이다. 이것이 이상적인 왕이 통치할 때 나타나는 의로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자연계에까지 의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로운 왕이라도 흉년이나 가뭄 같은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오직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탄식하는 사람들과 피조물들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죄 자체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고, 이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실 때 우리는 참된 공의가 무엇인지 맛보고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 있는 그런 평화의 나라를 말하면서 그 나라의 왕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 11:1-5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의로운 왕이 다스리는 의로운 나라다.

 

왕의 강력한 통치(5-11절)

다음으로 5-11절은 왕의 강력한 통치를 묘사한다. 왕이 아무리 의로운 통치를 베푼다고 해도 그 영향력이 극히 제한적이라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왕의 통치는 의로울 뿐 아니라 강력하기도 하다. 그 강력함은 그 힘이 미치는 시간과 공간에서 드러난다.

영원(5-7절)

먼저는 시간적으로 왕의 통치는 영원하다.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5절)

왕의 의로운 통치로 인해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일이 해가 있을 동안, 그리고 달이 있을 동안 대대로 계속될 것을 말한다. 즉, 그치지 않고 계속되기를,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하는 이유는 그런 왕의 통치가 백성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한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왕이 의롭게 통치할 때,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는 것이다.

“6 그는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내리리니 7 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6-7절)

비나 소낙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한 상징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고 풍요롭게 하실 것이고, 특히 의인이 흥왕할 것이다. 잠깐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되는 것이 이상적인 왕의 통치이다.

광대(8-11절)

다음으로, 공간적인 측면에서 왕의 통치는 광대하다.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11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8-11절)

여기 사용된 표현을 다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저자는 온 땅과 그 안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다른 왕들, 원수들, 모든 민족들이 왕을 섬기게 될 것을 바란다. 어느 한 곳,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의로운 왕이 통치하신다.

이렇게 영원한 통치, 광대한 통치를 기원하는 것은 왕에 대한 합당한 예우이기도 하다. 어떤 왕에게도 그냥 살만큼 살고 다스릴 만큼만 다스리다가 떠나십시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렇게 영원하고 광대한 통치를 했던 왕은 없다. 왕 한 사람이 아니라 왕조로 생각해 봐도, 이렇게 강력한 통치력을 나타낸 사람이 없다. 거의 없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다. 과거의 헬라나 로마, 몽골 같은 대제국들도 다 멸망했다.

하지만 이상적인 하나님의 왕 메시아가 통치할 나라는 그렇지 않다. 그 의로운 통치는 일시적이지 않고 부분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실 것이다(빌 2:10-11). 계시록에 기록된 노래 중 하나의 가사는 이렇다.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강력한 왕이 다스리는 강력한 나라다.

왕의 자비한 통치(12-14절)

앞서 언급한 의로운 통치나 강력한 통치에 대해서 약간은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뭔가 냉혹하게 법대로만 통치하면서 힘으로 압제하는 것 같은, 부정적인 독재자의 모습이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도 조금씩 언급되었던 것처럼, 이상적인 왕은 그런 왕은 아니다. 그는 가난한 자가 정의로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궁핍한 자를 구원하는 왕이다. 그의 통치는 비와 같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악인이 아닌 의인을 흥왕하게 한다.

여기 12-14절에도 그런 통치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2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12-14절)

도움을 구할 때 돕고, 먼저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는 이유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없는 자들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세상의 통치자들도 이렇게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지 이렇게 그들 자체를 존귀하게 여겨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메시아의 통치는 그렇지 않다. 보여주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메시아의 통치는 자비로 특징지워진다.

이런 특징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일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그 능력으로 많은 일들을 하실 수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은 병을 고치는 일이었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18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면서 몸을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눅 13장). 그러자 회당장은 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했고,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눅 13:15-16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자신들의 전통을 들이밀던 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자비함으로 드러내셨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통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그 나라가 자비의 나라임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자비한 왕이 다스리는 자비의 나라다.

왕의 복있는 통치(15-17절)

하나님 나라의 네번째 특징은 복있는 통치다. 지금 이 땅에서는 의와 선이 반드시 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많이 보게 되고, 그런 경험들이 의롭게 사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많은 다윗의 탄식시의 원인이 그러했다. 심지어 다윗은 자신이 왕인 나라 안에서 그런 일들을 목격했기 때문에 더욱 상심하고 좌절했을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에 따라 의롭게 사는 사람이 100% 복을 받고 형통한 삶을 지금 이땅에서 살 수 있다면, 아마 지금보다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런 세상은 우리의 상상 속에만, 기대 속에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는 그런 상상이 현실이 되는 나라다.

“15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16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15-16절)

착하긴 하지만, 가난하고 어려운 그런 나라가 아니라 백성들이 풍성하게 누릴 복이 많은 나라다. 다른 나라의 칭송을 받고 먹을 것이 풍성하다. 이유는 그 나라의 왕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17절)

왕을 통해 그 나라의 백성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라고 하신 말씀의 성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아직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질적인 모든 복을 누리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우리는 메시아를 통한 모든 복을 정말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을 주는 왕이 다스리는 복된 나라다.

도전

그렇다면 이 시편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할까? 먼저 우리가 얻지 말아야할 교훈부터 생각해 보자.

이 시편은 우리에게 지금의 세상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이지,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이상적인 왕,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의 특징을 네 가지 살펴봤다. 의로운 통치, 강력한 통치, 자비한 통치, 그리고 복있는 통치다. 이런 통치가 가능한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최선을 다해서 그런 통치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본래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의로우시고, 강력하시고, 자비하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가, 그분의 나라가 그런 특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곧 또 다시 대통령 선거를 하게 되겠지만, 언제나 선거라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나마 나은 사람, 그나마 덜 나쁜 사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이 속한 정당을 보면서 투표를 하게 될 때가 많다.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우리의 삶에서도 드러난다. 시스템으로 어느 정도 문제를 막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람이 지닌 한계라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이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이상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류 역사 상 에덴 동산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상적인 사회가 세워진 적이 없다. 죄인인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우리가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면 언젠가 하나님이 그 왕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 왕은 약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었다. 하지만 그 때는 왕으로서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가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바로 그런 왕이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스리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를 기다리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한다. 그러면서 18-19절과 같은 찬양을 드린다.

“18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18-19절)

유일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이 충만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온전한 의미에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이 우리가 먼저 할 일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편 72편은 이상적인 왕은 아니지만 그 왕의 그림자로서 혹은 대리자로서 왕이 어떠한 통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그 왕은 온전하지 못할지라도, 진정한 왕의 통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를 왕으로 세운 진정한 왕, 즉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 공의로 다스리고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복의 근원이신 참된 왕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도 왕관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편 72편은 우리에게 같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즉, 진정한 왕의 모습을 우리 삶 가운데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왕이 얼마나 공의로우신지, 얼마나 자비하신지를 나타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복의 근원이신 참된 왕을 선포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삶의 방향이라고 이 시편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졌든지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가 그렇게 예배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참된 왕에께 무릎 꿇게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찬양으로 가장 익숙한 것이 바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로 시작하는 찬양일 것이다. 멜로디도 경쾌해서 사실 가사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아무나,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르는 찬양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가볍게 부를 수 있는 찬양은 아니다. 2천년 전에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왕은 그 일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셨고 이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는 다스리기 위해 오실 것이고 그 다스림에는 구원과 심판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왕을 이미 영접한 사람들에게 그의 오심은 여전히 기쁘다 구주 오셨네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의 오심은 기쁜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이다. 혹시라도 아직 의롭고 자비하신 참된 왕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그 두려움 가운데 왕을 마주하지 않도록 지금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그 왕을 영접한 분들은 내가 그 왕의 사신으로서 대리자로서 어떤 왕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그분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그분의 오심을 정말로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