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본문 :  로마서 9장 1-29절

설교자 : 이병권

 

이솝우화에 박쥐 이야기가 있습니다. 길짐승과 날짐승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박쥐는 눈치를 보면서 이편에 붙었다가 저편에 붙었다 하다가 결국, 양쪽 모두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유대인들 입장에서 바울이 박쥐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대인 됨을 부인하거나 거절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면 유대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누구보다 더 이방인 편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했고 그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계속되는 핍박과 위협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이 보기에 바울은 동족을 버린 배신자와 같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울과 같은 상황이라면 유대인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나를 괴롭히고 대적하는 유대인들, 내가 전하는 복음을 훼방하며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그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요? ‘그래! 두고 보자,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할거야! 하나님의 심판이나 받아라’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이와는 너무도 다른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애타는 심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8장에 이어서 오늘 본문을 보면 뭔가 갑작스럽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뜨거운 감격으로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찬양하던 바울이 갑자기 마음에 있는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오해 없이 전하기 위해서 특별히 더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말을 한다. 거짓말이 아니다. 내 양심은 물론 성령님이 증언하신다.’ 지금 바울은 어쩌다 문득 이스라엘이 생각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생각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생각, 그 중심에는 늘 이스라엘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뇌구조를 그려본다면 아마 이스라엘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격했던 그 순간에도 늘 자신의 마음에 아픔이 되는 이스라엘을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항상 그의 마음의 부담과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가 대신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하더라도 나의 형제들, 나의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싶은 바울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들입니까?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라’(출4:22)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성막과 성전이 있어서 그 영광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들에게 특별 계시인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사장과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하셨고 수많은 예언들을 성취하며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그들의 조상이며 무엇보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려면 특정한 민족과 문화 속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외국의 유명한 사람이 우리나라에 방문하면 뉴스거리가 됩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한복을 입고 비빔밥을 먹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들에게 큰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 더 쉽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놀라운 특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이 많은 특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는 바울의 설명은 9장에서 11장까지 이어집니다. 로마서의 세 번째 본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은 하나님이 선하신 뜻대로 이루십니다. 시작부터 그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이스라엘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과 이스라엘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었던 교회가 이런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의 여러 말씀들을 인용하며 이 질문에 답을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과 복음이 일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도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신중한 대답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세 가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실패, 아닙니까?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이 폐하여진 것으로 하나님의 실패, 혹은 실수가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바울의 대답입니다.

9: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되거나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혈통적으로 그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후손들 중에서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그 후손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참 이스라엘도 있다는 것입니다(4:16).

바울은 창세기에 나오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먼저 이삭입니다.

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녀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자녀 중에서 한 사람, 이삭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자녀였지만 약속의 자녀는 아니었습니다. 사라에게 태어난 이삭이 약속의 자녀였고 하나님의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9: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의 경우는 이삭의 경우보다 더 분명하게 이 특징이 나타납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로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부모에 의한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그들의 행위나 능력이나 헌신과는 무관함을 말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형 에서가 아니라 동생 야곱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은 사람의 생각이나 기대와 관계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미워하셨다고 하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감정적인 미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 말씀은 그런 미움은 아닙니다. 관용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그들의 가족을 미워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들을 감정적으로 미워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이유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심으로 그를 택하셨습니다.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 택하심은 야곱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삭과 야곱의 예를 통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이스라엘 민족 모두를 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폐하여지거나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을 가져옵니다. 꼬리를 무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왜 어떤 사람은 참 이스라엘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만 택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공의롭지 못한 불의가 아닐까요?

 

두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불의, 아닙니까?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것은 불공정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저렇게 합니까? 왜 차별 하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면서 다시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이번에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예입니다. 먼저 모세입니다.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이 누군가 택하시는 근거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선택의 이유가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택하고 택하지 않고는 차별의 문제가 아닙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누군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누군가 그 원함을 실천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함으로 판단할 사항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자가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학생, 열 명을 택해서 그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도울 수 있는 가난한 학생은 열 명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면 열 명만 도와준 이 부자에 대해서 불의하다고, 왜 다른 학생들을 도와주지 않았냐고 따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부자에게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가 가난한 학생들 도운 것은 긍휼이기 때문에 불의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긍휼하심으로 택하셨다고 해서 그것을 불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바울은 바로의 예를 듭니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 뜻대로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누군가를 완악하게 하십니다. 바로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은 완악하지 않은 누군가를 먼저 강제로 완악하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가 원래 좋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를 악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바로가 스스로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한 마음을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저항하기로 마음먹었고 하나님은 바로가 스스로 택한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완악함을 직접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죄를 짓도록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택하셨다고 해도, 또 어떤 사람을 완악함으로 그냥 내버려 두셨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십니다. 우리가 놀라워하고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은 왜 누군가는 구원하시고 왜 누군가는 구원하지 않으시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람도 구원받을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긍휼하심으로 누군가를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정말로 놀라운 사실이며, 더욱이 그 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불의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그 뜻대로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뜻대로 누군가를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그리고 이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 뜻대로 행하시고 구원이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면 그 결과에 대한 것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닐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서 죄를 물으실 수 있습니까?

 

세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책임, 아닙니까?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19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결국 하나님이 뜻대로 하신 거라면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죄를 물으실 수 있냐?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누군가를 완악하게 하셨다면, 그렇게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날 이렇게 만들었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 책임이고 하나님 잘못이야! 그런데 왜 우리에게 허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또다시 두 가지를 예를 듭니다. 토기장이 비유와 구약의 말씀들입니다.

9: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9: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합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며 피조물이 창조주께 따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반문,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두고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질문들은 가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책망하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주제넘게 하나님을 판단하며 그 하신 일과 그 말씀에 대해서 말대꾸를 하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라고 책망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우리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생길 수 있고 때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누군가에게는 진노를 보이시고 누군가에게는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을 보이시고 누군가에게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왜 저 사람에게 저렇게 하셨냐고 왜 나에게 이렇게 하셨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하신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극히 선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그 하신 일에 대해서 우리는 반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과 작은 견해로 우리의 짧은 인생의 경험과 지혜로 무엇을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책임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다만 우리는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우리는 진흙일 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지는 24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심을 설명합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를 바르게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 주석가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우리의 이해를 도와줍니다.

‘다섯 사람이 은행을 털기로 모의했다. 이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이다. 그 사실을 알고서 나는 그들에게 간청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빌었다. 결국 그들은 나를 밀쳐내고 출발했다. 그때 나는 한 친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그와 뒤엉켜서 싸웠다. 다른 친구들은 은행을 강탈했다. 은행 경비원 한 사람이 죽었고 친구들은 체포된 후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담하지 않은 그 친구는 구형을 면했다. 여기서 당신에게 이렇게 질문하겠다. 네 사람의 친구가 죽은 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인가? 그렇다면 구형을 면한 그 친구는 나는 아주 착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가 자유로운 이유는 내가 그를 제재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지옥에 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어느 누구도 책망할 사람이 없다. 또한 천국에 가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어느 누구도 찬양할 분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은 솔직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지혜안에서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생각할 때,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내가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로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가 아니기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