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기도하라

본문 : 베드로전서 4:7

설교자 : 조정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전에 배웠던 벧전 4장 1-6절의 말씀은 죄와 치열하게 싸워서 승리하고자 하셨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저는 현재 복음반을 맡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유평교회에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더해져 현재 10명 정도가 복음반 공부에 참여하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반을 진행할 때를 생각해보면, 아직 복음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제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 분들은 성경은 인간이 만들어 낸 책이 아닌지, 예수님의 존재가 허구가 아닌지 묻습니다. 복음반을 통해 하나님 말씀이 계속해서 전해질 때 견고하고 강퍅한 그들의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간이 되면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어떤 분은 박수를 치며 천국에 소망이 있음에 기뻐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 못하겠다던 구도자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그 사실이 이상하게 믿어진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여러분은 그 때가 기억나십니까? 여러분이 처음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가 기억나십니까? 그들을 보면서 그들 안에 복음의 소망이 가득 담겨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았던 소아시아 성도도 우리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소망이 분명하기에 베드로는 그것을 “살아있는 소망”이라 불렀습니다(1:3). 그들에게 있어서 있으나 마나 한, 혹은 잊혀진 소망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복음의 소망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본 적은 없지만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고, 너희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앞으로 불같은 시험이 다가올 것을 알지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산 소망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불같이 타오르는 산 소망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전 제 자신을 돌아보며 제 소망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구도자들이 구원을 받았을 때의 그 기쁨이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축구 영상을 볼 때 기가 막힌 패스나 멋진 슛들을 보며 짜릿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소망이 그만큼 짜릿합니까? 저는 좋아하는 책을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큰 감동을 느낍니다. 여러분 안의 복음의 소망으로 인해 그런 큰 감동을 느끼십니까? 왜 우리는 이 세상이 주는 짧은 감동과 기쁨은 좋아하면서도 우리의 영혼을 뒤바꾼 복음의 소망은 기뻐하지 못할까요? 베드로는 4장 7-11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산 소망이 살아서 우리 가운데 역사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소망이 정말 살아있는 소망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대로 꺼지지 않는 원동력이 될 수 있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11절에는 총 4가지의 비결이 나오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 비결인 “기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4:7). 사도 베드로는 먼저 산 소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왜 우리가 더 뜨겁게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미지근해서는 안 되는, 흐지부지 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바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마지막” 두 글자로 “말세”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부터 다시 오실 날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시대 구분에 있어서 마지막 시대를 말합니다. 이 말세의 특징은 언제 그 끝이 올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내일, 또는 지금 이 순간이라도 예수님은 오실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말세에 대한 분명한 사실은 오늘 베드로가 외치고 있는 것처럼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은 이미 정해져 있는 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는 매순간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 역시 곧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 22:20)

사도들 역시 주님 오심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1-2)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고 말했습니다. 야고보 역시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약 5:9)고 말했고, 베드로도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벧후 3:10)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속히 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고 답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세의 특징입니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 날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것, 주님의 오심이 임박하다는 것에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주님의 오심이 임박했다고 썼을까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이 말씀이 전해진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30여 년이 흐른 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완전히 마음이 떠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주 오심을 부인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벧후 3:3-4).

베드로가 경고하고 나서 벌써 이천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도 참 변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저 자신을 돌아봐도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살아있을 동안 주님이 오시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됩니다. 야고보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한 계획과 강력한 의지, 분명한 계산을 가지고 살면서도 하나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곧 오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 후, 2천 년이 흘러가면서 주님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식어가고 잠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열 처녀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마 25). 주님은 그 중 다섯을 슬기 있다 하셨고, 나머지 다섯을 미련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중 다섯은 기름을 가졌고, 또 다른 다섯은 가지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신랑이 더디 왔을 때 열 처녀 모두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신랑이 오고 있었는데 피곤해서 잠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피곤하여 지친 제자들을 이해하셨습니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항상 주오심만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섯은 준비되었고, 다섯은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5명은 신랑이 왔을 때 기쁨으로 잔치에 참예했고 나머지 5명은 잔치에 참예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 비유를 마치시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 다섯 명이 깨어 있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섯 명의 처녀처럼 깨어 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깨어 있지 못한 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12)고 하셨습니다. 주 오심을 기대하며 깨어있지 아니한 자들은 비유에 나오는 신부처럼 신랑의 기쁨이 되지 못할 뿐더러 심각한 경우 그들은 여기 경고된 바대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 발견될 수 있다는 무서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어떻게 살든지 결국 우리는 마침내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안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원합니다. 혹 우리가 연약하여 잠들어 있어도 주님은 기뻐 우리를 맞아주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진실로 깨어 있는 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도 두 가지 명령어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정신 차리고 근신하라” 사도 베드로가 준 명령어들은 모두 “깨어있으라”는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온전한 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5장 15절과 누가복음 8장 35절에서 귀신 들린 사람이 정신이 온전하여 진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귀신과 같이 다른 것에 통제를 받는 정신이 아니라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맥아더 목사님은 “감정이나 격정에 휩쓸리지 말고 삶에 대해 합당하고 영원한 조망을 유지하라”고 설명했습니다(맥아더 성경주석, 1576). 무언가를 생각하고 결정할 때 감정과 풍조에 휩쓸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계산하여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고려하라는 것입니다.

“근신하다”는 것은 “정신을 차린다”와 유사한 표현인데, 본래는 술 취한 상태나 잠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8절과 디모데후서 4장 5절을 보면 “정신을 차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앞에 있는 “정신을 차리라”와 아주 비슷한 표현입니다. 술 취하거나 잠에 취한 사람이 거기서 헤어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과 잠에 제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이 술에서 깨기 위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술이 몸에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고, 물이나 다른 숙취해소 음료를 마셔서 몸속에 퍼진 알코올을 희석시켜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명령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 정신과 생각 속에 파고드는 세상의 여러 가지 가치관과 생각들, 잘못된 사상과 풍조들, 감정적 격정적 판단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는 것이며, 계속해서 우리를 세상에 취하게 만드는 것들을 바른 생각과 판단과 기준과 가치관으로 희석시키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바른 것으로 교훈하고 책망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고 우리에게 올바른 교훈을 하고 잘못된 삶을 바로잡아주고 의로 교육시켜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베드로는 말세가 왔으니 깨어 있어야한다고 말씀을 마치지 않고 그 목적을 기도와 연결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명령어는 하나의 목적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단지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라고 하니 조금은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 혹은 일어나서, 잠들 때 드리는 기도라는 단편적인 이해를 가진다면 말입니다. 더 큰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기도는 더 광범위하게 말하면 ‘예배’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삶과 동떨어진 종교적인 예식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나의 삶과 아무 관계없이 “하나님 찬양을 받으세요”라고만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먹고 마실 때와 말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 무엇인지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 내 삶에서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인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앉혀두는 내 마음을 다스려 하나님이 중심에 와 계시도록 만드는 것이 기도이며, 지극히 내 중심적으로 살려는 육신의 욕구를 거슬러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 보다 더 쾌락을 사랑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딤후 3). 기도는 그 말세의 풍조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돈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순위에 두며, 쾌락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 마음이 날마다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삶은 계속해서 내 중심대로 흘러갑니다. 기도의 삶은 그런 우리에게 계속해서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에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는 내 삶의 주파수를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필요를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흐르도록 절실히 간구하면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구하셨던 예수님처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그분께 아뢰며 그분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산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소망이 살아 숨 쉬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깨어서 주를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도는 산 소망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곧 잠들어버립니다. J. C. 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흡으로 몸이 사는 것처럼 믿음은 기도로 삽니다”.

간략하게 말세가 임박한 이 시점에 왜 기도가 절실한지 이유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우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벧전 5:8) 이것이 사실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쉴 틈 없이 공격합니다. 교회를 갈라놓으려 합니다. 밤낮 형제를 참소합니다. 죄로 유혹하고 넘어지게 만듭니다. 이 무서운 대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의 방패를 든든히 쥐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곧 중상을 입고 말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말세에 더욱 더 고통 받기 때문입니다(딤후 3).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했던 말세의 고통을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거짓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들을 더 다양한 방법과 경로로 제시합니다. 현혹시킵니다. 과거에는 현재보다 죄악이 만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죄의 접근성이 갈수록 편해집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더 모호해집니다. 죄책감이 없어집니다. 포르노그라피를 스마트폰으로 집 안에서 누구나 볼 수 있고, 보편화된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고 그것으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며 죄들을 합법화시켜나갑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 안의 죄성을 더 퍼뜨릴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악을 더 많이 표출시킬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악한 폭풍들이 몰아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러한 것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기도하는 삶이 곧 우리가 천국에서 맞이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천국은 인간의 쾌락을 만족시켜주는 곳이고, 불교나 힌두교의 천국은 고통이 없는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해주는 곳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이 세상에서 버티고 버티면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천국이 임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천국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예배하는 곳,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천국이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J. C. 라일은 “거룩”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 지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너무 엄격하고, 까다롭고, 진지한 사람들처럼 여겨져, 그들과 함께 있기를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이런 사람만 있는데 어떡합니까? 아마 지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지루하고, 우울하고, 어리석게 보이고, 가끔 어쩔 수 없이 하는 정도로 달갑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식일인 주일이 부담스럽고 지루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아무리 짧아도 너무 번거롭고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천국은 영원한 안식일입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하고 밤낮 부릅니다(계 4:8). 어린양의 노래를 쉬지 않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이런 일을 즐겨 할 리가 만무합니다”(121페이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바라면서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잔소리꾼이나 귀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빨리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분의 손에 난 못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보면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얼굴과 얼굴로 만나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며 그분께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고 싶지 않습니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던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명하였습니다(3:15).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묻는 자들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정말 살아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그들의 소망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묻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복음에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이 물을 것입니다. 나와 똑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가, 소망을 품을 수 있는가 말입니다. 복음의 소망이 살아 숨쉬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무슨 결정을 하든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016년 한 해는 기도의 삶을 회복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