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그리스도의 영광

본문 : 시편 22:22-31

설교자 : 최종혁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시편 22편의 가장 큰 제목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던 장면에 대해 말씀을 나눴는데, 사역 기간에 계속해서 예수님과 부딪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천국문을 잡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사람들을 인도했지만 멸망으로 인도했던 거짓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유대교는 하나님이 원하셨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것에 치우쳐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 30정도 된 한 청년이 나타나서 그들의 시스템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사람을 돌보는 일과 이적을 행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을 보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죽이려 했습니다. 계략을 잘 세워 대중들에게 미움 받지 않으면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결과로 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던 자들은 통쾌했을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예수를 해치웠다고 통쾌해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계획을 세우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아니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모든 구원을 계획 하시고 실행하셨던 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욕심대로 행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군병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욕심에 따라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았지만 그것은 시편 22편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며 조롱했을 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을 때,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획대로 정확한 시간에 이뤄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다 끝났다’ 했을 때에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고 계셨고, 하나님이신 메시야는 고난을 통과해서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죄에 빠진 인간, 창조 계획에서 틀어진 인간들을 다시 한 번 구원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구속사역을 성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21절까지는 익숙하지만 그 이후는 평소에 잘 읽지 않는 말씀입니다. 주로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며 시편 22편을 읽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 이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해소되는 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의 기도이고, 그것이 찬양이 되는 것이 22절의 말씀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다른데, 어떤 이는 예수님이 여전히 십자가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부활 이후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저는 첫 번째 의견에 동의합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31절에 가서 나오고, 이 말씀도 ‘찬송할 것’(예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계실 때 부활 이후에 이뤄질 것을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확신 가운데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이고, 혼자 하는 찬양이 아니라 ‘함께’ 하는 찬양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1-12)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들입니다. 이들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부터 시작해서 이방인들, 온 민족까지 찬양이 이어지고 모든 세대가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모든 사람이 포함 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23-24)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23). “야곱의 모든 자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복음이 전해진 순서는 유대인, 헬라인 순입니다. 예수님도 항상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셨습니다. 사역의 주 대상이었고 그 다음이 이방인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거절당했을 때 이방인들에게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며 경외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라’입니다.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높이는 것에 음악적 요소가 있는 것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 자체 얼마나 거룩하시고 크신 분인지 초점을 둔 것이며, 경외하는 것은 그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인지, 예배드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용어의 차이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명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구약성경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분명한 단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합당하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4). 여호와께 합당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유, 영광 돌리며 경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하신 일들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있는 자, 곤고한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 멸시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가리거나 귀를 막지 않으십니다.

메시아의 고난을 보던 다른 사람들은 메시아를 멸시하고 싫어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아무도 메시아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메시아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메시아를 통해 인류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여심으로, 곤란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올바르게 반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복음을 전한 사람들도 유대인입니다. 메시아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 유대인들 중에 일어났는데 그들의 수는 적었습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거절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바로 ‘큰 잔치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을 때 사람들이 여러 핑계를 대고 갈 수 없다 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밖에 나가서 천대받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초대받은 자들은 거절했고 대신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온 민족(25-29)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25). ‘서원을 갚는다’는 것은 서원하여 드리는 화목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하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제사에서 좀 특별한 것은, 서원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혼자 하거나 가족들만 데리고 하지 말라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를 종들과 레위인들과 함께 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 없는 자들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드린 것을 먹는 의식도 포함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먹으며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6).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이 받으시기 합당한 제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신약에서 부활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보다는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더욱 많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제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하늘의 잔치에 참여할 날이 오게 됩니다. 믿는 자들은 기뻐하면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26절에서 암시됩니다. 그 모든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복을 받게 됩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27). 모든 나라의 모든 민족이 복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29).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구속사역의 범위가 미치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가난한 자가 부하게 되고 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며 슬픈 자가 기뻐하게 되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일부를 맛보고 주님 앞에 이르는 날에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소식이 세대를 초월하며 퍼져갑니다.

 

온 세대(30,31)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30-31). 예수님 시대와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이후의 사람들도 주께서 하신 일, 구원의 일을 이야기 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이 대대로 전파됩니다. 누구에게나 ‘복된 소식’은 말하고 싶기 마련입니다. 좋은 곳을 다녀오면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렇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잘 전파합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도, 병이 나은 경험을 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기쁜 소식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경험했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변 사람과 다음 세대에게 전파하고자 할 것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그것을 알려주려고 할 것이고(전도),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라면 그 경험에 대해 나누고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예배, 교제).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에서 ‘그의 공의를 전한다’고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의롭게 행하셨는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늘 ‘심판’과 관련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은혜’가 아니라 ‘의’입니다. 공의는 죄에 대한 값을 요구합니다. 그 값을 예수님께서 치르셨습니다. 온전히 지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하신 표현은 당시의 회계하는 자들이 쓰던 말인데 ‘다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요구하신 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할 필요도 할 수도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리스도의 의에 이를 수 없고, 믿는 자들이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그리스도의 의에 무엇을 더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역으로 다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 자로서 의롭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의롭게 되기 위해 의롭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순종하신 결과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서 죄의 값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우리가 더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면 충분합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대대에 전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전해져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또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 한정된 것도 아닙니다. 부한 자, 가난한 자, 남자, 여자, 자유한 자, 종 모두가 복음의 대상이 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두가 동일하게 그리스도로 옷입고 의롭게 됩니다.

이 말씀은 사실 아브라함 때부터 있었던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아브라함이 복이 될 것이라고 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동일한 복을 누리고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에 동참한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린 모든 예배에 이유와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25).

부활절 바로 전 금요일을 ‘Good Friday’(좋은 금요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순간은 차갑고 어두운 날인데 어떻게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날이 바로,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휘장을 여셔서 누구나 믿는 자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예배할 수 있게 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할 때 그저 ‘감사하다’에 멈출 때가 있습니다. 구원에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구원 받은 사실 자체만 감사하고 그것에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 부수적인 것,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는 ‘왜 굳이 구원해서 이렇게 살게 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서 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 산 자가 되어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담이 되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십니까? 왜 그럴까요. 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경험한 자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이 놀라운 복을 얻은 자가 그것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해 무감각하게 예배드릴 수 있을까요. 주님의 희생의 가치를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안다면 지루해질 수 없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창피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가 그 사랑의 깊이를 알기를, 은혜의 너비를 알기를 원합니다. 희생의 가치를 알고 사랑의 깊이를 알아서 이 땅에서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자들로서 참된 예배자로서 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들어가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