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구원하는 표
본문 : 베드로전서 3장 21~22절
설교자 : 조정의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번 주 토요일인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의 날입니다. 마틴 루터가 교황과 성직자들의 잘못된 전통과 가르침에 반박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못 박은 날이기도 합니다. 당시 기독교는 교황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때였습니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 라틴어로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당시 독일어와 영어를 쓰는 일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것이 더욱 성스럽다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라틴어 성경이나 성당 유리에 그려진 성화를 보고 신앙을 키웠습니다. 당시 교회는 구원에 대해서도 오류가 많았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많은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유명한 지역에 여행을 가야 했고, 성인들의 이름을 빌려서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급기야 지금 현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또는 부모님이 연옥에 있는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야했습니다.

이와 같은 만행에 대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것은 한 가지입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진리는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당시 이 말은 참 혁신적이고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개혁자들이 주장했을 때 카톨릭에서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주관 아래 트리엔트 공의회를 열었고 로마카톨릭의 교리를 분명하게 확립하기 위해 칭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 ‘우리가 받은 의는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보존되거나 늘어나지 않으며, 그런 행위는 다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데 따른 열매요 표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 이것이 카톨릭이 결정한 사항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카톨릭과 기독교의 핵심적인 차이가 무엇이냐고 하면, 이것입니다. 카톨릭은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구원에 전혀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카톨릭이 값을 주어 의로움을 산다면, 기독교는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과연 우리가 무엇으로 의롭다함을 얻는가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너희를 구원하는 표다”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세례라고 말합니다. 흠정역은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라고 번역합니다. 침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한번 난제를 만납니다. 베드로는 두번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마 자신이 쓴 편지에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벧후 3:16).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무엇인지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살펴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행의 본이 되신 것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는 선행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선행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행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높이셨고 그를 대적하는 자들의 비방을 부끄러움으로 바꾸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모든 천사와 권세와 능력이 그분 앞에 복종한다고 말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곳에 올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본을 보이셨으니 너희도 악한 세상에서 본을 받아 선을 행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 본문 안에 오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 것이 아닌가요?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서 세례가 필수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침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을까요? 침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일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던 종교개혁자들도 침례가 죄를 사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마틴 루터도 물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씻어진다는 당시 카톨릭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재침례파는 침례가 죄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라고 했습니다. 카톨릭도 종교개혁자들도 재침례파를 싫어하여 이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당시에 재세례파(재침례파)가 등장했는데 세례는 참 구원받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며 세례 자체가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은 사람이 세례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식이 세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원 받고 나서 다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재세례파(재침례파)라 불렸습니다. 당시 칼빈이나 츠빙글리도 이들을 이단이라 책망했습니다. 재침례파들은 카톨릭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손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다시 침례를 받고 싶으면 물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하면서 수장해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에 누군가가 “침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냐?”고 물었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목숨을 걸고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정도로 당시에는 아주 심각한 교리적 문제였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종교개혁자들도 침례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성경은 침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십자가 옆에서 함께 달린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지만 강도는 침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등장하는 고넬료와 그 가족들은 베드로가 말씀을 전파하는 도중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복음은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행 10:43)였습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고 그 이후 세례를 받았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 역시 주 예수를 믿어 자신과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았습니다(행 16).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침례가 “육체의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죄를 씻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침례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한 과오를 씻어내고 싶을 때마다 침례를 받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침례는 죄를 씻어주는 효력을 갖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침례가 죄를 없이 해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를 해결해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침례를 받는 것은 우리 몸을 깨끗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우리 육체의 더러운 죄를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에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렘 2:22).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하는 “구원의 표” “곧 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의 용서와 새 마음에 대한 요청”(그루뎀, 베드로전서, 250)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저의 더러운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고도 온전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셨고(18절) 다시 부활하셔서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선한 양심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그러므로 침례의 행위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하나님께 선한 양심을 간구하는 것 역시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통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사실 베드로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세례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넘겼던 이유입니다. 노아시대 8명의 가족들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8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류는 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8명은 방주 안에 나머지는 방주 밖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가?라는 질문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것이 세례가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물속에 잠기는 것으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물속에서 나오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통점은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나와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계십니다.

22절은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그분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오른쪽, 오른손은 대부분 구약성경에서 왕의 권위와 힘을 의미했습니다(시 110:1; 엡 1:20-21).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자주 언급하였습니다(마 22:44; 26:64; 행 2:33-34; 5:31; 7:56; 롬 8:34; 골 3:1; 히 1:3, 13; 10:12; 12:2).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능력과 권세가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왕권과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보통 영적 세계의 선하고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유사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그러므로 예수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심판이 임한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안전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비방과 조롱, 따돌림이나 핍박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로 그분과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는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열심히 행하는 주의 백성이 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그러나 선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도 아닙니다. 그 어떤 행위나 우리의 노력이 구원에 첨가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영원히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할 영원한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