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겸손의 선으로 교만의 악을 이기라

본문: 로마서 12장 14-21절 외

설교자: 최종혁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언제나 회복을 추구해야 함을 배웠다. 내가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혹은 둘 다이든, 내가 먼저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 회복을 위해 상대가 먼저 어떻게 하기를 바라고 내가 움직일 조건을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지금 내가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 소극적으로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으로 상대의 죄나 잘못을 덮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의 마음을 품고 상대의 죄를 대면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회개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대가 무엇을 얼마나 하느냐가 아니라 그와 관계 없이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느냐다. 그런 순종이 회복이라는 결과로 전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내가 원하는 속력과 방향과는 무관하게 회복이 진행될 수도 있다. 회복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약을 먹으면 그 즉시로 병이 나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처럼 회복도 그렇다. 내가 힘들게 용서하고 회개하면 그 즉시로 모든 관계가 원래대로 회복되면 좋겠는데,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용서와 회개도 더 쉬워질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사에 비유했다. 이사하는 날은 하루이지만 이사의 궁극적인 목적인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은 하루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짐이 있고 그 짐을 풀고 제자리에 두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회복도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비싼 선물을 할부로 사서 주는 것에 비유했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선물을 받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선물을 준 나는 그 비용을 계속 지불해야한다. 비용을 다 지불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기본적으로 회복은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과 같다. 상처가 깊을수록 한번의 치료로 온전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고 때로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인간 관계의 회복도 그렇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즉각 관계가 회복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회복을 추구해야 한다. 이 설교 시리즈의 처음부터 강조한 부분이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것이 바로 세상과 교회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나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우주의 중심인 사람과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인 사람은 그렇게 다른 것이다.

문제는 구원 받은 우리에게 여전히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함께 있다. 여전히 나를 중심에 두려는 욕구와 하나님을 중심에 두려는 욕구가 함께 있는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려는 욕구가 교만이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려는 욕구가 겸손이다.

‘교만’이라고 하면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것, 으스대는 것, 뽐내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교만은 온갖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결국 나를 중심에 두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가장 겸손해 보이는 어떤 행동이 사실은 교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를 중심에 두려는 교만의 악이 사람 사이에 문제를 만들고, 회복의 과정에서도 같은 일을 한다. 계속해서 갈등을 만들고 다툼과 분열을 만든다. 그리고 그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의 선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겸손이 갈등을 멈추고 하나될 수 있게 한다.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등 가운데 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명했고(빌 4:2), 그 마음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기적인 욕심]이나 허영[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교만이 문제이고 겸손이 해결인 것이다. 베드로의 말도 들어보라.

벧전 3:8–9, 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11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처음에 읽었던 로마서 말씀 앞의 맥락도 마찬가지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 교만에 교만으로 응수하는 것이 보복이다. 네가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나도 너에게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그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그저 너와 나만 있을 뿐이다. 가해자인 상대방과 피해자인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생각의 근본에 하나님을 두고 그에 따라 행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12:14–21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는 것은 다른게 아니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내가 하나님은 잊고 내가 원하는대로 하면, 그것이 악에게 지는 것이다. 스스로 높아져서 내 권리를 더 찾으려 하고 조금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이 악에게 지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회개하고 용서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고 싶은 악을 겸손이라는 선으로 이겨낸 것이다. 그래서 가해자는 죄를 인정하고 거기서 돌이키겠다고 약속하고, 피해자는 그 행해진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을 계속해서 지켜가야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한번의 패배로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한다. 그래서 언제든 회복의 과정을 중단시키려 한다. 그래서 회복은 과정은 계속되는 내 안의 교만의 악과 겸손의 선의 싸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다.

그렇게 회복을 추구할 때 직면하게 되는 몇가지 교만의 장애물을 살펴보고  어떻게 겸손으로 이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장애물 1_회복을 원하지 않는다

회복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장애물은 회복을 원하지 않는 마음이다. 이것이 가장 먼저 극복해야할 장애물이며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우린 정말 회복을 원하지 않는다. 회복을 원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을 위한 회개나 용서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복을 위한 노력이나 희생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 안에서 고개를 든 교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뭐가 아쉬워서? 어차피 저 사람 손해지, 내가 손해볼 건 하나도 없어. 잘못은 저 사람이 했지 내가 한게 아니야.”

“이 정도면 나도 할만큼 했어.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저 사람이 나한테 너무하는거 아니야? 용서하든 말든 나도 이제 신경 안쓸거야.”

이렇게 용서하려고 하지 않고 회개하려고 하지 않으면, 당연히 회복도 불가능하다. 이것을 “나는 회복하고 싶은데 저 사람이 회개(혹은 용서)하지 않아서 안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관계라면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혹, 어느 한쪽의 문제로 회복이 진척되지 않는다고 해도 회복하려는 그 마음 자체를 접지는 않는다. 그런데 내가 성도와의 관계에서 회복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회개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근본에 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이라면 성경이 믿는 자의 회개와 용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회복을 추구하지 않는 성도는 그 자체로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기름, 기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물이기 때문이다.

회복의 핵심 요소인 회개와 용서를 생각해 보라.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변명과 정당화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고 혹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는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다.

요일 1:8–10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것이 참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다. 따라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특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하나님 앞에서만 죄를 인정하고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앞선 설교에서 영화 ‘밀양’에 나오는 잘못된 회개에 대해서 언급했었는데, 성경은 절대 그런 회개를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수직적 관계와 우리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든 하나님께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이 사람 앞에서는 그 죄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회개하지 않는 것은 죄의 본성을 따르는 것으로서 세상의 특징이며 불신의 특징이지, 결코 구원 받은 자의 특징이 될 수 없다.

용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의 끝에서 예수님은 그 종에게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말씀하셨다(34절). 이 말씀은 분명 비유이기 때문에 비유의 모든 요소를 실체와 연관 짓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비유의 포인트에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땅히 용서해야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땅히 용서하지 않은 이 종은 주인의 용서를 받지도 못한다. 그는 용서받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는 것이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는 또한 용서하는 자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특징이다.

회개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특징이 될 수는 없다. 우리 안의 교만이 ‘나’와 ‘그 사람’에 대해서만 말할 때, 그래서 용서하고 싶지 않고 회개하고 싶지 않고 회복하고 싶지 않을 때, ‘하나님’을 그 말에 끼워 넣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의 감정에 따라 내가 원하는대로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서로 불쌍히 여기고 용납할 것을 말씀하신다. 서로의 짐을 질 것을 말씀하신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것을 말씀하신다.

정말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렵다면 그런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의 시선을 행해진 ‘죄악’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불쌍한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의 죄악을 위해 가장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둬야할 것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인 상대방에게서 선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그것에 따라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용서하고 회개하겠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첫번째 장애물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회복을 추구할 수 있다.

장애물 2_죄의 결과를 감당하고 싶지 않다

죄는 그 영향력이 있고 그만큼의 결과가 따라 온다. 사람 사이 관계에서 벌어진 죄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죄를 다루는데 있어 우리는 최대한 그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 회복의 과정에서 우리는 죄의 결과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다루어야 온전한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누구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 회복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럼, 회복의 과정에서 죄의 결과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다시 예수님의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생각해 보자(마 18장). 이 비유에서는 두 사람의 채무자와 채권자가 나온다. 왕과 그의 신하, 그리고 그 신하의 동료다. 왕은 채권자이고 그의 신하는 채무자이자 채권자다. 그리고 그 신하의 동료가 또 다른 채무자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에 문제를 가져온 것은 마땅히 갚아야할 돈을 갚지 않는 죄였다.

돈을 갚지 않은 두 채무자는 채권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26, 29절). 죄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지겠다고 말한 것이다. 잘 알듯이 이에 대해 채권자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왕은 그 신하를 불쌍히 여겨서 풀어 주면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채무자가 담당하겠다고 말했던 그 죄의 결과를 자신이 담당한 것이다. 반대로 왕의 신하는 그 동료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빚을 갚도록 옥에 그의 동료를 가두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 책임은 가해자, 즉 회개하는 자가 져야 한다.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결과를 자신이 담당하는 것이다. 회개의 핵심 요소가 죄를 인정하는 것과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죄로 생겨난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는 것이다. 이 경우는 빚을 갚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삭개오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이런 회개의 올바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말했다. 회복을 위해 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다.

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다 할 수 없는 경우들이 많다. 이 왕의 신하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진 빚은 일반적으로 시간을 준다고 해서 갚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회개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렇게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용서하는 사람의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유로울까? 그렇지는 않다. 때로는 용서하는 것 자체가 죄의 결과를 내가 모두 감당하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앞서 빚을 탕감해 준 왕은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경우도 왕이 반드시 그렇게 했어야지만 용서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 왕은 즉시 신하를 처형하지 않고 그에게 시간을 주며 갚을 수 있는만큼씩 갚으라는 식으로 그를 용서할 수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셨던 방법이 이런 방법이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지만 그 죄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를 죽게 하심으로 죄의 심각성을 알게 하셨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멸할 수 있으셨지만 모세의 중보에 따라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 14:20)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라고 하시면서 불순종한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경우도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죄의 결과를 감당하게 하심으로서 불순종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게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죽게 하신 것,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죽게 하신 것은 소심한 복수가 아니다. 복수하고 싶으셨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다. 그들의 죄에 따라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으신 것이다. 다만 다른 선한 목적에 따라 죄에 대한 결과의 일부를 그들이 감당하게 하셨을 뿐이다.

용서하는 사람이 얼마나 죄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지는 정해진 값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서 지혜롭게 결정되어야 한다. 만약 악의적으로 월급을 주지 않은 사장이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다면 직원들이 그 사장을 용서한다고 해도 그동안 지불하지 않았던 월급을 지불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회사 돈을 얼마 횡령한 직원이 회개하는 상황이면 어떨까? 원칙적으로는 횡령한 돈을 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직원이 그럴만한 돈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회사는 그 죄를 묻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수익을 내는 것으로 갚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신뢰가 생겼을 때의 얘기다.

사실 돈과 같이 정량적인 것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그나마 쉽다. 실제로는 벌어진 결과를 되돌릴 수 없는 경우들도 많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을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경우 그것을 돌릴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그렇다. 신뢰를 깬 경우도 그렇다. 회개하는 사람은 그것을 되돌릴 방법이 없고 용서하는 사람은 온전히 그 결과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요셉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라.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일은 너무나 큰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들이 회개하면서 그 결과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상쇄되지 않는다. 온전히 용서하는 요셉이 그 죄의 결과를 감당해야만 했다.

결국 회개하는 사람도 용서하는 사람도 죄의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황에 따라 회개하는 사람이 그 결과를 감당해야만 할 때도 있고 용서하는 사람이 그렇게 해야할 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안의 교만이 고개를 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죄를 인정하면 (내가 용서하면) 저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데, 난 할 수 없어. 난 하고 싶지 않아. 내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어.”

이 교만의 악한 말에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이 악을 선으로 이기려면 이 생각에 하나님이 들어가야 한다. 회개하거나 용서를 통해 회복을 추구하려면 죄의 결과를 감당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나에게 또 다른 고통과 어려움이 될 것이기에 난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제된 생각일 뿐이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이 죄의 결과를 함께 감당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회개와 용서 모두 죄의 결과를 자신이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께 회복을 추구하면 그만큼 짐을 나눠지는 것이기에 짐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생각해야 한다. 요셉은 고통의 긴 시간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알게 된 것에 대해서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형들의 죄의 결과로 요셉이 경험한 것은 분명 ‘악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조차 ‘선’으로 바꾸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피하고만 싶은 일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회복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할 때에 감당해야할 죄의 결과가 눈에 보이기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내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큰 선을 이루실지 순종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죄의 결과를 내가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 그래서 회개하고 싶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은 교만의 악이다. 겸손의 선은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분의 역사를 기대할 것을 말한다. 그렇게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장애물 3_용서의 대상을 오해한다

다음 회복의 장애물은 용서의 대상에 대한 오해다. 크게 두 경우가 있다. 하나늠 하나님을 용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도 또 하나는 나를 용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용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전 설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할 것도 없다. 나에게 악한 일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용서를 구해야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잘못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에 비해 모든 면에서 내가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하나님만큼 알지 못한다. 하나님만큼 지혜롭지도 못하다. 하나님만큼 선하지도 않고 공의롭지도 않다. 하나님은 내가 신뢰할 분이지 용서할 분은 아니다.

다음으로 자신을 용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이런 나를 저는 용서하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표현이 단순히 깊은 후회와 슬픔을 표현일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깊게 반성하고 회개하는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라면 후회나 반성과 같이 더 적절한 표현이 있으니 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때로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그렇게 높은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연민을 불러일으켜서 약간의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셔도 저는 용서 못하겠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야말로 신성모독적인 교만이다. 자신이 하나님보다도 더 높은 혹은 엄격한 용서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뒤집어서 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내가 나를 용서하면 뭔가가 달라지고 괜찮아지는 것인가? 그렇지도 않고 만약에 그렇게 된다고 하면 더 큰 문제다. 아마 영화 <밀양>의 죄수가 자신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서 이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던 것이 사실은 이런 ‘자기 용서’였을 것이다. 자기 용서는 전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다. 나의 잘못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과 내가 잘못을 범한 그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이 너무나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그로 인한 결과를 생각해 볼 때 죄책감이 밀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용서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나를 용서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염치없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고 말해서는 안된다. 애초에 나는 나를 용서할 자격이 없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일 뿐인 것이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하는 사람일 뿐이다. 자기 용서라는 자기 연민에 빠져서 정작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을 구실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용서해야 한다거나 나를 용서해야한다는 말은 모두 교만의 악한 거짓말이다. 나를 그 정도 위치까지 올려서 회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장애물 4_잊혀지지 않는다

정말 용서하기 원하고 회개하고 싶고 그래서 회복에 이르기 원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은 바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죄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가해자에게 그 기억은 계속되는 죄책감으로 이어지고 피해자에게는 마음 속에 응어리가 되어 괴롭힌다.

먼저 죄책감은 회개하는 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회개는 분명한 두 단계가 있다. 하나는 죄를 인정하는 것이고 다음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계다. 즉, 처음 죄를 인정하는 것 없이 죄에서 돌이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회개 자체는 2단계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핵심이지만, 그러기 위해서 1단계인 죄를 인정하는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돌이킬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인정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죄책감이 생기고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이 죄책감에 깊이 사로잡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죄책감이 없는 것은 큰 문제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 못지 않은 문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깨닫기를 원하시지만 죄책감에 사로잡혀있기를 원하지는 않으신다. 그것을 원하는 것은 사탄이다. 애초에 사탄은 우리가 죄를 대면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일단 그 과정이 시작되면 다음 작전이 바로 죄책감에 붙잡아 두는 것이다. 어쨌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때 또 다시 교만이 고개를 들고 말한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이건 절대 용서 받을 수 없고 용서 받아서도 안되는 죄야. 이건 회개가 문제가 아니야. 나도 양심이 있는데, 이건 용서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어.”

“전에도 똑같은 죄를 범했었는데. 회개해도 소용없네. 이건 어쩔 수 없는거야.”

죄책감에서 하는 말들은 굉장히 자기 비판적이어서 교만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여전히 그 말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는 교만의 악이다.  자신을 이것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죄를 범할 것이라는 것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는다. 내가 똑같은 죄를 또 범할 것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백하라고 하셨고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이런 말들은 분명 교만의 말이다.

여기서 마찬가지로 교만을 이길 겸손이 필요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인정이 필요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라고 물을 필요 없다. 내가 이런 짓을 했구나라고 인정하면 된다. 마치 죄를 완전히 정복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처럼 말하지 말고 그저 현실을 인정하면 된다. 내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그런 나를 언제나 용서하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이 보일 것이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일곱번씩 일흔번이 아니라 그 이상의 회개를 해도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죄책감에서 벗어나 회복을 추구할 수 있다.

다음으로 피해자는 마음 속에 응어리를 가지기 쉽다. 이 응어리는 쓴뿌리라고도 말하고 마음의 앙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하긴 했지만, 뭔가 마음 속이 개운하지 않다. 이렇게 회복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는 것다. 심지어 그런 것이 강요되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건 불공평하다! 왜 피해자인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가해자는 용서 받고 아무렇지 않게 사는지, 불공평하다.”

이런 생각을 키우면 그것이 마음 속의 응어리, 쓴뿌리가 된다. 회복의 과정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애초에 그렇게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한건데, 그 결과도 빠르게 나타나지 않으니, 부정적인 생각이 커지는 것이다.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나온다. 이 모든 회복의 과정이 피해자인 나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고 더 이상은 이 길을 따르고 싶지 않게 된다.

이 역시 교만한 생각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에게 최소한으로 합당한 대우가 이 정도는 되어야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불공평하다고 느끼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불의를 바로 잡으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공평하지 않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데, 이게 어떻게 공평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면 하나님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실 것이다. 모든 것이 놀랍게 풀어질 때, 어떤 것들은 우리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셉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완벽한 이해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셨으며 공의를 행하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이 땅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거나 혹은 좋았던 일만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것이다. 우리는 최소한 지금의 기억들은 천국에 가서도 유지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래도 괜찮을까 싶을 수도 있다.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기억들, 잊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지금도 그 때문에 마음 속에 응어리가 있고 때로는 여전히 분노와 원망의 마음이 솟아나기도 한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천국에 가면 안되는 것 아닐까?

일단 그런 걱정은 딱히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천국에서 우리는 죄가 없는 상태에서 그 기억들을 가지고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기억에 ‘악’으로 반응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오히려 그 기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잊혀지지 않아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던 그 기억들로 인해 천국에서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통해 선을 이루신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영광 돌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미래를 지금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렇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요셉은 형들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고 신뢰했기에 회복까지의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고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렇다. 지금은 불공평하게 느껴지고 내가 모든 짐을 다 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겸손히 신뢰하면서 선으로 악을 이긴다면,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회복을 추구할 수 있고, 그 회복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치고 우리가 함께 부를 찬양은 <십자가를 질 수 있나>(461장)라는 제목의 찬양이다. 결연한 마음이 절로 생기는 가사와 멜로디의 찬양이다. 이 찬양의 후렴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 찬 461장 후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었고,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우리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이 핀트가 조금은 어긋나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삶’을 요구하시는데 제자들은 ‘죽음’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정말로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죽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형제를 위해 죽는 것은 가능한데, 형제와 더불어 하나되어 살아가지는 못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십자가 직전까지도 그들 중에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논쟁하고 다퉜던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찬양의 후렴을 보자.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 찬 461장 후렴

지금이다. 지금 나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니 내가 그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겠다는 것이 우리의 결단이 되어야 한다. 이 결단이 우리가 생각하기에 어떤 큰 일을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 내 삶에서 그렇게 하겠다는 결단이 되어야 한다. 지금 교만의 악을 겸손의 선으로 이기는 것이다. 나만을 생각해서 깨진 관계를 하나님을 생각해서 회복하는 것이다. 그 힘든 과정을 내가 먼저 시작하고 내가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나의 삶을 주님께 맡긴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최후 승리를 맛보며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