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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

본문 : 빌립보서 3장 17-21절

설교자 : 이병권

빌 3:17-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저는 최근에 두 번의 장례식을 참석하면서, 참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장례식에는 가족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데, 어떤 장례식에는 가족들이 평안을 가지고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이 남긴 돈일까요? 죽은 사람이 가졌던 명예나 사회적 지위일까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헤어짐 앞에서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누구보다 이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드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명령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했던 명령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도전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한바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교만이나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건지 빌립보 성도들에게 직접 모델이 되어 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이론보다는 구체적인 본을 통해서 더 잘 배웁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바울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실제로 보여준 겁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 볼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눈여겨 보라”는 것은 본받기 위해 자세히 관찰하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에서 멀리 떨어진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을 볼 수 없습니다.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곁에는 바울을 대신할 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에바브로디도, 가까운 미래에 빌립보를 방문하는 디모데,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 바울을 본받은 자들이 있는 겁니다. 바울은 그들을 눈여겨보고 본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명령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6절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기서 “행할 것이라”는 단어는 로마 군대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군대에서 기준을 세우고 줄을 맞추어 행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학창시절에 체육시간이 되어서 운동장에 모이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이면 준비운동을 하기 위해 대형을 맞추는데, 먼저 한 사람을 기준으로 세웁니다. 선생님이 ’기준’ 그러면, 지목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기준하며 대답합니다. 그러면 기준이 된 사람을 중심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기준을 보면서 일정한 간격을 벌리고 줄을 맞추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 기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기준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기준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준을 따르는 앞 사람을 보고 따라하면 됩니다. 그러면 기준에 맞추어 설 수 있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기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따르는 것처럼 바울 뒤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은 바울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또 그 앞에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줄을 맞추어 함께 행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본받으며,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합니다. 맞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며 따라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받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우리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감이 잘 안 잡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마치 숙달된 조교의 시범을 먼저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때는 이렇게 하는 게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거야!” “힘들겠지만,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우리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보자!” “쉽지 않겠지만, 이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인 것 같아!” “주님을 사랑함으로 좀 더 용납하고, 먼저 용서하는 게 어때?” 이렇게 조언하며, 앞서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그런 역할을 자처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생명을 다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던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바울은 누구입니까? “저는 저 형제님, 저 자매님의 모습에 나타난 우리 주님을 본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여러분 앞에 서서 그리스도를 따라 가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적극적으로 여러분의 모델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눈여겨보십시오. 그래서 그분을 통해 주님을 닮은 모습을 배우고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 부족한 점이 있고, 모두 연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단점을, 문제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런 부족한 점이나 흠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열심을 내지 마시고, 성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보시고 그것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 참 감사하는 것은 우리 교회에 본이 되는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분들을 눈여겨보시고 나도 그렇게 살도록, 그분들을 따라서 행하며,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좇아 사는 사람으로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본이 되어 줄 수 있는 겁니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말의 무게와 감당해야 할 책임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왜 이런 명령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과 쾌락을 좇아 그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인기를 위해, 성공을 위해, 무가치한 썩어질 것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낭비하며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삶의 태도,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이 추구하고 목표로 삼는 것, 그 모든 것은 우리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과는 다른, 반대의 길인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심을 하나님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들 인생의 좌우명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것이 그들의 주제가입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부끄러운 게 뭔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자랑하며 삽니다.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뀐 겁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 땅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모든 관심이 이 땅에, 오로지 여기만을 생각하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살고 즐기는데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쏟아 붓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때로는 그들이 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고, 그들이 더 즐겁게 사는 것 같고, 그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크게 떠서, 다시 한 번 그들을 제대로 보십시오. 그들의 운명을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배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심하지 않고 별 생각 없이 세상에 섞여 산다면, 세상의 틀에 맞춰서 적당히 살아간다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 주님 주신 소망을 잊어버리고, 주님 주신 사명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야생오리 한 무리가 겨울을 맞아 남쪽을 향해 날아갑니다. 그중 하나가 땅을 내려다보니 오리농장이 보이는 겁니다. 그 농장에는 큰 연못이 있었고, 많은 오리들이 그곳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농장에는 먹을 것이 아주 풍족하게 있었습니다. 그 야생오리는 먹이가 많은 것을 보고 내려가서 그곳에 머무릅니다. 다른 야생오리들이 겨울을 보내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올 때까지 농장의 오리들과 함께 지내기로 한 겁니다. 이제 봄이 되었습니다. 야생오리는 자기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그들과 함께 떠나기 위해서 날아오릅니다. 그런데 그동안 농장에서 주는 먹이만을 먹느라 몸이 무거워져서 나는 것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한 계절을 더 농장에 머물다가 다음에 합류하기로 합니다. 다시 겨울이 왔습니다. 야생오리 무리가 남쪽으로 날아갈 때 야생오리는 이제 날개만 약간 퍼덕였을 뿐 계속 먹이를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봄이 되었을 때, 그 야생오리는 완전히 길들어져서 농장오리와 별 차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슬프게도 그 오리는 자기 위로 날아가는 야생오리들을 보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 마저 잊어버린 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른다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마치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산다면, 세속적인 가치에 현혹되어 이기적인 목적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렇게 이 땅에 매여 있다면, 절대로 하늘을 날아오를 수는 없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만족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추구하느라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면, 결국 후회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가슴으로, 애타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도 간절하게, 눈물로써 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바울의 눈물이 있습니까? 그 눈물이 필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바울의 이 뜨거운 눈물이 우리의 메마른 삶을 적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절박함이 담긴 이 말씀이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부수며, 우리의 그릇된 생각을 뒤집어 놓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소속이 다릅니다. 그들은 땅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하늘과 땅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한 후에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 자신의 신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로마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로마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로마시민의 모든 특권을 누렸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로마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의 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민권”을 말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나라의 신분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의 시민권이 굉장히 귀중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 때에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들이 자랑할 만한 로마 시민권 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귀중한 하늘 시민권의 가치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알고 하늘 시민답게 책임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 신분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가졌던 그 하늘 시민권이 우리에게도 허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늘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구원하는 자,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기다립니까? 구원하는 자, 우리 주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그 모든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겸손의 왕으로 오셨지만,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영광의 왕으로 그 모든 능력의 하나님으로서 오실 것입니다. 그 분에게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부터 그 완성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며 바라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분은 다시 오셔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겁니다. 완전히 회복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아픔도 슬픔도 피곤함도 죄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완전한 자유와 기쁨과 만족과 그 모든 온전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몸이, 땅 속에서 썩을 수밖에 없고,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우리의 낮은 몸이, 시공을 초월하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우리의 신분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시적이고 헛된 세상의 일들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겁니다.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그 완성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욕심에 빠져 살지 않습니다. 하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쾌락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말고 하늘나라를 기대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을 바라보며 현재 우리의 삶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겁니다. 푯대를 향해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복음의 가치를 알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겁니다. 천국의 시민답게 그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병원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입원 수속이 끝나고 병실에서 와서 환자복으로 갈아입는데, 옷이 저에게 잘 안 맞았습니다. 바지 기장은 길어서 밑단을 접어야 했고 허리는 너무 헐렁했습니다. 그리고 위의 옷은 단추 4개 중에 2개나 떨어져서 없는 겁니다. 패션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한 저이지만, 단번에 눈치 챌 수 있는 저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환자복을 제 사이즈에 맞춰서 다시 수선하고, 환자복의 멋을 살리기 위해 반짝이는 단추를 구해서 최선을 다해 하나하나 다시 답니다. 그리고 다른 환자들에게 저의 환자복을 자랑하며 그 가치를 뽐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일을 하며 삽니다. 저에게 환자복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병원이고, 환자복은 잠시 동안 병원에 있을 때만 입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니라 곧 나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옷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있으면 불편한 게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있고, 있으면 좋겠다 싶은 것도 있습니다. 욕심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내가 원하는 만큼 다 구해서 병실에 두지는 않습니다. 왜죠? 나는 곧 여기에서 나갈 거니까, 여기는 내 집이 아니니까, 잠시 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 살고 있지만,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겁니다. 우리의 진짜 인생은, 우리가 정말 바라고 기대하는 삶은 여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인생은 하늘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던 겁니다. 장차 누리게 될 그 영원한 나라를 기대하며, 그 날을 바라보며, 그 때를 기다리며 살았던 겁니다. 그러한 소망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바로 당신에게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소망이 잠시 잠깐의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게 하겠습니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현재의 상황이 어렵더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없어질 것을 위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겁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기뻐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환경에 있든지 기뻐하며 찬송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죽음 앞에서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는 것은, 우리를 세상과 다른 참 기쁨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하늘의 시민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늘 시민권이 그 모든 것을 누리게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늘 시민권의 가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그 십자가의 희생으로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 가치를 아는 자라면 절대로 십자가의 원수를 따라 살 수 없는 겁니다. 하늘나라의 찬란한 빛에 비추어보면 이 땅의 목표와 세속적인 가치와 자기중심적인 욕심은 모두 하찮은 것이 되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우리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 시민답게 품위 있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시민으로서 우리가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함께 이 땅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우리의 기준 되신 그리스도를 좇아 줄을 맞추어 걸어갑니다. 앞서가는 분들과 뒤따라가는 분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주님이 가신 길을 함께 발맞추어 나아가는 겁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 유평교회가 그 아름다운 행진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도 이 일에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