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의 백성
본문 : 베드로전서 2장 9-10절
설교자 : 조정의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왜 그리스도여야 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세 번째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하나님이 선택하신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2:4-5)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그분을 거절한 자들에게 주님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될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2:6-8).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 위에 세우심을 받은 자들은 어떤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떠한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의 첫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반전이고 앞의 내용과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은 에베소서 2:4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며 육체의 소욕에 따라 살던 불순종의 자녀였던 우리라고 말하고,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어떠한지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 구절에서(8절) 예수님은 그분을 거절한 사람에게 부딪치는 돌과 넘어지는 바위가 되셨습니다. 즉, 심판자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9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 소아시아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믿는 자들이고(7절)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산돌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자들입니다(5절).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앞에서 언급한 ‘심판을 받을 사람’과 어떤 대조를 이루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과 교회로서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말씀이 그에 대한 분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부르셨는지 구체적으로 나타나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사용한 표현들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를 때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신약성경에 와서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약의 교회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에는 특별한 모습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은 “택하신 족속”입니다. ‘족속’이라는 것은 어떤 민족을 말합니다. 이들은 같은 계보를 가지고 있고 같은 조상, 같은 유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같은 조상 아브라함이 있었고 같은 족보를 공유하고 있었으며 같은 유업(다윗의 왕좌를 통해 회복될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합니까. 교회도 같은 족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나름의 족보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우리는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라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가게 되는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부르심의 한 소망을 가지고 썩지 않는 유업을 기다리는 한 족속이 되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뭔가 열심히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셨기에 하나님의 족속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에 작고 연약한 그들이 하나님의 족속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족속이 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어떤 신을 섬기거나 예배하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실 때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출 19: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사 61:5). 다른 어떤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가 이방신을 섬기고 있을 때 그를 택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이외의 수많은 우상에 대하여 ‘죽은 신’, ‘말 못하는 신’, ‘살아있지 않고 거짓된 신’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도 우상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나는 종교가 없다’하더라도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었고 오늘날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신이 참 왕이시기에 “왕 같은” 제사장이고, 우리가 결국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 할 것이기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계 1:6). 썩어질 수많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참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씀이 교회의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상황은 교황과 성직자가 없으면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없다고 말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여 성직자나 교황 없이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교회 안에 직분이 필요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다만 교회 전체가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을 제사장으로 삼으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론과 레위 지파를 통해 제사장 직분을 맡기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지만 그 교회 안에 감독과 교사, 여러 일꾼들을 세우시고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나라’의 특징은, 같은 법이 존재하고 문화와 관습이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나라로 부르실 때 그들에게 법을 주셨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 주신 법이 율법입니다. “거룩한”의 의미는 ‘특별히 구별된’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 수많은 백성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특별히 따로 떼어서 구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을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교회는 당연히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가치관이 적용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며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땅을 내 소유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내 집이라고 말하면 내 것이 될까요. 무엇을 내 소유로 하려면 돈을 주고 사야합니다. 그래서 “소유된”이라는 말씀은 값을 주고 샀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고 그 백성들을 자신의 것으로 사신 것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말 3:1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교회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내 시간, 내 인생, 내가 누리고 싶은 것, 내 욕심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의 기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고, 다른 신이 아니라 참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나라이고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소유된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8절에 있는 자들과 비교해보겠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족속이고 어둠의 족속이며 멸망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그들은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사단과 자신의 욕심을 섬기는 자들입니다(엡 2).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자들도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도 아닙니다. 이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9절의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이어받을 자입니다. 우리가 8절에서 9절로 넘어오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을 담대히 지나 하나님께 직접 예배 드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씻김을 받고 그 피로 사신 바 되어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멸망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반드시 그리스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러한 모습으로 부르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우리를 이렇게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신 이유는, “선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한 번 기록되었는데 ‘밖으로’와 ‘알리다’의 합성어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 놀라운 사실을 밖으로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놀라운 것들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랑할 내용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구원의 경험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우리를 어둠 가운데 있었는데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기억하게 합니다. 칠흙 같은 어둠, 죽음과 같은 세상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존재 상태의 세상에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또한 어둠과 빛을 이야기할 때, 날 때부터 소경인 장님을 눈뜨게 하시던 주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죽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고,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참 진리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 것이 빛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정치적인 의견을 피력하거나 환경을 지키기 위해,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절). 아마도 소아시아 성도들이 이방인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모든 사람들은 8절에서 말하는 영원한 멸망으로 가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초 되시는 분, 하나님이 선택하신 분, 그분 위에 우리가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면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천주교는 재림이 없다고 말하고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복음을 미워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메시지가 얼마나 가치가 있고 중요한 말씀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복음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예수님 스스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말씀을 4글자로 하면 ‘예수영생, 불신진노’입니다. 너무 과한 메시지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간단하고 명료한 메시지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복음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