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하나님 나라의 반전
본문 : 누가복음 6장 20~26절
설교자 : 이병권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저는 오늘 “하나님 나라의 반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입니다. 1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고, 평지에서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평지수훈’ 또는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누가가 기록한 이 평지설교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가 예수님의 설교를 그대로 다 적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누가가 기록한 20절에서 49절까지의 내용이 말씀의 전부라면, 예수님의 설교는 시작하신지 5분도 안되어서 끝났을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주일마다 나눠드리는 ‘YP메시지’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YP메시지는 수요일에 전해지는 설교와 홈페이지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한 내용이 편집자에 의해서 정리되어 기록됩니다. 가끔 제 설교가 요약된 것을 보면 간결하고 더 좋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누가는 자신의 글을 읽게 될 이방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설교를 요약, 정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가 이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설교가 기록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누가복음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에 배경이 되는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하신 장면을 살펴봤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이 6장 13절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위임받은 대리자’라고 할 수 있는데, 특별한 임무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자신을 보낸 자의 권위를 가집니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님을 사도라고 말합니다(히 3:1). 예수님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무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가복음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그 임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장 43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하나님의 사도로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 그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사도를 택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기시며 보내십니다. 이 일은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심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인 예수님이 하시는 설교의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 포도주와 새 부대로 말씀하신 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시대에 부르심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그들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설교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서론은 아주 분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20절에서 23절까지 나오는 네 가지 복과 24절에서 26절까지 나오는 네 가지 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4절이 “그러나”로 시작하는 것처럼, 이 두 종류의 네 가지가 서로 짝을 이루며 맞물려서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의 특징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어떤 자가 복이 있는지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반대로 복 있는 자와는 정반대의 상황에 있는 자에게 화가 있음 선포하는 순서로 말씀하십니다. 마치 구약의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은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1차적인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대조되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깨닫게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가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는 가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쓸모없다며 거절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반전입니다. 그럼 이 반전의 특징이 어떠한지 복과 화로 짝지어진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가난한 자(20절)와 부요한 자(24절)의 반전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대상은 가난한 자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반전입니다.
그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복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너희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금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을 찬양하며, 사람들에게 가난할 것을 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실제로 경제적인 가난을 말하는 것이지만, ‘가난’ 그 자체가 복이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돈과 재정적 안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후에 부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하셨습니다. 경제적 풍요함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 자체를 나쁘다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재물은 사람들을 자기만족에 빠지게 만들고, 재물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대조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단순히 재산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째 반전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가난한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반전 둘째로 주린 자(21절)와 배부른 자(25절)의 반전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지금 배고픔을 경험할 것이고, 부요한 자는 지금 배부름을 경험할 것입니다. 주린 자가 겪게 되는 상황은 “지금”이라는 말로 강조됩니다. 지금은 주리고 있지만, 지금은 배고픈 상황이지만, 지금은 힘이 들지만, 머지않아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상황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반전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배부른 자들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맛보며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배부른 자들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배부른 자들은 주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배부른 자들이 갖고 있는 것들을 다시는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배부른 자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풍족하게 갖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는 그들에게 없습니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주린 자입니까? 지금 배부른 자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어떠합니까? 이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 만족스러운 환경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쉬지 않고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이 있고, 우리 밖에는 계속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어려움들이 있고,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놀라운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둘째 반전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자신에게 없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을 의지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만족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반전 셋째로 우는 자(21절)와 웃는 자(25절)의 반전입니다. 두 번째 반전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또 다시 지금 부족한 것과 그것이 미래에 어떻게 반전되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는 길은 지금 세상에서 명성과 인기와 부를 얻는 길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슬픔과 눈물과 고난의 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위로가 되시기에 그들은 웃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웃는 것을 반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웃음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화를 선포하신 지금 웃는 자는 안락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무관심한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지금 웃는 자는 하나님과 영원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듣고 맙니다. ‘아! 그런가’ 하고 반응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지금 웃을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즐거운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놓치기 싫은 것들이, 지금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해왔던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드는 겁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그리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늦습니다. 지금 웃는 자에게 다시 웃을 날은 없습니다. 영원히.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지금 잠깐 울고 영원히 웃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잠깐 웃고 영원히 울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셋째 반전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받아주시며, 너희가 영원히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반전 넷째로 거절당하는 자(22)와 칭찬 받는 자(26)의 반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핍박을 만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당하게 될 핍박에 대해서 복을 선포하십니다. 특별히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모습을 네 개의 동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미워하며,’ 제자들을 ‘멀리하고’, 제자들을 ‘욕하고’, 제자들의 이름을 악하다하여 ‘버릴 것’입니다. 제자들이 왜 이런 일을 당할까요? 그 이유는 “인자로 말미암아”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명령하십니다. 23절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제자들은 자신이 복된 자임을 알고, 그 복을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뻐하고 뛰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럼 언제 그렇게 기뻐해야 될까요? “그 날에” 그럼 그 날이 언제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그 날’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장차 임하게 될 심판의 날이 아닙니다. 문맥을 보면 ‘그 날’은 바로 앞에 나오는 핍박을 받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21절의 ‘지금’이라는 시점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 핍박을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핍박을 받는 그 때에, 어려움을 겪는 ‘그 날’에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뻐하십시오. “기뻐하고 뛰놀라” 깡충깡충 뛰면서 온 맘으로 적극적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기뻐하라는 명령 다음에 기뻐할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따라옵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아시고 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이 약속은 제자들이 현실의 상황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지금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어서 기뻐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선지자들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자들이 핍박을 받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이 강력한 도전과 극심한 핍박과 거절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핍박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앞서갔던 복된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처럼 불의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산다면 하늘에서 큰 보상이 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마냥 계속 웃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직장 상사가 핍박할 때, 그 얼굴을 쳐다보며 계속 웃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은 영원한 것이기에 우리가 당하는 잠깐의 어려움이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예수님이 겪으시는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립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복이라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 일시적인 만족이 아닙니다.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복입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 한다면, 각 사람의 입맛대로 기준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예는 구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면 왕은 물론 일반 백성에게까지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거짓으로 예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의 칭찬과 모든 사람의 칭찬, 무엇이 더 중한 것입니까? 칭찬을 얻기 위한 거짓된 행동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좇는 자는 결국 그 끝에서 비참한 결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전달해야 합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내용을 바꾸려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떠났지만, 사람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늘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반전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가지고 있는 소중한 보물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진짜 보물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진정한 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 진짜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 복을 찾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 복을 가졌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하나님 앞에 설 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반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은 잠시 잠깐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그 복을 미리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복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확정적으로 주어졌기에 지금 우리를 복되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 말씀의 두 그룹 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복이 있도다!” 하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화가 있도다!” 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점검해 보기를 바랍니다.
아직 반대편에 있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관대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겸손히 나아오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받아주십니다.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복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정한 복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복 되도다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당하는 핍박과 어려움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부와 쾌락, 사람들의 인기와 명예가 가치 없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 때 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 복을 기억하며 하늘을 바라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들은 우리가 복된 자라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복된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