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Part II
본문: 베드로전서 4:4-6

설교자: 조정의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지난 번에 이어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갑옷을 삼는 것은 전쟁을 위해 무장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단단하게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춰야 할 정신, 곧 우리의 갑옷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싸우기 위해 육체가 받을 수 있는 최절정의 고난인 죽음을 감수 하시면서까지 승리를 쟁취하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 4:1-3).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 시편 22편 설교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과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거기에 가장 충격적인 아픔인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이라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시 22). 그분의 육체적인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잠깐의 고통, 치료를 위한 고통일 때가 많지만, 주님의 고통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었습니다.

또한 그분이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은 ‘사람들의 조롱과 핍박’이었습니다. 그분은 찬양, 영광, 감사만을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모든 생물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 피조물이 예수님을 조롱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완전한 관계였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십자가에서 끊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죄와 싸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감수하셨던 고통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신 그 아름답고 고귀한 승리는 우리로 거룩하게 살게 하는 동력이 됨과 동시에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우리가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우리가 무장해야 할 마음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지난 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하는 그 첫 번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충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저질렀던 죄들로 충분합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 한 마디로 우리 몸이 원하는 대로, 욕망에 따라 무절제하게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구원 받기 전에 했던 것으로 이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과거의 죄들을 사랑해서 다시 그것을 찾는다면 베드로가 쓴 두 번째 편지에서 표현한 대로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과 같은 것입니다(벧후 2:22).

오늘은 우리는 왜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왜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이 필요한지 그 이유들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유 2: 심판이 예비되어 있다(4~5절)

그 이유는 죄에 대한 심판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싸우기 힘든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죄와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와서 ‘나는 지금 교만과 싸우는데 그것이 참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죄와 싸우면서 괴로워하면서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이 넘쳐난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 쉽고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내면의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의 본질아 내 안에 있는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문제가 있다, 사회가 문제다, 직장상사와 직장 구조가, 나의 부모가, 나의 아내 또는 남편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피해자이고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문제의 본질을 밖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국가에 문제 있다는 것,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것, 남편 또는 아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을 이루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제의 본질을 교만, 이기심, 죄의 욕구에서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의아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 사람들에 대해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그들의 삶이 만들어내는 “방탕”은 ‘쾌락을 좇아 통제되지 않는 제멋대로의 탐닉’하는 것을 말합니다(그루뎀, 259). 탕자의 허랑방탕한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눅 15:13).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방탕함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질주에 함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거대한 무리가 홍수처럼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함께 달리지 않고 있으니 이상해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달린다”는 표현을 보면 세상이 방탕함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무섭게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거슬러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이성교제를 좋아하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자아실현, 자기만족, 행복입니다. 내가 만족하고 기쁘다면 양심의 가책을 가져와도 조금은 부조리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들 사는 것처럼 나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삽니다. 기쁨을 가져다줘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그 기쁨과 만족과 유익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대학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소리가, “너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였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은 재미없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대단한 유익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합니다. 손가락질 하면서 인생을 낭비한다고 생각합니다. 멍청하고 미련하게 산다는 비웃음이 있습니다. 그런 비방을 듣게 되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저의 아내는 실업급여를 신청하여 일정한 금액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서류를 조금 수정해야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 없는 사실을 있다고 조금만 수정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부부를 멍청하다, 미련하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거짓말을 하면 세금을 덜 낼 수 있고, 신호만 살짝 어기면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틀을 깨면,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때론 그러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4:5). 우리가 볼 때는 유익을 누리고 쾌락을 즐기는 것 같은 죄들이 결국은 그 대가를 지불할 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이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심판 날짜가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범한 죄들, 타협하고 누렸던 죄들, 쾌락에 대해 하나님 앞에 다 고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이 전부라면 살다가 죽어 끝이라면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삶은 유익하지 않은 삶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심판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로 인해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있다 여겨 힘이 빠질 때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고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재판관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이분은 바로 죄와 싸워 승리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심판의 권한이 아들에게 주어졌습니다(요 5:27). 그러니 여러분 죄인들의 삶을 동경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죄와 치열하게 싸우다가도 여러분의 싸움을 멈추게 하고 힘 빠지게 하는 세상 사람들의 방탕함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현재는 더 많이 즐기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들이 더 많은 유익을 얻으며 사는 것처럼, 더 높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예비된 것은 그 모든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이유 3: 결코 헛되지 않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6). 이 말은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우리에게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욕망과 싸우는 삶에 주어지는 보상이 있기에 우리는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당시 소아시아 성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타락한 로마의 부패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싸우며 거룩함을 추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입니다. 많은 비방을 들으면서도 열심히 구원에 이르는 그 길을 묵묵히 걸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각한 핍박을 받아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전해지고 나서 더욱 심각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성도들을 보면 남아있는 자들에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특히 이 세상에 눈을 두면서 그것을 바라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죽음 그 이후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이 연약하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중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그분들의 삶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의미가 없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들의 삶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대단하게 잘 되어 살다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께 헌신된 사람은 가난하게 핍박가운데 살다 갔습니다. 이 땅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불쌍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하늘의 보상을 잊어버리고 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에 매력이 사라집니다. 차라리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마음껏 즐기며 충분히 누리며 살다 죽은 사람의 인생이 더 멋지지 않습니까?

여기 등장하는 “죽은 자들”은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들, 그리고 그 복음에 따라 죄와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는 육체로는 죽음이라는 심판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는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쉬운성경: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사로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있는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육체적 죽음을 지나 영원한 생명,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모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른 것이며,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은 것”(1:9)입니다.

제가 어릴 때 들은 이야기인데 유평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마을에 홍수가 났는데 지대가 낮아 집집마다 물이 찼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물에 젖으면 안 되는 귀중한 물건을 머리 위로 들고 나오는데 어떤 분은 산 지 얼마 안 된 캠코더를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집에 어떤 자매님이 성경책을 들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을 보고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책을 가장 귀중하다 생각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내일이라도 당장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위엣 것이 최우선에 있다면 죄와 치열하게 사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싸우지 않는 이유는 이 세상에 눈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나이 들면 주께 헌신할 것이다, 매일 말씀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진로 때문에 결혼 때문에 일 때문에 학교 때문에 자식 때문에 지금은 아니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본다면, 그분이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당하심으로 현재 어떤 영광을 누리고 계신지 묵상해본다면 이 땅에서 방탕하게 삶을 허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영광의 면류관을 푯대로 삼고 거꾸로 흐르는 매서운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며 충성스럽게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를 흘리기 까지 싸우게 될 것입니다(히 12:4).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를 벌이며 살았고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거기까지만 알고 나사로처럼 살라고 한다면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그렇게 비참하게 살 이유가 무엇이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뒷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부자는 영원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나사로는 하나님 품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죄와 치열하게 싸워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보상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하늘에 간직한 구원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칭찬, 영광, 존귀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죄와 치열하게 싸울 수 있지 않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설교가 행위를 강조하는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행위, 죄와 치열하게 싸우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 구원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 방관합니다. ‘나에게 천국행 티켓이 있으니 어떻게 살든 상관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참 두렵습니다. 구원은 내 마음대로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양자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아버지를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더욱 방탕함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그랬다면 지금은 더욱 가까이 돌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같이 우리도 거룩하게 하기 위해 구원하셨습니다.

저의 다음 질문에 한 번 진지하게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셨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싸워 승리하는 본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셨나요? 성령 하나님이 우리가 죄와 싸울 때 충분한 힘을 주지 못하시는 분인가요?(요 16:8) 우리가 유혹받고 있는 좋아하는 세상의 쾌락들이 영원한 만족을 줍니까? 하늘의 보상이 보잘 것 없습니까? 계시록의 표현을 보십시오. 정금같이 맑은 길과 보석처럼 빛나는 집에서 우리 영혼을 영원히 만족시킬 아름답고 영화로운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영원히 만족시킬 나라입니다.

이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생각해보십시오. 왜 우리는 마땅히 살아야 할 길, 죄와의 싸움을 더 열심히 싸우지 않습니까? 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노력할 때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암 환자로서 가장 격려와 힘이 되는 것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가 죄와 싸우는 삶을 열심히 살아간다면 서로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죄와 싸움에서 지고 낙담한다면 성도에게 짐이 될 것입니다. 교회로서 하나가 되고 사랑하려면, 서로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려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죄와의 싸움을 싸워 이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