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동역자들
본문 : 사도행전 18장
설교자 : 조정의
‘동역자’(fellow worker)는 헬라어 합성어로 ‘함께 일하는 사람’(συνεργός)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같은 목적을 위해 협력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을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 불렀고(롬 16:3; 빌 4:3), 특별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란 말을 했다(고전 3:9).
‘동역자’란 말을 듣는 건 참 멋지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내가 그 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란 뜻이고,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내가 실제로 도움이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사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모양은 각각 달라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협력하고 있다. 본문에 등장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살펴볼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동역자들인 우리가 각각 어떻게 협력하여 일할 것인지 알려주시고 능력을 더하시길 간구한다.
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고(1절), 그곳에서 본도 출신 유대인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만났다. 두 사람은 유대인 추방령에 따라 로마에서 나와 고린도로 새로 왔다(2절).
아마도 두 사람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구원받은 이들이 로마로 돌아와 복음을 전한 결실로 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믿음과 생업을 가진 바울을 반가워했고 그를 도와 천막(가죽)을 만들어 팔고(일 거리), 머물 곳을 제공했다(숙소, 3절).
바울은 관례대로 안식일마다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전도했는데(4절),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면 경제활동을 할 필요가 있었다(고전 9:12).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바로 그 필요를 채워준 것이다. 두 부부는 바울이 회당에서 쫓겨나 이방인 집으로 옮길 때도 함께 했을 것이고(7절), 고린도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고 에베소로 이동할 때도 바울과 함께했다(18절).
바울이 에베소에 잠시 머문 뒤 파송 교회로 돌아갔을 때(22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났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인데, 성경에도 능통하고 언변도 뛰어났다(24절). 그는 주의 도를 배운 자로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고 가르쳤다(25절). 하지만 아볼로의 지식은 불충분했다.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고 성령의 세례는 알지 못했다. 바로 그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다(26절).
아볼로는 이후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로 건너가려 했는데, 그때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고린도 교회에 영접을 권하는 편지를 써주었다(27절). 그 결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많은 유익을 끼쳤고, 특히 믿지 않는 유대인과 논쟁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담대한 사역을 이어나갔다(28절).
바울이 고린도교회 편지할 때,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 말한 것을 보면(고전 3:6), 아볼로는 고린도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일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로마서와 디모데후서를 보면 후에 이 부부는 로마에 잠시 머물며 교회를 돕다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청년 디모데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롬 16:3-5; 딤후 4:19).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의 본이 있다면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일 것이다. 교회엔 실제로 이 부부와 같은 동역자 부부가 많이 필요하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어느 교회 있든지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부부. 일꾼이나 성도의 필요를 보고 적극적으로 돕는 부부. 복음 사역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항상 신실하게 참여하는 부부. 영적으로 배움이나 세움이 필요한 성도가 있으면 조용히 데려다가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부.
‘마음 맞는 신실한 가정 열 가정이면 교회는 문제없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이런 동역자 찾기가 어렵다. 모든 세워진(질) 가정이 하나님의 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교회가 더욱 믿음 가운데 굳건해지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믿는 자를 더하시기를 원한다.
2. 실라와 디모데 그리고 디도 유스도
실라와 디모데 개인보다 그들이 가져온 무언가를 다루려 한다. 실라와 디모데는 5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왔다(5절). 그들이 돌아온 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5절).
여기서 ‘말씀에 붙잡혀’라는 표현은 바울이 천막 사업을 멈추고 오로지 말씀 사역에 전념했다는 걸 의미하는데, 이는 실라와 디모데가 가져온 무언가 때문이었다. 그들은 각각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에서 무언가를 받아 전달했다. 각각의 교회에 쓴 편지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6-8)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 4:15-16)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 안에 굳은 믿음을 가지고 든든히 서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고, 빌립보 교회의 후원도 전해줬다. 바울은 그로 인해 마음의 짐을 덜고(‘이제는 살리라’), 일을 잠시 멈추고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비슷한 동역을 한 사람으로 디도 유스도가 나온다. 그는 바울의 회당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이방인 신자다(“하나님을 경외하는”, 7절). 바울이 회당 사역에 전념하자 유대인의 비방과 대적이 일어났는데, 옷을 털며 예수님 거절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 바울은 그들을 떠나 이제 이방인에게 가겠다고 선언했다(6절). 그때 디도 유스도가 바울에게 새로운 전도 장소로 회당 옆에 있는 자기 집을 내주었다(7절). 바로 그 집을 거점으로 일 년 육 개월이라는 장기간의 고린도 사역이 이뤄질 수 있었다.
유스도의 집은 최적의 장소였다. 주님이 환상 중에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고린도엔 주님이 구원하실 백성이 많았고(10절), 회당 옆에서 모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심이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바울을 찾아오기 쉬웠을 것이다. 수많은 고린도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고, 심지어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와 온 식구가 회심했다(8절). 고린도에서 회심한 사람: 뵈뵈(롬 16:1, “일꾼”), 구아도(16:23), 글로에(고전 1:11), 가이오(고전 1:14,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스데바나와 그의 집(고전 16:15,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브드나도, 아가이고(고전 16:17, “부족한 것을 채웠음”) 등 많은 동역자 양성.
여기서 우린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당신은 믿음에 굳게 서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신자가 바울처럼 오로지 복음 전하는 삶으로 부름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믿음 가운데 거하며 주를 증거하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예수님 안에 확실히 믿음을 둔 사람이 그 예수님을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의사의 치료 받은 자, 병든 자에게 소개 가능.
또한 지체의 건강은 나머지 지체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다(몸의 원리). 데살로니가 교회가 굳게 선 믿음을 가졌을 때 바울의 전도에 힘이 실린 것처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 교회 전체의 사역에 힘이 된다.
둘째, 나눔은 아름다운 동역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참 많지만, 복음 사역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것은 하늘에 재물을 쌓는 일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준 물질에 대해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라고 말했다(빌 4:18). 유스도가 자기 집을 주를 위해 일 년 반을 내준 것처럼, 주를 위해 당신은 가진 것 중 무엇을 드리겠는가?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해 무얼 드리겠는가?
3.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하면 마치 분업처럼 하나님이 하실 일이 따로 있고,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것 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이 맞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다. 고린도에서 전한 바울의 말과 전도는 그의 설득력 있는 지혜로운 말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의지한 것이다(고전 2:4-5).
바울은 실제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전 2:3). 그런데 누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셨나? 누가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라 약속하셨나? 주께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사역할 때쯤,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고 법정에 세웠다(12절). 그때 갈리오란 총독이 짧게 고린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가 법정에서 ‘이건 어디까지나 유대인 종교 내부 문제이지 로마법으로 징벌할만한 부정하고 불량한 일이 하나 없다’라고 판결 내렸다(14-15절).
그동안 바울이 선 법정의 판결은 그 도시에서만 효력을 갖는 판결이었지만(읍장), 고린도는 달랐다(총독). 로마 여러 도시에서 같은 효력을 갖는 판례(선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법정에서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이지 징벌할 이단이 아니라고 판결하는 바람에, 향후 10-12년간 바울은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물론, 유대인의 비방, 대적, 폭력이 일어났기는 했어도).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바울을 지키신 것이다.
바울은 자신과 교회를 지켜주시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일에 신실하게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의미로 겐그레아에서 서원의 제사를 드렸다(18절). 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그리고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 가서 안부를 물을 때(22절),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일하신 것을 기쁨으로 보고했을 것이다(참고. 행 15:12).
신실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사는 것이 힘든 이유는 참 많이 있다. 우리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위해서만 살려 하기 때문에,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눈을 떠서 당신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분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다(마 28: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