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탄식에서 승리로

본문: 시편 6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6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꼭 알아야 하는 미래의 질병 10가지’라는 책을 보면, 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20년이 되면 모든 연령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질병이 ‘우울증’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질병으로 ‘마음의 감기’라고도 합니다. 평균적으로 20대 후반에 많이 나타나고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 많다고 하며 50세가 넘으면 그 비율이 비슷해진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보통 그것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남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우울증의 증상은 슬프다고 느끼고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무기력, 죄책감, 자책, 식욕과 흥미의 감소, 불면 등입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최종적으로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슬픔, 무기력, 자책 등의 우울증의 증상들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에는 그런 내용을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6편도 그런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시편 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할 때 기록한 시라고 보기도 하고(시3),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회개하며 쓴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시51). 또 어떤 학자는 사울을 피해서 도망할 때 기록한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이 시를 아무리 읽어봐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 자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서 다윗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상황
다윗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 그는 하나님이 분노와 진노로 자신을 책망하고 징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는 것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시 94: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악인을 벌하시는 것과 같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다윗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윗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2), “나의 뼈가 떨리오니”(2),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3). “수척하였다”(2)는 것은 물이 없어서 말라가는 식물처럼 죽어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4). 다윗은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뼈가 떨린다”(2)에서 뼈는 단순히 신체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시 35:9-10),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뼈는 단단하고 몸 중에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뼈가 떨린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강하고 단단한 부분조차도 두려워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두렵고 놀라서 평정심을 잃어버린 상태가 “떨린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어려움과 육적인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이어 “내 영혼도 매우 떨린다”(3)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며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가뭄 중에 꽃처럼, 뿌리 뽑힌 풀처럼 고통스럽게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 다윗이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멀리 떠나 계신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이대로 그냥 죽어버린다면 다시는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5). 그는 계속되는 탄식에 피곤해하고 있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6). 이런 어려움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 힘들어 쉬고 싶은데 너무 슬퍼서 잠도 이루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윗의 어려움은 이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다윗의 대적들이 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 다윗의 대적은 이 상황을 보며 그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욥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정죄했던 것과 같습니다. 다윗의 대적은 그를 죄인으로 정죄하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대체 어디 계시냐고 했을지 모릅니다.

학자들은 다윗의 고통이 육적인 것인지, 영적인 것인지로 논쟁하고, 그것이 다윗의 죄로 인한 것인지, 억울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로 다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 스스로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난받는 이유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와 같은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가지고 있어 그 일의 전말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도 하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이 깨달은 것은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이것이 어떤 목적으로 인한 어려움인지, 이것이 나의 죄 때문은 아닌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도 알지 못합니다. 계속되는 어려움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하는데 대적은 조롱을 하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기도하기도 힘들고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며, 어쩌면 나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저 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극도로 낙심하여 침체에 빠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교회에 가는 것도, 성경을 읽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신령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이 수치스러워집니다.

어떤 분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앞으로 이런 경험을 하실지 모릅니다. 이런 영적인 침체는 유명한 마틴 루터나 칼빈도 경험한 것이고, 저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도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선지자 엘리야가 그러했고, 다윗과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에서 심히 고민하셨습니다.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죄를 범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이나 불신이 일어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절을 다시 읽으며 그 해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1-4).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5차례나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둠의 수렁에서 하나님을 절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참 뻔한 답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하나님보다는 주변의 가까운 친구를 찾아갑니다. 나를 위로해주고 내 어려움을 공감해줄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 상황에서 도피하거나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잠을 자거나 여행을 가거나, 어떤 사람은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극심한 무기력을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진단하여 약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들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환경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명령은 시대나 문화, 성별, 나이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먼저 찾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1-3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2). 다윗은 이 고통을 멈춰달라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라고 말하거나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말했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왜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이것은 은혜를 입은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

“(왜냐하면)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 5절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위대한 일들을 잊지 않고 하나하나 나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다윗은 이 땅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도 죽음을 앞두고 생명을 연장해주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이 땅에서는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며 후대에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은 사람처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믿는 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서 그분을 경험하고 예배하기 위한 간구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간구를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6-7절). 하나님 앞에서 강한 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영육 간에 쇠약하다고 말하고 있고, 탄식하며 피곤하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근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습니다. 자신의 상황, 감정, 생각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쏟아내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정직하게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확신
8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좀 갑작스럽습니다. 이전까지 고통 속에 탄식하던 그가 돌연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어떤 성경학자는 다윗이 7절까지 써놓고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는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이후에 나머지를 기록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다윗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큰 확신 가운데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8-9).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 여기 2번 등장하는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도 수치와 치욕을 죽기보다 부끄럽게 여겼는데, 다윗 시대의 고대 근동의 문화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공적으로 어떤 수치를 당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고 있을 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에게 공의로운 심판(부끄러움)이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다윗’이 심히 떨었다면 이제 10절에서는 ‘그의 대적들’이 떨게 됩니다. 또한 3절에서 이 고통이 ‘어느 때까지 계속되겠냐’고 물었는데, 이제 10절에서는 ‘갑자기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돌아오소서’라고 했던 단어가 동일하게 10절에서 ‘물러가리로다’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시면 의인은 의인 대접을 받을 것이고,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미래형의 말들입니다. 상황이 아직 해결된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어려움을 당합니다. 짙은 어두움에 사로잡혀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영적인 침체, 낙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걱정, 고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전쟁에서 일시적인 패배자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오늘 시편 6편을 기록한 다윗은 시편 23편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시편 23편 4-6절을 시편 6편의 구절들과 비교해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23:4-6).

이것은 참 많이 다른 내용이지만 같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놀라운 영적인 승리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광야에서 죽기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그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영광 돌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탄식이 아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