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 복음, 거짓 복음
본문 : 사도행전 15장
설교자 : 조정의
참 복음의 지표를 보통 다섯 개의 ‘솔라’로 설명한다.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솔라 크리스투스(오직 그리스도), 솔라 그라티아(오직 은혜), 솔라 피데(오직 믿음), 솔라 데오 글로리아(오직 하나님께 영광). 구원은 오직 성경의 말씀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이것이 참 복음이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땅끝을 향해 본격적으로 뻗어 나갈 때, 유대인을 중심으로 이방인에게 편만하게 전파될 때, 참 복음은 큰 위험에 빠졌다. 특별히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지표가 흔들렸다. 이는 필시 복음 전체를 무너뜨릴 심각한 문제였다.
어쩌면 당신은 기독교가 이 문제를 완전히 극복했으니 이제는 더는 문제 되지 않는다고 자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13억 3천만 신도를 보유한 가톨릭교회 입장은 이렇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의롭게 되는 믿음이 단지 그리스도로 인해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트리엔트 회의, 1545-63). 개신교 안에서도 ‘당신의 구원은 가짜’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있다. 무슨 근거로? 게임을 많이 하니까. 말씀을 지루해하니까. 의도는 순수할지 모르나 이런 식으로 위협하는 복음은 결국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 아닌 뭔가가 구원에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그 반대의 문제도 있다. 은혜를 싸구려 취급하는 복음이다. 대표적으로 일부 구원파 복음이 그렇다. 단번에 은혜로 죄 사함 받았다는 것만 거듭 강조하다 보니 구원에 합당한 열매에 관심이 턱없이 부족하다. 쉽사리 은혜를 값싸게 여기고 방종한 삶의 핑계로 삼는다. ‘천국이 공짜’라고 말하는 복음은 어떤가? 의도는 알겠지만, 그리스도의 핏값도 0원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기 삶의 작은 오점에도 구원을 의심한다. 반대로 불신자처럼 살면서 구원을 장담하기도 한다. 목자의 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구원받았을까?’ 노심초사하는 성도는 오히려 안전해 보이고, 자기 구원을 장담하는 성도는 대개 위태로워 보인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오직 은혜, 믿음을 강조하며 다른 복음을 전한 이들을 저주했던 사도 바울,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며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경고했던 야고보. 마틴 루터는 바울 손을 들어주며 야고보서를 멀리하기도 했지만, 본문에서 바울과 야고보는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결론에 기쁨으로 합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의 지표를 분명히 배울 수 있다. 이것은 루터의 말처럼 교회를 서게 하는 중요한 진리이다. 또한 이것은 구원을 자주 의심하거나 반대로 가볍게 여기는 당신의 삶을 바르게 세워줄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전할 복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교훈할 것이다.
1. 반론: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 이들은 복음을 망치려는 거짓 교사,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친 신자였다(갈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는 야고보가 리더로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같은 주장을 하는 바리새파 믿는 신자 다수를 만났다(믿는 사람들, 5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1절).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절).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가 뭘까?
앞서 말한 것처럼 은혜를 선물이 아니라 권리로 여기면 즉시 방종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유대인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할례를 받았다(창 17장; 수 5장; 신 28장; 삼하 7장). 유대인은 할례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 율법을 온전히 따를 것을 맹세했는데, 이런 기본적인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복음은 너무나 싸구려처럼 허접해 보였다.
유대인이 복종했던 율법으로 볼 때 이방인은 야만인이다. 우상숭배, 음란, 피째 먹는 음식, 근친결혼, 심지어 동성애까지. 그들을 모욕하는 말이 ‘이 할례받지 못한 자”(삼상 14:6), “(율)법 없는 자”(애 2:9)다. 그들이 신자가 되려면 최소한 기본은 지켜야 한다. 신자 구실은 하게 해줘야 참 복음 아닌가?
실제로 이방인에게 믿음의 도리에 합당한 행위를 강조할 필요성이 다분했던 것 같다. 예루살렘 회의 전에 야고보가 쓴 편지인 야고보서는 계속해서 참된 믿음이 뭔지, 은혜를 아는 자의 마땅한 삶이 무엇인지 무섭게 가르친다. 은혜를 값싸게 여기고 믿음의 열매를 맺지 않는 방탕한 이들이 있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 동의하는가? 그런데, 일주일 내내 성경 한 자 보지 않는 사람 구원엔 문제가 없는가? 한 달에 한두 번 술 마시는 신자는 어떤가? 스마트폰 중독, 게임 중독에 빠진 청년은? 자기 꿈과 커리어를 위해 절제하며 열심히 사는데 모든 계획과 비전 속에 하나님 자리가 없는 사람은 어떤가? 입만 열면 성도 험담, 이웃 비난하는 사람은?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는 신자는?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 교회 현장에 나온 적이 없고 온라인 예배도 계속 빠지거나 항상 대충하는 사람은?
질문을 계속할수록 압박된다. 구원 얻으려면 은혜와 믿음 외에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까진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구원받았다고 하면 기본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는 되야 한다는 생각. 그게 철저한 율법 준수가 몸에 밴 바리새파 성도가 요구한 기본이다. 기본 할례 + 율법을 좀 지키면 더 좋고, 그래야 유대교에 뿌리를 둔 새 종교 기독교에 참 신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도들에게도 그랬다. 적지 않은 다툼, 많은 변론(2절, ‘폭동’, ‘반란’, 7절) 후에야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2. 결론: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
발언을 한 사람은 베드로,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야고보인데, 기록된 발언은 베드로와 야고보뿐이다. 이 두 사람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할례자가 오니까 자리를 피해 여러 유대인 성도와 바나바까지 외식하게 한 장본인이었고(갈 2:11-14), 야고보는 루터가 멀리할 정도로 행함을 엄청나게 강조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둘 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중에 회의를 마친 후 그 결과를 공문으로 사절단(유다, 실라)과 함께 보내는데, 그 공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성령과 우리는…옳은 줄 알았노니”(28절). 독자적인 결론이 아니라 성령님으로 인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복음이 옳다는 걸 알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베드로는 10여 년 전 첫 이방인 고넬료가 할례가 아니라 은혜의 복음을 받았을 때 성령께서 방언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확증하심을 본 증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증언대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1절).
야고보는 성령이 선지자를 통해 기록하신 주의 말씀을 인용했다(18절).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유대인)을 구원하실 때 이방인들도 주를 찾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암 9:11-12). 여기에 할례나 율법은 요구되지 않았다. 이방인이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역사가 이 성령의 말씀과 일치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각각 말하는 중간에 바나바와 바울이 간증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는 할례나 율법의 요구 없이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이방인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됐다(12절).
성령이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고 신약 사도들의 말과 행한 일을 통해 확증하시는 복음의 진리가 이와 같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 여기에 다른 무언가가 추가되지 않는다. 앞선 압박 질문들을 생각해보라. 기본은 돼야, 어느 정도는 돼야 구원받은 것이란 생각은 100점은 못 돼도 적어도 30~40점짜리 공적이 구원에 필요한 것처럼 만든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공적이 100점 만점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한다(약 2:10).
하지만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율법은 “우리 조상도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이지 않은가?(10절). 이 말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 중 그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100점을 맞은 자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율법이 요구하는 100점을 맞을 수 없다. 그런데 은혜는 공적을 우리에게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께 찾는다. 그분의 100점 만점 공로로 우리는 의를 얻는다. 우리 대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분의 완벽한 공로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은혜가 우릴 방종으로 이끄는가?
<자녀교육, 은혜를 만나다>를 쓴 엘리즈 피츠패티릭, 딸 제시카 톰슨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자녀를 교육하라고 권면한다. 두려움 죄의식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가 순종의 동기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부모님은 나를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하려고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가장 강력했던 한 방은 내가 등교하면 내 방 침대에 앉아 항상 조용히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을 때다. 그 어떤 다그침과 양심을 찌르는 질문들보다 강력한 권면은 은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은혜다(고후 5:14).
은혜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라는 사실에 집중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그리스도가 치르신 헤아릴 수 없는 값을 세어보게 한다.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인지하는데 멈추지 않는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데까지 나간다. 오직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바라보게 하고, 오직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오직 성경에 따른 참 복음이다.
3. 참 복음은 사랑을 낳는다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사도(바나바 바울)와 장로들(야고보) 그리고 온 교회가 참 복음을 결의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왜 우상의 제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라고 했을까?(29절). 분명한 건 이것이 복음의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긴한 것들”이었고(28절), “스스로 삼가면 잘되”는 것이었다(29절, 평안함). 사실 이건 복음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이다. 하고 하지 않고의 자유가 있다는 말이다. 찰스 스윈돌은 개신교의 유명한 모토를 소개한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범사에 사랑을.” 그렇다. 이 조항은 성도 사랑을 위한 조항이었다. 성도 사랑은 참 복음의 열매다.
유대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듣기 때문에 이 조항이 얼마나 끔찍한 죄인지 안다(21절). 그런데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떡을 뗀다고 생각해보라.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가 섞여 있다. 어떤 고기는 목매어 죽인 것이라 피가 그대로 있다. 한 이방인 형제는 아내를 소개하는데 알고 보니 가까운 친척과 결혼했다고 한다(레 18:6). 아무리 그 자체가 죄가 아니더라도 유대인 신자들이 경악할 일 아닌가? 그러니 사랑하라는 것이다. 서로 복음으로 하나 될 수 있도록.
가장 압권은 바울이 한 일이다. 그는 이 종교회의 전에 갈라디아에 쓴 편지에서 은혜 외에 뭔가 더하려는 행위(특히 할례)를 혹독하게 비난했다(갈 5:2).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만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한다(16:3). 도대체 왜? 복음을 전할 때 디모데가 할례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이 복음을 거절할까 봐.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 안타깝게도 본질의 일치에 집착하면서 사랑을 잃는 경우가 있다. 또 비본질에 자유를 주장하면서 본질과 사랑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반드시 기억하자. 참 복음은 본질에 일치를, 비본질에 자유를, 범사에 사랑을 추구한다. 참 복음을 누리자. 참 복음을 전하자. 참 복음을 실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