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리에 속한 줄을 무엇으로 알까?
본문 : 요한일서 3장 19절~24절
설교자 : 조 정 의
접붙인 가지가 뿌리의 진액을 잘 받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롬 11:17).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걸 보고 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줄을 어떻게 알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하셨다(마 7:20). 참된 믿음은 행함이란 열매로 증명된다(약 2:17).
그런데 무성한 잎, 아름다운 꽃, 많은 열매가 달려 있어도 조화는 죽어 있다. 영적으로도 그렇다. 종교적 열심과 행함이 투철했던 바리새인들은 입술로 주를 공경하되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었다(마 15:8). 믿음이 없는 행함이 있을 수 있단 말이다.
보통 교회에서 자란 소위 ‘모태신앙인’은 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는데 삶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행함이 너무 부족하니 믿음도 거짓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행함이 아직 부족해도 믿음은 참되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무엇으로 알까?
사도 요한은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진리의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지 아는 법을 소개한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 헛된 확신을 가진 이들에게 자기 현주소를 보게 하시어 예수 안에 거하게 해달라 겸손히 부르짖게 하시고, 주 안에 확실히 거하는 자들이 바른 믿음의 확신 가운데 주 앞에서 더욱더 굳세어 지길 간구한다.
1. 주 앞에서 행함(19-20절)
요한은 시작부터 분명히 말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로써는 요한이 앞서 말한 내용과 연결되는데, 특별히 18절 행함과 진실함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삶을 말한다. 10절에 나온 의를 행하는 것도 여기 포함된다. 요한은 3장 1절에 하나님께서 엄청난 사랑을 베풀어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음을 바라보라고 요구했다. 이로 보건대 요한이 설명한 행함은 하나님과 우리의 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행함이다. 믿음과 동떨어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흘러나온 행함이다.
요한은 이로써…알고(미래형-일반 원리) 또 이로써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과 연결된 행함을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안다. 또한 믿음과 연결된 행함을 통해 더욱더 굳센 마음을 갖는다. 굳센 마음이란 무엇인가? 요한은 앞서 2장 28절에 주가 강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는 것을 말했고, 본문 21절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 것을 말했다.
믿음에 따른 행함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주님 안에 더 확실히 거하게 된다. 더욱더 담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 이를 설명하셨다. 이미 주님 안에 속한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럴수록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하셨다(요 15:4-5). 많은 열매는 믿음으로 맺어진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더 담대히 확신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쉽게 행함에서 믿음을 제거하고 두 부류의 오류에 빠진다. 바리새인처럼 행위로 자기 의를 얻으려 하거나 항상 부족한 행함을 보며 죄책감을 갖고 의심한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 앞에서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가? 누구 앞에서 책망을 무서워하는 종처럼 구는가?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이는…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20절)
이 말씀은 두 부류의 오류를 경계한다. 만일 당신이 행함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면, 기억하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바울이나 루터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도(빌 3:6) 모든 것을 아시는 거룩하신 전능자 앞에서 이사야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다(사 6:5).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눅 5:8).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반대로 당신이 만일 행함의 부족함 때문에 양심의 책망을 받아 늘 괴로우며 확신 없이 의심만 하며 산다면, 기억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 당신의 양심보다 더 정밀하게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허물을 크게 보신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사하고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하셨다(롬 8:1).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20절), 우리는 “누가 능히…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롬 8:3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행함도 죽은 것이다. 우리의 행함은 마땅히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 곧 진리에 둔 믿음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절대 분리되면 안 된다.
가령 ‘하나님은 은혜로 나를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그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이렇게 사는 제가 부끄럽고 의심스러워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것 믿어요, 그런데 교회 나가는 것도 귀찮고 말씀도 지겹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둘 다 현재 겉으로 보이는 행함엔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차이가 있나? 두 사람의 행함이 은혜로운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그리고 참된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다. 우리는 행함 자체보다 더 예리하게 행함의 이유(동기)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행함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코람 데오(라틴어, “하나님 앞에”)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 앞에서 마음을 굳세게 하는 비결이다. 교회에서 시키는 몇 가지 항목 혹은 당신이 세운 몇 가지 삶의 규칙이 아니라 모든 생각, 모든 행동, 모든 감정을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은혜로운 주님 앞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은혜로 자녀 삼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갖춰라. 그러면 당신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더욱더 굳센 마음으로 주 앞에서 담대히 살아갈 것이다.
2. 주 뜻대로 구함(21-22절)
20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었다면, 21절의 결과물을 얻는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다. 자기 양심에 비춰 책망할 것이 없을 수 있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죄를 자백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은혜로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요일 1:9).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다(히 4: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예수님 덕분이다(히 4:15; 엡 3:12).
자, 그런데 요한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다고 말한다(22절). 요한은 이 약속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이 말씀은 아마도 기도에 관하여 가장 오해받고 해석하기 꺼려지는 말씀일 것이다. 우리 생각대로 거의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주님께 받는다면 주께 속한 줄을 분명 알게 될 것이다(요 11:42).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22절)
여기 다시 한번 행함이 나온다. 계명을 지키는 것과 주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계명엔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신 뜻이 담겨 있다(롬 7:12). 그런데 행함과 구하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아버지께 받으신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자기 욕심을 위해 구한 적이 없으시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을 때도 들으심을 얻었는데(히 5:7), 그때도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하셨다(눅 22:42).
그러면 주 앞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계명을 지키며 행하는 자가 무엇을 구하겠는가? 주님 이름으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구할 것이다. 자기 안에 거한 주님 말씀에 합당한 것을 구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 것이다. 아버지께 받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진심으로 바라고 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도의 부재는 매우 위험한 신호이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단지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의미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뜻대로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아는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생각해보라. 먹는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방인이 우상을 만들어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마 6:31-33).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그것이 참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자들이 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부모의 기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구할 때도 있다. 구한 것을 얻지 못해 실망하거나 분노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진심으로 구한 적이 없다면, ‘주님의 선하신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구한 적이 없다면,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당신이 구한대로 하나님이 놀랍게 주신 것을 가지고 그분과의 관계에 확신을 갖지 말라. 더 굳센 확신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당신이 구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당신이 바라는 것에서 온다. 때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셨고, 사도 바울이 또 그런 간구를 드렸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진리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는 일을 행하고,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그것을 간절히 구한다.
3. 성령으로 행함(23-24절)
23절에서 요한은 22절에 말한 그의 계명이 무엇인지 이렇게 요약한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40). 믿음은 순종과 사랑이란 행함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분이 주신 계명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한다(요 13:34; 15:12). 이처럼 믿음과 행함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과 연결된 행함은 우리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24절을 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마다.’ 이 행함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맺은 열매다. 그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고, 성령께서는 그 관계 속에서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 주신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면서 바로 그 행함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라고 확신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친히…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은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말했다(롬 8:13-16). 성령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우릴 인도하고 행할 능력을 주신다(엡 3:16; 5:18).
흥미롭게도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롬 8:26-27). ②주 뜻대로 구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또한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고전 12:3).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롬 5:5). ①하나님을 아는 진리에 믿음을 두고 주 앞에서 행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했다(고전 3:16).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신비주의와 은사 주의를 성경적으로 반대하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자체를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과오를 자주 범한다.
우리는 오롯이 우리에게 달린 것처럼 행함을 추구하면서 그 결과를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반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과 연결된 행함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약속하셨다(요 14:18). 그 약속은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 속에 계시는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 말씀처럼 성령을 받은 날부터 그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 안에, 그들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그들 안에 계심을 알게 되었다(요 14:20).
행함은 단순히 당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일군 열매가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아 뿌리의 진액을 통해 맺은 열매이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못할 때 기도하라. 성령과 함께 탄식하며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달라고 구하라. 순종할 때 기뻐하고 감사하라. 당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소원과 능력으로 주께서 존귀함을 얻으시고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결론
만일 당신의 가족이 당신에게 “진리에 속한 줄을 무엇으로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교회 참석, 성경 읽기, 이웃 사랑, 금연과 금주, 신비로운 체험이나 놀라운 기도 응답?
당신이 삶으로 맺는 열매들이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은 첫째, 하나님에 관한 진리와 그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 둘째, 주님 뜻대로 구하는 마음에서 온다. 셋째,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열매의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의 삶에서 좋은 열매를 발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