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 사람 때문에 그리고 한 사람 덕분에

본문: 로마서 5장 12~21절

설교자: 이병권

 

여러분은 혹시 일 년 동안 죽은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2020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망자 수가 30만 5,100명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대략 3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전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2019년 기준으로 사망자가 대략 560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5170만 명 정도가 되는데 1년 동안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서 세상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 계산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죽음들 중에서 나와 관련이 있는 죽음은 얼마나 될까요?

장소를 생각해봤을 때 지구 반대편에 사는 누군가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 죽음이 나에게 특별한 영향을 줄까요? 시간을 생각해봤을 때 100년 전에 살았던 누군가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그 죽음이 나에게는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게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략 400년 전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나에게 감동이 될 수 있지만 나의 삶, 나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에게 적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특별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면서 계속해서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단순히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동이나 삶의 도전이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님의 그 죽으심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어떻게 나의 현재와 미래, 나의 영원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걸까요? 2천 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죽으심, 그것이 어떻게 세상의 악을 이기는 사건이 되고 어떻게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바울은 아담을 통해서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울이 아담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죽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1년에 5천만 명이 넘는 수많은 죽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죽음들은 대부분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죽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인류 최초의 죽음으로 갑니다.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의 시작을 이해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크게 두 부분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 사람 때문에 아담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으로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바울은 어떻게 죽음이 시작되었는지 살펴보면서 한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4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옵니다. 둘째,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옵니다. 셋째,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넷째,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 때문에 아담으로 인해 죄라는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이 죽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 부정적이고 반감을 가질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담은 가장 먼저 창조된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의 죄가 되고 아담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전쟁을 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전쟁을 할지 말지 누가 결정을 합니까? 국민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거나 투표를 통해서 전쟁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속한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또한 전쟁에 관련된 중요한 정보들은 국민들이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대표자가 권한을 가지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결과는 모든 국민이 함께 받게 됩니다. 대표자가 전쟁을 선포했는데 나는 아니라면서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과 관계없이 나도 국민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내가 승리하는 것이고 패배하면 내가 패배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죄 했기에 모든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요?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분명한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 했지만, 하지만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다시 말해, 율법이 있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법이 없는데 어떻게 법을 어기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14절의 “아담의 범죄”라고 할 때 “범죄”라는 단어를 좀 더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범죄라는 ‘명사’가 총 일곱 번이 나오는데, 일곱 번의 “범죄” 중에 14절의 “범죄”만 다른 단어입니다. 14절의 단어는 4:15에도 나오는데 “범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지켜야 하는 법을 어겼다는 의미로 위반했다는 뜻을 가지는 단어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범법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의 사람들은 아담과 같이 범법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범죄 했고 그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2:12에서 말씀했습니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사람들은 아담처럼 주어진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들도 죄를 지음으로 사망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으로 인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죄와 사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모습을 통해 오실 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모형은 어떤 물건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든 하나의 주형이나 본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신약의 진리를 예시하는 구약의 인물이나 제도, 사건을 말합니다. 아담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예수님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예시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 예수님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모형이나 아니라 그 모형이 가리키는 원형인 예수님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다음으로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원형 되시는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모형 되는 아담과 비교합니다. 두 측면에서 비교를 하는데, 먼저 예수님과 아담의 다른 점을 중심으로 하고 이어서 예수님과 아담의 같은 점을 중심으로 합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바울은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을 비교하면서 다른 점을 대조합니다. 15절과 16절에 각각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면서 아담과 예수님이 가져온 정반대의 결과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15절에 아담은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16절에 아담은 정죄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의롭다 하심을 가져왔습니다. 17절에 아담은 사망이 왕 노릇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합니다.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이 가져온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했지만 사망이 우리를 속박하고 지배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그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인류에게 죽음을 선물한 한 사람, 아담 그리고 인류에게 생명을 선물한 한 사람, 예수님. 아담이 죄라는 이름을 가진 죽음의 바이러스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했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그 죽음의 바이러스를 이기는 항체를 주셨습니다. 부작용 없는 완벽한 백신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은사, 은혜, 선물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은사는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물은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은사, 은혜, 선물, 서로 다른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은혜를 더 강조하기 위해 “더욱”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15절과 17절에 “더욱 하나님의 은혜”, “더욱 은혜”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것은 아담으로 인해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더욱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더 강조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표현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로 은혜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온 인류에게 주었던 나쁜 영향들, 그 저주와 고통, 정죄와 사망, 그 모든 것들을 완전히 덮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넘치도록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정말로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으로 인해 주어진 결과는 이토록 크게 다릅니다. 하늘과 땅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르고 그 내용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양이나 깊이나 넓이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압도적으로 예수님 덕분에 누리는 은혜가 큰 것입니다.

다음으로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과 아담의 같은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번 단락에서 바울은 같은 점을 주목합니다. 18절에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19절에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21절에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두 사람이 가져온 결과는 다르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원리는 같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주목하는 원리는 한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계속해서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을 반복해서 비교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이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한 사람의 행동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은 철저하게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완벽하게 성공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다가 20절에서 갑자기 율법을 말합니다. 뜬금없이 갑자기 왜 율법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만큼 바울이 유대인들을 생각해서 늘 율법에 대해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있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울은 계속해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율법의 역할을 다시 언급하면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들을 해결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한다.’ 이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율법이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더 많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전에 몰랐던 것들이 죄로 분명하게 진단되면서 죄가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서 거짓말을 죄라고 규정하기에 거짓말을 할 때마다 율법을 통해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이 우리의 악한 본성, 반항심을 자극해서 오히려 죄를 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청개구리처럼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견해, 모두 가능합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람에게 있는 반항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합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분의 정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을 말하는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은 그 역할을 하면서 죄를 더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은혜는 그 어떤 죄보다 더욱더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완성하십니다. 죄로 인해 완전히 망가진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은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합니다. 은혜는 굶주리고 목마른 우리 영혼을 좋은 것으로 만족시키고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하며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은혜는 우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영생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아담은 범죄 했고 그 범죄로 인해 죄와 죽음이 왕 노릇했지만 율법은 죄를 죄 되게 했고 더 많은 죄를 더하며 상황을 악화시켰지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칩니다. 그 결과,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은혜가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것은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절에 언급되었던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어서 은혜라는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 그 다스림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곧 영생을 누리며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복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불순종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순종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기에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의로운 행위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 넘치는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고 그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죄였고 우리의 끝은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 그 시작과 끝, 그 모두를 바꾸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끝없는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보라.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죄인이라고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보라.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의인이라고 선포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되었지만, 한 사람 덕분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이 모든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혜에 안에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