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는 방법
본문: 히브리서 10장 19~25절
설교자: 조정의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밤 여러분에게 나타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복을 줄까? 내게 구하라”라고 한다면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까요? 무엇이 모든 복을 초월하는 최상의 복, 모든 복을 포함하는 최대의 복, 즉 “참된 복”일까요?
동화같이 들리지만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꼬 너는 내게 구하라”(왕상 3:5)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셨고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를 함께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받은 축복을 풍성히 누리면서 이런 저런 일을 겪고 나서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돈, 명예, 쾌락, 영화, 지식, 인기, 권력 다 헛되더라…진짜 사람에게 있어 참된 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전 12:13)
한 마디로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지혜는 진실을 볼 줄 아는 참 지혜였습니다. 부귀영화, 호흡, 그가 가진 지혜까지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참된 복, 모든 것을 초월하고 포함하는 복은 그 하나님에서 내려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복의 근원인 하나님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자기가 행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가지고, 거룩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그분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화목한 관계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진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비를 얻고 건강을 누리고 재물을 받고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땅에서도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도 하나님께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분리되어 살아가게 될 운명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다윗은 참된 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수로 허물과 죄를 보지도 못하시고 마음에 간사함이 있다면 반드시 공의로 그것을 정죄하시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참된 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아침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서 우리는 그 참된 복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을 풍성히 누리는 세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 새해를 시작하면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안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히브리서 10장 19-25절입니다.
본문은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참된 복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19-21절에 설명하고, 둘째, 그 복을 누리는 세 가지 방법에 관해 나머지 구절에서 설명합니다.
1. 참된 복의 근거이신 예수님(19-21절)
참된 복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9절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 주로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아마도 로마지역에 세워진 초대교회 형제자매에게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성전을 비유로 제시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절)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20절에 언급된 “휘장”을 볼 때 여기서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지성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대제사장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엄숙한 장소였습니다. 대제사장조차 자기가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제한된 시간, 제한된 조건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조금도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셨고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그 앞에 합당하지 못한 마음을 갖거나, 그 뜻에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들어가게 되면 단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옷 가장자리에 돌아가며 방울을 달게 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고 나올 때 소리가 들리도록 말입니다. 그 소리가 들려야 죽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출 28:35).
그만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력을 얻었을까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무엇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요? 20절에 계속된 설명을 살펴봅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20절)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있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휘장 가운데로 예수께서 새로운 산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지성소 안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 27:51). 20절에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의 육체가 십자가 위에서 휘장처럼 찢어져 피를 쏟았을 때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이렇게 제시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으로 새롭게 내신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려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는 그를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된 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만든 노력과 헌신의 길이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죽음으로 내신 길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떳떳하고 내세울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고귀하고 그리스도의 삶이 정결하기 때문에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런 자녀를 아버지가 좋아하실까요? 사랑하실까요? 나에게 정말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MRI처럼 내 속에 모든 은밀한 것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지 두렵습니다. 아무리 자녀라도 은혜와 사랑을 구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걱정 말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되신다”(21절 참고)
“하나님의 집”은 종종 물리적인 장소 “성전”이나 “성소”를 가리키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히 3:2, 5, 6). 특별히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 그 안에 소망과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그의 집”이라고 표현합니다(히 3: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형제자매들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 그분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냥 나가지 않습니다. 큰 제사장 예수님을 중보자로 믿고 나아갑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체험적으로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하실 때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중보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로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의로운 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담대하게 구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5-16)
정리하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의 보혈이 우리와 아버지 사이에 생명의 길을 내셨습니다. 또한 부족한 행위와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도 아버지께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기대하며 때마다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 대제사장 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가 누리는 참된 복의 근거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하고 초월적이며 모든 복을 포함하는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복을 얻었고 지금부터 영원히 이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것, 그분의 것이 내 것!
여러분은 이 복을 누리고 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복, 영원한 복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고 계십니까? 왜 그렇지 못할까요? 왜 최고의 복이 주는 기쁨에서 멀어져 솔로몬이 헛되다고 결론지은 상대적으로 저급한 복을 갈구하는 것일까요?
D.A.카슨은 현대 기독교인들은 마치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한 사람이 결혼생활의 의무는 다하지만 기쁨은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산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참된 복을 가진 자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살만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진 복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갖고 있던 다음 관심사였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2. 참된 복을 누리는 세 가지 방법(22-25절)
참된 복을 누리는 방법은 흥미롭게도 믿음(22), 소망(23), 사랑(24)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방법의 원동력이 되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A.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22)
첫째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풍성히 누리기 위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의 삶에서 멀어져 자포자기한 상태로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한동안 기쁨을 누렸는데 자기 삶에서 오는 실망, 다른 사람이나 자기의 죄로 넘어지면서 겪는 죄책감과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저앉아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누리다가 계속된 잘못으로 아버지를 실망시키고는 더 이상 자기에게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친밀한 관계를 갖기를 포기한 자녀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는 참된 복을 풍성하게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라!” 계속해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넘어지고 삶에 온통 진흙이 묻어있고 엉망진창일지라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양심도 없습니까? 더러운 몸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성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22절)
마치 구약의 제물이 피 뿌림을 얻어 정결함을 얻은 것처럼(히 9:21-22), 제사장이 몸을 씻어 깨끗함을 얻은 것처럼(민 19:7),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 그가 피로 맺은 새언약으로 씻음을 얻은 자, 그는 깨끗함과 정결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이런 놀라운 예언의 약속을 전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에스겔의 예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거룩함이 우리 안에서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추구하려는 욕구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빌 2:13). 성령을 우리 안에 두어 그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의 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단호하게 묻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한 마디 더 붙이자면 “믿음이 없는 자들아!”일 것 같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상처받고, 실수하고, 유혹당하고, 죄를 범하고, 실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당신의 연약함을 능가합니다. 이를 힘입어 날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십시오.
B. 소망을 굳게 잡으라(23절)
두 번째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누리는 참된 복을 풍성히 얻기 위해 우리는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된 소망, 참된 복을 다른 곳에서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에서 찾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찾은 “보화”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의 “보화”를 다른 것에서 찾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경제적인 압박 속에서 재물을 보화로 찾고, 관계의 심각한 갈등이 생길 때는 사람들의 인정, 격려, 위로를 찾습니다.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는 그것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귀한 것처럼 여기고, 건강을 잃으면 그것만 찾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우리 소망이 다른 것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그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삶이 고달프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소망을 잃지 마십시오. 배고프고, 굶주리고, 심지어 육체적 고난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께 둔 소망을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하신 것을 이루지 않으신 것이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파도가 거셀수록 더 단단하게 하나님께 소망의 닻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 분명한 보증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씨,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왕,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온 메시야가 예수 그리스도로 확증되지 않았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우리의 살아있는 소망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가 가진 참된 복의 소망을 앗아가지 않도록 굳게 잡으십시오.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솔로몬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들을 소망으로 삼지 마시고 최고의 복을 붙잡으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커다란 소망으로 여기는 로또는 푼돈으로 살 수 있지만 벼락을 두 번 연속으로 맞는 확률만큼 당첨되기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예수의 보혈로만 살 수 있는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지만 100% 당첨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 그것을 당신의 소망으로 굳게 붙드십시오.
C. 사랑과 선행으로 돌아보라(24-25절)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진 참된 복,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풍성히 누리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과 선행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부르셨지만, 자녀가 된 이상 개별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믿음과 한 소망을 가진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교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기쁨을 더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일반 사회조직, 동아리, 모임에서 나누는 교제와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슈를 이야기하고,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교제의 필요한 부분이지만 우리의 교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산악회 사람들이 산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예인 팬클럽 회원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스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위대하고 영광스런 아버지에 대해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우리를 강력하게 하나로 묶는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서로 사랑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 우리가 서로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 큰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가 주신 기쁨을 충만하게 누립니다. 그래서 사랑을 더욱 격려해야 합니다.
손과 발로 봉사하는 것만 사랑이 아닙니다.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만 사랑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서로 섬기든지 오래참고 온유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일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입니다(고전 13). 우리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자고 만날 때마다 돌아보며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고 너희는 내 가지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붙어있으면(내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많이 맺는 것,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 돕는 것, 억울한 사람을 돕는 것만 선한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종교생활 하는 것만 선한 일이 아닙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명한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딛 2:14).
우리의 교제의 목적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해줄 말이 그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이 되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서로 만나지 않고서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25절에 경고하고 있는 대로 어떤 이들은 습관적으로 모이는 것을 멀리합니다. 개인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성도들과 접촉점을 최소한으로 합니다. 교회를 학원처럼 여러 종교서비스를 받는 곳처럼 여기고 매달 회비를 내며 나와 가족만 덩그러니 왔다 갔다 반복합니다. 돌봄을 받고 싶어하지도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할수록 습관적으로 잘 모이지 않으려는 태도도 두드러집니다. 가족여행, 자격증, 시험 준비, 휴식 등 여러 가지 특별한 이유를 만들어 모이는 일을 건너뜁니다. ‘나 하나 가서 다른 성도를 격려할 수 있다면…’이 아니라 ‘나 하나 빠진다고 해서 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자들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망각한 자들입니다.
바로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 오심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달력을 한 장 넘길 때마다 달력은 우리에게 “주오심이 이만큼 더 가까이 왔다”고 말해줍니다. 주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을 때 우리 각자는 아버지의 그 풍성한 사랑을 자녀들과 어떻게 서로 나누었는지 보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맺은 열매를 가지고 결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일을 제쳐놓고 선택한 여러 가지 핑계들을 낱낱이 보고할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하나님과 영원히 누리는 풍성한 사랑의 관계를 풍성히 누리기 원한다면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모여서 서로 돌아봐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고, 서로 열매를 많이 맺자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과 기쁨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새해에 어떤 계획들을 세우셨습니까? 바이블 타임으로 오늘까지 14일째 성경읽기를 차근차근 해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 열심히 참여하기로 마음먹으신 분도 계실 것이고, 신앙서적을 열심히 읽거나 교회 여러 봉사의 자리에서 성도를 섬기는 것으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결심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스포츠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열매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유평 성도 중 소외되는 청년, 학생, 가정을 돌아보려고 마음먹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좋습니다. 모든 활동이 이 세 가지 분명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구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을 힘 있게 붙드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소망을 하늘에 굳게 붙들어 둘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각종 모임, 읽기, 공부, 묵상, 교제 그 모든 것의 목적이 여러분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든지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 돌보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혼자 좋아서 하는 일, 혼자 즐기는 일, 혼자 유익을 얻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무엇으로 섬기든지 그 일을 통해 성도에게 사랑을 격려하고, 선행을 격려하며, 서로 돌아볼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이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새해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은혜와 평강이 예수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둔 우리 모두에게 가득 부어 넘치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