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을 의지한 왕 히스기야
본문: 역대하29~31장; 열왕기하 18~20장
설교자: 최종혁

 

분열왕국에서 요시야와 더불어 가장 선한 왕으로 손꼽히는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25세에 왕이 되어 29년을 다스렸다. 마지막 9년은 아들 므낫세와 함께 통치했고 그 전에는 아버지 아하스와 함께 통치한 기간도 있다. 히스기야 홀로 통치했던 것은 20년 정도다. 그의 통치 기간 중 활약했던 선지자는 이사야와 미가다. 히스기야는 다른 선한 왕들과 같은 평가를 받는다.

 

왕하 18: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요시야의 특별함은 그의 선대에서 이루어 놓은 온갖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마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켰다는 것이다. 우상들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고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유월절을 지켰다. 요시야는 그야말로 ‘말씀대로’를 외쳤던 왕이다.

히스기야의 특별함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왕하 18:5-6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히스기야 역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고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특별히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그 열매가 드러났다. 여기서 사용된 ‘의지하다는 단어는 116번 성경에 등장하는데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에서 여기까지는 6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단어인데, 그중 ‘의지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3번 뿐이고, 하나님이 의지의 대상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히스기야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 같다. 마치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이 등장하기까지 ‘의지한다’는 것을 감추어두셨다가 그가 나타났을 때 보여주신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히스기야의 의지는 정말 특별한 것이었다.

‘의지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감성적이거나 맹목적인 신뢰를 말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냥 ‘난 하나님 믿어’라고 하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의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대는 것을 의미한다.

6절의 말씀이 이런 부분을 말한다. –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연합했다는 말은 신명기에서는 ‘의지하고’라고도 번역되었다(신 10:20). 본래 의미는 ‘꼭 붙어있다’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서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라고 할 때 사용된 말이고, 오르바가 나오미를 떠날 때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더라’라고 할 때 사용된 말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딱 붙어있는 것, 요즘 흔히 말하는 ‘껌딱지’고 옛날 표현으로는 ‘찰거머리’라고 할 수 있다.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하나님만 의지했던 사람으로 성경은 평가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히스기야가 그렇게 했던 것은 단순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이나 요시야가 그랬던 것처럼 히스기야도 완벽했던 사람은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하지는 않다. 히스기야는 말년에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회복되어 15년을 더 살게 되는데, 그 때 그는 교만해져서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한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책망하시고 히스기야는 회개하지만 그 죄의 결과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사건은 히스기야의 연약함을 보여주지만,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히스기야도 여전히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죄에서 회개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된 때에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왕하 20:19)라고 고백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히스기야 왕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그리고 이사야 36~39장에 기록되어 있다. 열왕기하(그리고 이사야도 유사하다)는 히스기야가 환난 중에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에 좀 더 집중하고 있고, 역대하는 환난 전 평안할 때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에 좀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역대하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가 평안할 때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살펴보고, 열왕기하의 기록을 중심으로 환난 중에 히스기야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살펴보자.

 

그가 평안함에 거할 때(역대하 29~31장)

우리는 무언가를 의지한다고 할 때 그럴 만한 상황을 생각한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무언가를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런 상황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지하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히스기야의 경우도 그랬다.

생각해보면 꼭 그런 특별한 상황에서만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에 의존적인 존재로서 항상 무언가를 의지한다. 우리의 전반적인 삶을 어떤 것 혹은 어떤 것들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들을 의지한다. 무엇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의존적이어서 무엇이든 의지해야 하는 존재다.

정말 문제는 무엇을 의지하느냐다. 사람을 의지하기도 하고 돈을 의지하기도 한다. 어떤 가치관이나 사상을 의지하기도 한다. 의지할 것들은 많다. 의지한다는 것은 ‘기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것을 내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으면 그것이 나에게서 없어지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무언가가 내 삶에서 빠졌을 때 그것에 내가 얼마나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나는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걸을 때 그것을 툭 치면 넘어진다. 등산을 할 때 잡고 있는 스틱도 균형을 잃으면 그것을 의지하던 사람이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것이 내 삶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히스기야는 평온함 가운데 무엇을 의지했을까? 히스기야가 했던 일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왕이 된 히스기야가 먼저 했던 일(대하 29~31장)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을 정결하게 하고 그들을 통해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는 번제와 속죄제 등의 제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한동안 지켜지지 않던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게 했다.

어떻게 보면 왕 한 사람의 생각에 따라 꽤나 강압적으로 이런 일이 진행된 것 같지만, 역대기의 저자는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다.

 

대하 30:25-26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 [26]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기뻐했다. 이런 기쁨은 단순히 감정적인 기쁨에서 끝나지 않았고, 실제적인 삶으로 이어졌다.

 

대하 31:1 이 모든 일이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그들 삶에 있던 우상을 제거한 것 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도 기쁨으로 동참했다. 왕 자신이 먼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십일조를 드렸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라 기꺼이 풍성하게 드렸다. 백성들이 풍성히 드린 예물로 제사 드리는 자들을 먹이고도 남아 예물이 쌓였다.

 

대하 31:10 사독의 족속 대제사장 아사랴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흩여져서 기쁨으로 예배의 삶을 사는 것이 곧 영적인 부흥이다. 오늘날의 모든 교회가 꿈꾸는 모습일 것이다. 히스기야는 어떻게 그런 영적 부흥을 이끌었을까?

히스기야가 했던 일은 복잡하지 않다. 단순히 올바른 예배를 회복하는 일을 했다. 올바른 예배는 대상이 올바라야 하고 방법이 올바라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섬기는 것이 올바른 예배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우상숭배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당연히 우상숭배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섬기는 것도 우상 숭배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했던 일은 올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성전 예배를 회복하는 일과 그 외의 모든 잘못된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산당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는 산당을 제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당

히스기야 왕 이전에도 좋은 평가를 받은 왕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평가에 하나같이 따라오는 것들이 있었다.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왕상 15:14, 아사; 22:43, 여호사밧; 왕하 12:2, 요아스; 14:3, 아마샤; 15:3, 아사랴; 15:34, 요담). 이들은 다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선한 왕들이었다. 성전을 보수하기도 하고 정결하게 하기도 했다. 우상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산당은 없애지 않았다. 그만큼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당을 처음으로 없앤 왕이 히스기야고 그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을 요시야가 제거한다. 왜 그렇게 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어려웠을까?

산당은 참 애매한 곳이다. 아니, 교묘하다. 산당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 세워진 예배소인데, 꼭 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평지에도 지어졌고 도시에도 골짜기에도 있었다. 가나안 땅에는 그런 산당들이 많았는데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였다. 단순한 우상 숭배가 아니라 그곳에는 남녀 매춘이 행해졌고 자녀를 제사로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산당과 우상들을 제거할 것을 명령하셨다.

 

민 33:52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어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신 7:25-26 [25]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현대인 – “여러분은 우상을 철저히 미워하고 멀리하십시오.”

새번역 – “당신들은 철저히 그것을 미워하고 꺼려야 합니다.”

바른 성경 – “너는 그것을 매우 혐오스럽게 여기고 역겨워하여라.”

 

하나님은 산당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우상 숭배를 미워하셨고(가증스럽고 역겨워하셨고) 따라서 그 백성들도 그것을 미워하여 그 모든 것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산당에서의 예배가 어느 정도 허용되면서 산당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는 그런 장소가 되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지만 많은 이방 여자와 정략결혼을 하였고 결국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성전이 보이는 예루살렘 앞에 산당을 짓는다. 솔로몬 이후 북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과 남 유다의 왕이 된 르호보암은 산당에서 행해진 우상 숭배에 불을 지핀 사람들이다. 여로보암은 사람들이 남쪽의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면 그들의 마음이 돌아설 것을 염려해서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서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두고 그 금송아지가 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기게 한다. 그리고 산당들을 만들어서 원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제사장으로 세우고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한다. 르호보암도 마찬가지로 산당을 세우고 그곳에 바알과 아세라 상을 세워 섬기게 했다.

산당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삶의 중심지도 되었다. 당시 가나안 땅의 신앙에 따르면 바알과 아세라는 농업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신이었다. 그 둘이 성적인 관계를 맺을 때 비가 오고 땅에 생기가 돌아 농사가 잘된다고 가나안의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산당이 종교적인 장소이면서 매춘이 성행했던 것은 그런 이유다. 그렇게 그들의 신을 자극해야 한다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 땅의 백성들은 이런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너희가 믿는 신 여호와가 참 대단한 것은 사실이야. 애굽에서부터 너희를 이렇게 구원해서 이 땅까지 오게 했으니까. 그런데, 너희는 이제 여기서는 어떻게 살 거야? 여호와는 유목의 신이잖아? 여기서 너희는 정착해서 농사지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좀 어렵지 않겠어? 농사를 지으려면 농업의 신을 섬겨야지. 그런 면에서는 바알과 아세라가 최고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계속해서 이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바알과 아세라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드러난 사건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스라엘 민족이 계속해서 이 우상을 숭배하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를 그들이 싫어했다기보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도 뭐 문제될게 있나’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한 신이 내리는 복을 기대하기 보다 더 많은 신을 섬기면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굳이 멀리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이유가 없다. 여기 가까운 산당에서 하나님도 예배하고 또 다른 복도 준다는 바알과 아세라도 예배하면 그게 더 나은 것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산당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 중심부로 들어왔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오히려 크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것처럼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어 온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들어간 그런 수많은 장소를 없앤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많은 선한 왕들이 그 일은 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 사람은 다름 아닌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였다. 아하스는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히스기야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산당과 우상 숭배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하스

아하스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16년을 다스렸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다(대하 28:1). 그는 바알을 섬기고 자녀를 불태우는 일을 하고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했다(대하 28:2-4).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셔서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신다. 그 때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위기를 벗어난다.

그 앗수르 왕을 만나러 아하스는 다메섹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한 제단을 보고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동일한 제단을 만들게 하고 그 제단 위에서 제사를 드린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서 역대기의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대하 28:23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아하스의 생각은 단순했다. 아람 왕들이 자신을 공격하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이 도왔기 때문이니까 나도 그 신을 섬기면 나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라.

 

대하 28:24-25 [24] 아하스가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모아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또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제단을 쌓고 [25]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다른 신에게 분향하여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더라

 

아하스는 이방신을 섬겼고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했다. 성전의 기구들을 부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바꿨다. 솔로몬이 만든 놋 제단을 북쪽으로 옮기고 하나님께 물어볼 일이 있을 때, 즉 점 치는 일에 사용했다(왕하 16:15). 아하스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버렸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삶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전혀 달랐다.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다른 여러 신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히스기야

이것이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맞닥뜨렸던 상황이다. 누구도 하나님만 섬기지 않았다. 다르게 표현하면 누구도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면서 살고 있지 않았다. 의지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붙들고 있었다. 그것에 붙어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아세라든 그 어떤 신이든 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삶을 하나님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다른 여러 신들에게도 의지했던 것이다. 마치 여러 다리가 달린 테이블과 같다. 다리 한 두 개쯤 문제가 생겨도 괜찮기를 그들은 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분명한 명령은 그들에게 사라졌고, 그저 그들이 섬길 수 있는 정도의 하나님만이 그들에게 남아있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기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미워하라고 하신 우상들을 자신들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받아들이면서, 여전히 하나님도 섬길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떤 왕도 그런 ‘상식’을 뒤집지 못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그런 상식을 충실히 따르고 널리 보급했던 사람이다. 히스기야는 모두가 다른 신도 섬기고 의지하는 것이 맞다고 말하는 세상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겠다고 대답한 사람이다. 역대기의 저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대하 31:20-21 [20]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21]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 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찾고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행했다. 하나님만 의지해도, 하나님께만 기대도 충분했던 것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어야만 한다고 히스기야는 그 삶으로 선포했다. 그 삶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히스기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이런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냈다.

 

교훈

당신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세상에는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가나안 땅에 의지할 것들이 많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그렇다. 사실 하나님 없이도 이 세상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정도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도리어 큰 유익이 될 것 같은 것들이 많다. 큰 즐거움을 주는 것들도 많다. 가나안의 백성들이 그런 것들을 의지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처럼 지금 세상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도 세상의 그런 것들을 쉽게 의지할 수 있다. 좋아 보이고 즉각적인 효과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장이 좋아 보인다. 내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좋아 보인다. 결혼 상대도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는 사람이 좋아 보인다. 자녀 양육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해야만 자녀 양육에 성공한 것 같다.

이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거나 죄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죄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문제는 내가 그것들을 의지하려고 할 때 시작된다. 돈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 것처럼,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 아닌 것들이 그렇다.

욥은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잃었다. 재산을 잃었고, 자녀를 잃었고, 자신의 건강마저 잃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을 그가 궁극적으로 의지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증거다. 그에게 소중했던 것이고 그에게 기쁨을 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과 함께 그것들을 의지하지는 않았기에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상식과는 다르다. 세상은 의지할 수 있으면 더 많은 것에 의지하라고 말한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무엇을 함께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 대신 혹은 하나님과 함께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있는가? 그것이 중립적이고 좋아 보여도 결국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히스기야와 같은 과감한 결단으로 하나님께 꼭 붙어 있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