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주님 주신 새 계명, 사랑하라

본문 : 누가복음 6장 27~36절

설교자 : 최종혁

 

말씀을 공부하면서 어렵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미가 무엇일까 고민할 때보다 내가 정말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의문이 되는 것을 성도들에게 그렇게 사실 것을 말해야할 때가 가장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어려움의 최정상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이니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셨을 때 그 전날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몇 가지 있는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그 제자들 중에 자신을 팔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가룟 유다가 방에서 나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셨던 큰 교훈이 이것입니다. 사실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왜 이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냥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 그것이 다른 사랑과 다른 것이기에 새 계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런 사랑을 보였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그것이 특징이 됩니다. 특징은 다른 사람의 것과 구별되는 무엇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전의 모든 사랑, 그 이후의 모든 사랑과 다르기에 그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27절의 시작을 보시면 예수님은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화 있는 자들”, “저주받는 자들”에 대해 이 땅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면 이제는 “너희들”, “복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사랑의 정의, 방법, 대상, 이유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가요의 가사는 대부분이 사랑이 주제입니다. 그런 사랑은 감정을 말합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도 그것을 담고 있습니다. 애틋한 감정, 로맨스입니다. 뜨겁기도 하고 식기도 하는 사랑입니다. 남녀관계를 떠나서도 사랑을 말할 때 좋은 감정이 있습니다. 좋은 감정이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도 그러한 사랑일까요?

27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같은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수가 누구인지 말씀하시는데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 저주하는 사람, 모욕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 사람,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라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27-28절에서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선대하고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미워하는 것은 감정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 그를 잘 대해줘라, 친절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주와 축복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축복은 절대자에게 말하기를 그를 좋게 해달라, 복을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저주는 반대로 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때, 나는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선대하는 것이 사랑의 행동이라면 축복하는 것은 사랑의 말입니다. 세 번째로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행동과 말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유익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어도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까지도 그 사람을 위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좋은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를 긍휼히 여기고 안타까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감정보다는 의지적인 것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방법도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지금 싸우고 있는 상황이라기보다는 모욕을 주는 상황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오른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때리는 것은 손등으로 때리는 것으로 모욕을 주는 행위입니다. 이 상황이 그러한 상황입니다. 다른 쪽 뺨을 돌려대고 그쪽도 맞아야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맞은 것에 대해 보복하지 말고 용서와 자비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른 쪽 뺨을 맞을 각오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모욕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모욕하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잡혀가고 매 맞고 고난당할 때 그들은 대항하거나 작전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복음 전하기에만 힘썼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 여러분은 겉옷이 많아서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6-27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낮에는 겉옷이고 밤에는 이불이 됩니다. 그의 유일한 소유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누가 가져간다면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옷을 가져간 사람에게 속옷까지 줄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반화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무엇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빌려주든지 가져가든지 너의 소유를 가져가면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지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옷을 빼앗기셨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의 핵심은 의지적인 희생입니다. 의지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내려놓아서 다른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지 않고 내려놓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정의이고 방법입니다.

세상에선 무엇인가를 해줘야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근본적인 사랑의 방법은 상대를 위해서 나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 희생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유익을 나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더 포괄적으로 정리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황금률입니다. 대부분 당시 철학자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긍정형으로 말씀하셨는데 다른 이들은 부정형으로 말합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너희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더 적극적인 긍정의 표현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에게 관대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도 상대방이 와서 용서해준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필요를 누군가 알아서 채워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상대에게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소극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원하면 상대에게 그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는 관대합니다. 내가 뭔가 잘못하면 항상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싶습니다. 상식의 차이가 아니라 이해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을 나에게 적용해보십시오. 나를 대상으로 해서 나를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저주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제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대상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나 자신이거나 자녀라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녀라고 해도 그 부모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랑을 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대상이 이와 같다면 세상의 사랑과 별로 다른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이런 사람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예수님은 분명 “너희”와 “죄인”을 구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별하고 계십니다. 죄인은 사랑하는 자만 사랑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대가를 받고 빌려주는 것도 역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당시에도 서로에게 뭔가를 빌려줄 때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내가 뭔가를 빌려줬을 때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 저주하는 자, 모욕하는 자에게 너희의 사랑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나의 가진 것을 빌려주고 친절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잘해주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려면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직장상사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잘 하지도 않고 해를 끼치는 사람, 나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을 원수, 적이라고 합니다. 원수는 싸움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원수를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웃은 선택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이웃이 있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배울 몇 장 뒤의 누가복음 말씀에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그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은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아주 적절한 질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사랑할 사람이 있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도적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 레위인이 그냥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돈을 들여 치료하고 숙소에 맡기고 돈이 부족하면 자신이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선택적이라고 하지 않고 누구든 사랑을 베푼 그가 이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사랑하라는 명령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스러운 사람, 잘해주는 사람, 유익을 주는 사람, 얻을 것이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나아가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여러분을 미워하고 뺨을 치면, 욕한다면, 소유를 가져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대로 갚아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울분이 일어납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받은 대로 되갚아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동일하게 그렇게 했다면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다른 것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세상과 구분되길 바라셨습니다. 제자들이 죄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죄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냐 너희들이 그렇게 하면 뭐가 다르겠느냐 하십니다. 왜 자연스럽지 않게 반응하라고 하실까요? 그 이유는 35~36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이유와 다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받을 상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 백성에게 상을 주시고 칭찬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상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취할 수 있는 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얻어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을 베푼 사람에게 뭔가를 돌려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상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리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입증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의 아들이라는 것은 관계뿐만 아니라 속성을 공유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 인자하고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땅에,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은혜를 모르고 감사치 않는 사람들을 대해 하나님은 천벌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고 하나님을 욕하는 자들에게 항상 나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롯과 그 가족들을 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참으시고 신실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뭔가 잘한 것 같은데 그 대가가 돌아오지 않을 때 하나님께 불공평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공평하게 하신다면 세상이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십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은혜의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로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를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완벽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더 특별하게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그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기 위해 지불하신 희생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도 안 되는 사랑을 요구하시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아버지가 자비로운 분이고 그 자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본을 보이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 사랑을 가르쳤고 사랑에 따라 살았고 이 땅에 그분의 제자임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낸다면, 하나님의 사랑처럼 내가 사랑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사랑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드러나고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기쁜 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높임 받으시는 것,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드러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셨던 사랑은 제자들에게 강렬하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사랑의 정의, 대상, 방법이 달랐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편지를 보면 그에게 그런 마음이 가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표현입니다. 참된 제자와 그렇지 않은 제자를 구분하는 선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마음속에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할까? 제가 찾아낸 답은 이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면 내가 손해 보기 때문에, 손해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교회 안에 , 세상에 가득하다면 그런 환경에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죄로 물들어 있고 계속해서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손해 보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의 것을 취하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을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명령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손해 보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모습이 이 땅에 올바르게 나를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까?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전하고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고 구원을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할 수 있을까요? 그 하나님의 속성을 내 삶 속에 드러냄으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좋은 쪽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는 다른 사랑으로 우리 주님과 하나님을 이 땅에 드러낼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