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삶
본문: 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설교자: 조정의
2019년 3월 5일부터 8일까지 미국 LA 썬 밸리에 위치한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셰퍼드 콘퍼런스가 열렸습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온 4,500명이 넘는 참석인원과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 많은 음식과 섬김, 좋은 신앙 서적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선포되는 등 모든 것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하나님의 은혜를 흠뻑 맛볼 수 있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콘퍼런스의 주제는 “충성”이었는데, 최근에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목회 50주년을 맞이한 존 맥아더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이 주제를 가지고 콘퍼런스를 개최한다는 것에서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50년간 큰 문제 없이, 구설수 없이 신실하게 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충성스럽게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목사들이 하나둘 사역 현장에서 낙오되고 사라지는데, 어떻게 50년간 충성스럽게 목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이제 막 5년의 목회를 한 제가 느끼기에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맥아더 목사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목회를 했고, 작은 규모의 시골 교회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도전과 고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미국을 떠나기 전 저는 약간의 무기력함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도 충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제 안에 이런 고민이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말씀, 기도, 전도, 봉사, 섬김, 심방 등을 충성스럽게 해내면서, 사랑하는 성도, 섬김의 대상인 그들에게서 나오는 비판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교회 밖에서 당하는 핍박이나 억압을 이겨낼 수 있을까?’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 성도의 영적 상태의 책임이 하나님 앞에서 내게 주어졌다는 무게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앞에서 한없이 성도와 하나님께 죄송스럽고 미안한 이 쓰디쓴 죄책감을 어떻게 삼키며 살 수 있을까?’ ‘항상 제자리에 있고,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역을 바라볼 때, 그래서 크게 낙심하여 자신과 자신의 사역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 어떤 힘으로 이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성도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껴지거나, 너무 평범해서 무엇을 성취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목표로 두고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일종의 상실감, 방향을 잃은 것 같은 느낌, 생산적이지 않고,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밖에서 느낄만한 감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느낄 때가 있진 않습니까?
정말 이렇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직장에 가서 온종일 일하고 돌아오는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야 할까? 매일 아이들을 키우며 보내는 이 시간이 정말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될까? 사실 아주 잘 해내는 것도 아닌데…특히 대단한 간증을 들으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생깁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 같습니다.
나의 이런 삶도 정말 큰 의미가 있을까? 매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진정으로 구할 수 있을까? 내 삶을 통해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을 힘들게 살아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충전이 필요합니다. 무기력함을 떨쳐버리도록, 삶의 목표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우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의 진리를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콘퍼런스 기간에 묵상한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 위로를 얻었던 것을 통해 여러분에게 위로를 전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충전하여 새로운 힘으로 주어진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저는 이런 고민을 가지고 콘퍼런스를 참석하면서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삶이 무엇인지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충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충성에 대한 세 가지 교훈을 배웠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에서 30절까지 예수님이 하신 달란트 비유 이야기엔 어떤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타국에 갈 때 자기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깁니다(마 25:14). 그가 어떻게 자기 소유를 분배하여 맡겼을까요? 이 부분은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충성에 관한 첫 번째 교훈을 얻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대로 맡기신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주인은 각각 종의 재능대로 자기 소유를 맡겼습니다. 주인은 종이 감당할 수 없는 달란트를 주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종이 가진 재능을 잘 알았고, 그에 맞게 달란트를 분배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님의 교회에 가서 웅장한 건물과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나는 이런 사역을 하지 못하지? 하지만 존 맥아더 목사님의 교회에 제가 부임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규모의 사역과 사람들을 감당할 재능이 제게 없다면, 아마도 엄청난 책임의 무게에 압도되어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성도에게도 악재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크고 위대해 보이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삶의 결과물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재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인은 종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각각 얼만큼의 재능이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맡기지 않습니다. 두 달란트를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지 않고, 한 달란트만 맡기지도 않습니다. 정확한 양의 책임만 부과합니다.
이것은 충성스럽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비록 현재 내 삶에 주어진 기회들이 적고, 보잘것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나의 재능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나에게 현재 주어진 삶을 맡기셨다면, 그것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러니 맡긴 자들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인 것입니다(고전 4:2).
남들보다 별로 뚜렷한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느껴져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영역에서 많은 것을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을 보며 그렇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거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 각자의 삶에 각각 그 재능에 따라 합당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이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십니다. 내가 지금 감당할 만큼의 책임만 맡겨 주십니다. 혹 나중에 더 많은 것을 맡기실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맡은 것과 비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너무 잘 아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준 그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가지 더 배울 수 있는 충성에 관한 교훈이 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이상을 낼 수 없고,
하나님은 맡기신 것 이상을 찾지 않으신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마 25:16-19)
달란트를 받은 종은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받은 즉시 바로 나가 장사를 합니다. 그리고 각각 받은 것만큼의 달란트를 벌어들였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대로 묻어 두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두 달란트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왜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남길 수 없었을까요? 장사가 정말 잘 된다면 밑천을 훨씬 웃도는 이익을 얻을 수 있지 않나요?
현실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이야기로, 분명한 목적에 따라 구성되었습니다. 바로 “충성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말씀하셨고, 이는 충성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 이상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것 이상을 찾지 않으십니다.
이 중요한 사실은 매일 충성스럽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행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확히 얼마를 우리 삶에 맡기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과 섬기고 있는 영역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 그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결과는 그분이 맡기신 것만큼 주어질 것이고, 결산 역시 그분이 맡기신 것에 한하여 이뤄질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에게 열방의 구원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중국 선교를 부탁하신 것도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정의 필요를 돌보는 일, 아내와 자녀의 영적,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는 일, 아내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 친척과 친구, 주변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뭔가 대단해 보이는 것을 이룬 사람을 보며 좌절하지 마십시오. 평범한 일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게 현재 맡겨진 그 일에 충성하십시오. 당신은 결국 하나님이 맡기신 만큼만 낼 수 있고, 하나님은 맡기신 것만 찾으실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를 보고 계십니까? 아이를 하나님 안에서 잘 양육하는 것, 남편을 섬기며 가정을 잘 가꾸는 것, 하나님의 딸로서 다른 자매와 교제하고 그들을 격려하여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잘하도록 권면하는 것,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현재 맡겨진 당신의 일입니다. 자유롭고 잘 나가는 인생을 꿈꾸지 마시고 현재 주어진 일에 충성하십시오. 매일의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매일의 삶은 하나님은 맡기신 그 일에 충성할 소중한 기회입니다.
이 원리는 저에게도 적용됩니다. 유평교회가 성장하기 위해 뭔가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조직을 잘 짜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정체되고 쇠퇴할 수 있다는 불안감. 교회의 운명이 저의 결정에 달린 것 같은 착각.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는 내가 맡긴 것만큼만 열매 맺을 수 있고, 나는 너에게 맡긴 것만 찾을 것이다.
그러면 제가 할 일은 오직 충성하는 일입니다. 지금 주어진 일, 주어진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만큼 자라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제게 맡기신 만큼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시스템을 구축했는지, 얼마나 체계적으로 교회를 구성했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얼마나 숫자를 불렸는지, 사역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만 맡겨진 일에 얼마나 충성했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고, 저는 현재 주어진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인이 종을 찾아와 상을 주는 장면에서 세 번째 충성의 교훈을 발견합니다. 25절입니다.
3.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하고(마 25:20-23)
주인은 한 글자의 차이도 없이 두 충성스러운 종을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둘 다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그들에게 맡길 일이 더 많고 크기 때문입니다(“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보십시오. 주인은 맡긴 것 이상을 찾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가 두 달란트보다 주인에게 더 유익이 된다고 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이를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주인은 종에게, 다만 “충성”을 요구할 뿐입니다. 충성했다면 그걸로 주인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목적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삶의 목적은 많이 남기는 돈에 있는게 아니라 주인의 기쁨 아닙니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주인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주인의 즐거움을 우리가 즐거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갑니다.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맡은 일에 충성합니다. 몇 달란트가 내게 주어졌든지 주인의 기쁨이 된다면 그것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또 자주 이 분명한 목적을 잊고 내게 주어진 달란트의 양을 세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그것에 주인의 기쁨이 모두 달린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그것은 내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나의 충성을 기뻐합니다.
여기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세다가 실망한 종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십시오. 그는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췄던 자입니다(마 25:18).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이 종은 결코 주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종이 생각할 때 주인은 “굳은 사람” 혹은 “완악한” 사람입니다. 종에게 말도 안 되는 임무를 부과했다는 것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열매를 내놓으라고 하고, 헤치지도 않고 모아서 달라서 요구하는 불량배 같은 존재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금 한 달란트의 양이 그리 적지 않은 양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의 양에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를 맡기고 뭔가 요구하는 것은 불량배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맡겨진 것에 충성하기보다는, 맡겨진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은 자기의 재능에 딱 알맞게 주인이 맡겼다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맡기신 것만큼 찾으실 것이니 자신이 할 일은 다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는 다섯 달란트의 꿈에 부풀었을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자신에게 두 달란트는 맡겼어야 한다고 불평했을지도 모릅니다. 종으로서 자기 임무는 다 잊어버리고, 주인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지도 않고, 맡겨진 달란트를 땅에 묻은 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다가 결산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종을 딱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때로 우리의 모습에서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이 종의 씁쓸한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현재 내게 맡겨주신 것에 실망합니다. 아무리 노력한들 내가 남길 수 있는 달란트가 고작 한 달란트라면, 그것이 나에게 얼마만큼 성취감을 주겠는가? 그 정도 영향력을 가진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점점 마음을 사로잡으면 어느새 내 삶은 땅에 묻혀 버립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느새 삶은 주님을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이 되고, 현재 주어진 삶이 한심하여 불평이 나옵니다. 주님, 참 매정하고 사악한 분이십니다. 나에게 고작 이 정도를 맡겨놓고 충성을 요구하시다니요…정확히 이 종의 모습이 아닙니까?
주인은 종을 단단히 꾸짖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6-30)
주인은 그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부릅니다. 종의 핑계가 가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종이 말한 대로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완악한 불량배라 할지라도,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돈을 땅에 묻을 것이 아니라 취리하는 자들, 쉽게 말해 오늘날의 은행 같은 곳에 보관했다면, 원금뿐만 아니라 이자를 얻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적어도 그 정도의 노력은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주인이 완악한 불량배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 정도 충성을 해야 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할지라도 맡은 자에게 “충성”은 반드시 요구됩니다(고전 4:2).
충성하지 않는 것의 결과, 악하고 게으른 삶의 결과는 심각합니다. 그가 가진 것조차 빼앗기게 됩니다. 더 이상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주인을 위해 일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에게 주인은 아무것도 맡기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 주인에게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밖으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갑니다. 적은 것에 충성하지 못한 것의 결과는 이렇게 비참합니다. 충성,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맡은 것이 작든 크든 말입니다.
결론
존 맥아더 목사님은 마지막 설교 시간에 자신이 “살아있는 예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합당한 삶의 책임을 맡기십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알맞은 일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신 것만큼 열매 맺게 하시고, 주신 것만큼 찾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얼마를 더 주실지, 얼마큼 열매 맺게 하실지 알 수 없지만, 현재 내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며, 결국 그분 앞에서 우리는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주님이 주신 것으로 주님이 주신 힘으로 한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충성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모든 기회와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공중에서나 개인적으로나, 그리스도가 분부한 모든 것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평범한 우리 삶을 통해 각자 맡겨진 일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창세 전에 나를 택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시어 그 아들의 피로 나를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우린 그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사신이 되어 복음의 새 일꾼으로 고귀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입니까! 주님이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그 보배로운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즐거움을 위해, 정말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일에 오직 충성합시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삶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