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본문: 누가복음 22장 47절~53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이야기는 목요일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나서, 다락방을 빠져나와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예루살렘 성전 건너편 동산에 올라 제자들과 함께 자주 갔던 감람나무(올리브 나무) 동산, 겟세마네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곳이 오늘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눅 22:39).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잠시 거리를 두고 아버지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평온한 밤이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막 14:38).

아버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바닥에 엎드렸다가 벌떡 일어섰다가, 동산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2:42). 문자 그대로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채 아버지께 십자가를 넘어가게 해달라고 몇 시간이나 간구하셨습니다.

그만큼 죄가 조금도 없으셨던 예수님에게 있어 죄의 무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고, 아버지의 진노는 영원히 누렸던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랑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기 위해,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 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했습니다(눅 22:43).

한편, 예수님이 고뇌의 빠져 있을 때,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차례나 그들을 깨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깨어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돌아왔을 때, 그들은 어김없이 자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5-46).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말씀을 이어 받아 이렇게 시작합니다. 47절입니다.

47절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파는 자가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둘 중의 하나 가룟 유다였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의 최측근 가운데 하나였다는 비통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자, 수년간 동행하며 교제한 자, 그가 예수님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무리”를 끌고 앞장서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52절 말씀에 따르면 이 ‘무리’의 정체는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이 무리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니, 다른 복음서에 따르면 이들은 바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아랫사람들”(요 18:3), 조금 후에 만나게 될 대제사장의 종, 말고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눅 22:50; 요 18:10).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마칠 때 즈음 그 자리를 빠져나간 유다는 유대인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허락 아래 성전 경비대와 몇몇 대제사장, 장로 무리와 그들의 수하를 데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락방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 예수님과 자주 왔던 겟세마네에 마침내 이르렀을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몇 시간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유다는 예수님이 있는 곳을 찾아 무리를 이끌고 도착했습니다.

무리의 손에는 예수님을 결박할 때 사용할 검과 몽치(곤봉같은 몽둥이)가 들려있었고,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횃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요 18:3).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함께 온 무리와 작전을 짭니다. 예수님을 잡는 과정에서 열한 명의 제자들과 큰 소동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한 번에 포위하여 사로잡으려면, 교묘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마 26:48; 막 14:44).

그는 무리에게 이와 같이 작전을 설명합니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막 14:44)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존경과 사랑의 뜻을 담아 입을 맞춰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유다는 그 아름다운 행위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술책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작전에 따라 유다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고 “랍비여, 선생님이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아무렇지 않게 친절한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려 합니다(마 26:49; 막 14:45).

48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님은 유다의 의도를 모르셨을까요? 아니요,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더러운 계략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하시니

나를 음해하고 나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뒷말을 일삼는 원수 같은 사람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그 시커먼 속내를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의 손을 맞잡는 기분이 어떨까요? 그의 입에서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라고 나를 위하는 척하는 인사말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올 때 얼마나 그 말이 가식적이고 역겹게 느껴지겠습니까?

유다는 평범하면서도 친밀한 인사로 예수를 팔아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께 접근할 때 열한 제자는 위협을 느끼지 않았고 경계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밀한 인사였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여기 이 사람이 예수입니다! 당장 잡아가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스윈돌은 그렇게 함으로써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이 잡히신 것과 아무런 연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예수님이 체포되고 나서도, 핵심 제자들 속에서 계속해서 사기 행각을 벌일 수 있도록 교묘한 작전을 짰다고 말합니다(스윈돌, 607).

참으로 사악한 배신자가 아닙니까? 마태와 마가는 유다를 가리켜 유다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를 파는 자”라고 부릅니다(마 26:48; 막 14:44).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그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49절입니다.

49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하고 50절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조금은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48절까지는 예수님과 유다가 서로 입 맞추며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49절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칼을 빼내어 누군가를 치려고 하는 상황이고, 실제로 50절 말씀처럼 그 중 누군가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48절과 49절 사이에 뭔가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힌트가 49절 처음에 나옵니다. “그의 주위 사람들(열한 제자)이 그 된 일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제자들이 칼을 빼 들었을까요?

정확하게 일어난 사건을 알기 위해 우리는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6장 49절을 보면 유다가 예수님께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며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 50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친구여라니…예수님은 자기를 팔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할지 알고 계셨지만, 그것을 지금 하라고 허락하십니다. 그러자 그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이(유다와 함께한 무리들)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습니다”(마 26:50). 이것이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유다가 계획한 대로 자기를 팔아넘기도록 허락하셨고, 유다와 함께한 무리가 작전에 따라 달려들어 예수님을 잡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제자들이 칼을 빼 들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유다에게 그가 하려는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는가?”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는 분이라면, 혹은 예수님에 대해 많이 들어봤지만, 그분이 진정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검과 몽치, 횃불을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무서웠을 것이다.’ 

특히 마태는 유다가 끌고 온 무리가“큰 무리”였음을 강조합니다(마 26:47). 예수님에겐 열 한 명의 제자밖에 없습니다. 그중 대장 격인 베드로는 검술이 형편없어 회심의 일격을 날려도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적장의 목을 베야 하는데, 졸병의 귀를 벱니다(눅 22:50). 

게다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도 예수님이 잡혀 심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그 뜻에 순종하기로 하셨으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을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한숨을 푹 내쉬며 유다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자,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지 않습니까?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정확히 그 날밤 예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유다에게 “네가 하려고 한 그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는지, 어떤 태도로 말씀하셨는지 알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의 기록을 살펴봐야 합니다. 거기에 그 날밤 일어난 아주 특별한 장면,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장면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절을 보십시오.

3절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절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절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절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 말씀하시자 유다와 함께 따라온 큰 무리가 모두 물러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엄청난 권위와 능력이 있어 듣는 이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진 것입니다.

그들 눈앞에 있는 예수라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한 상태로 끌려가는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모두를 무릎 꿇게 만드는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내가 그니라”,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는 떨기나무 불꽃 안에서 모세에게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였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엄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무서워하거나 무기력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충만하셨고 그것이 유다를 포함한 모든 무리를 압도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상황이었지만, 모든 상황을 예수님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에게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하신 것은 힘없는 굴복이 아니라 엄위한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몰라서 잡힌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 결박당한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모든 상황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와 그 무리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허락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가 창세 전에 예비하신 많은 사람의 죄에 대한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기 위해, 심문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고, 부활하여, 자기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의지적으로, 즐겁게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한 신실한 사랑과 자기 사람을 향한 희생적인 사랑을 배신자의 손에 팔려가는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7절입니다.

7절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를 찾거든…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8절…”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나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내 제자들은 돌려보내라.’

왜 유다와 많은 무리가 결과적으로 예수님 한 사람만 잡아갔을까요? 그 핵심 추종자를 모두 잡아들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중 몇몇은 무기도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의 종을 다치게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놓아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제자들, 그중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은 권위 있는 말씀으로 나머지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조금 전 권세와 능력의 말씀으로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진 그들이 감히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유다와 무리에게 자기를 잡으라고 허락하셨고, 그때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았습니다(막 14:45-46).

이제 누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또 하나 발견합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포박하자, 제자들이 반격을 준비합니다. 칼을 들어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가 예수님께 “칼로 칠까요?”라고 묻는 동안, 언제나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 종의 귀를 쳐 떨어뜨렸습니다(눅 22:49-50).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요 18:10).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1절입니다.

51절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님의 사랑은 단지 자기와 함께했던 열한 명의 제자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를 잡으러 검과 몽치를 들고 서 있던 원수에게도 흘렀습니다. 예수님을 상하게 하려고 온 적이 상처 입었을 때 오히려 그 상함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 그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말씀이 아니라 본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도록 놔두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악한 일이지만, 그 악한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계획하신 최고의 선을 이루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한마디 말씀을 더 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 26:53-54)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버지께 구하면 로마 군단을 구성하는 한 군단이 보병만 약 6천인데, 열두 군단이면 몇 명이겠습니까? 7만 2천명이 넘는 천사가 바로 투입되어 상황 종료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됩니다. 온 천지 만물과 천군 천사를 그 말씀으로 창조한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상황을 뒤집지 않으십니다. 악한 자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 원하십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분명히 밝히신 계획, 그 뜻을 따르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참으로 신실하게 사랑하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죽기까지 따르기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마지막으로 잡히시면서 예수님은 잡으러 온 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2절입니다.

52절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절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한편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내가 날마다 성전에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그때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나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가, 몰래 내 제자를 이용하여 나를 배신하고, 마치 흉악범을 잡으러 온 것처럼 검과 몽치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 밤에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이냐?

너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하냐? 환한 대낮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하지 못하는 일을 컴컴한 어둠 가운데 몰래 하려는 너희가 흉악범이 아니냐?

동시에 예수님은 그들의 뜻에 따르기 원하십니다. 그들의 하려는 일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라. 어둠의 권세가 기세를 부리도록(우리말 성경), 내가 놔둘 것이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악하고 어두운 세력을 통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자기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비열한 입맞춤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맞습니다. 백성의 지지와 사랑을 빼앗긴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성전 경비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시기와 질투의 마음으로 잡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잡히신 참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희생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잡히시는 순간에도 권세와 위엄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신성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보호하고, 원수까지 고쳐주신 사랑의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악한 자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할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최고의 선을 이루시는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따르는 예수님의 순종하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괴로울 때, 악한 자들의 손에 고통당할 때, 원수를 마주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의심스러울 때, 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를 굳게 믿고, 아버지가 가져올 약속된 구원을 소망하며, 아버지 하나님과 내 이웃을 희생적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