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님께서 택하신 증인
본문: 사도행전 1장 12-26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열흘 동안 제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렸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며 기다렸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직접 선출하신 열두 사도 가운데 배신자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증인을 세웠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어떤 사람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배도의 길을 걷는지,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따르는지 그 이유를 깊이 헤아려보기 원한다. 주님이 밤새워 기도한 후 제자로 삼으신 가룟 유다는 왜 자기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을까? 나머지 열한 제자와 그들이 기도로 선출한 열두 번째 제자는 끝까지 배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 그리고 확신이 되는지 분명히 알게 되길 바란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며 그분을 증언하는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그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를 택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주님이라는 진리에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기를 원한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증인들(12-15a절)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지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맞이하셨고, 함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 천사들은 예수님께서 곧 제자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했고, 제자들은 장차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눅 24:52,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12절에 기록된 것처럼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왔는데, 감람원(감람나무 과수원, 숲)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웠다. 어느 정도 가까웠는가 하면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었다. 유대인들은 한 성읍의 길이에 해당하는 2,000 규빗을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로 봤는데(출 16:29; 민 35:5), 예수님이 승천하신 감람나무 숲에서 예루살렘 성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900-1200m 정도의 거리였을 것이다.
그들은 다락방에 올라갔다. 이 다락방은 제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장소였고, 규모가 큰, 아마도 부유한 사람의 집 2층이었을 것이다. 같은 장소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이런 방에서 가지셨고(눅 22:12), 제자들이 함께 모여있던 방에 두 차례 나타나기도 하셨다(눅 24:33, 36; 요 20:19, 26). 어쩌면 이 다락방은 나중에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된 사건,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나머지 제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일 수도 있다(행 12:12). 열흘 동안 제자들은 바로 이 장소에 머물렀다(유하는 다락방). 그러면 이 다락방에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누구였을까?
먼저 열한 사도이다. 13절에 기록된 명단처럼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레위)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 많은 사람이 사도들에 대하여 거의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숭배하거나 반대로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사람처럼 과소포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가지고 있는 성품과 능력이 완벽하여 사도의 권위를 갖고 예수님을 증언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 어머니를 통해 청탁했다. 빌립과 도마는 의심 죄, 마태의 전직은 세리였다. 셀롯(열심당) 시몬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해 폭동을 일으킬 만큼 열정적이었다. 모두 연약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예수님께서 그들을 밤새워 기도하심으로 증인으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그들을 교육하셨다. 유대인의 기본교육과정으로 회당에서 구약성경 전체를 배웠을 그들에게 예수님은 삼 년 이상 새로운 계시로 그분이 바로 구약성경의 증언에 따라 자기 백성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이심을 밝히 가르쳐주셨다. 결정적으로 주님은 부활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고 확신을 가지고 그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한 모든 것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14절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증인이 기록되어 있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아우들이다. 유대인 사회에서 별 볼 일 없게 여겨졌던 여인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열정적인 지지자였으나, 그분이 돌아가시고 묻히셨을 때 깊은 슬픔에 빠졌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만나 신실한 주님의 증인으로 섬길 수 있게 하셨다(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예수님의 어머니와 아우들 역시 초반엔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믿지 않았지만(막 3:21; 요 7:5),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신실한 증인으로 바꾸셨다(고전 15:7). 참고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아우들은 야고보(서), 요셉, 시몬, 유다(서)이고(마 13:55-56), 이름은 나와있지 않지만 누이들도 있다(마 13:56). 이 밖에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었다(15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신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모인 백이십 명의 제자들은 유대법에 따르면 공회를 가진 공동체를 세우기에 필요한 최소 인원수를 만족시킬 정도의 규모를 갖췄다.
누가복음 마지막 구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4:53). 그들은 또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14절). 연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함이 있던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 이후 합심하여 전심으로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계속해서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증인으로 택하셨고, 훈련하셨고, 부활의 능력으로 확신을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제자가 증인의 삶에 신실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중도 하차한 제자가 있었다. 배교자가 있었다.
2. 주님께서 버리신 증인(15b-20절)
배교자의 이름은 가룟(지역) 유다이다(16절). 그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잡아 죽일까 고민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마 26:14-16). 제자들과 함께 자주 가던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유다는 성전 문지기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그 동산까지 길 안내를 했다(눅 22:47-48).
그래서 다락방에 주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베드로는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렇게 유다에 대해 평가했다.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16절). 유다는 처음부터 배교자가 아니었다. 베드로가 한 말을 들어보라.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17절). 유다는 열두 사도 중 하나였다.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증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님의 택하심과 특별 교육을 모두 받은 자였다. 그리고 “이 직무”(디아코니아) 곧 예수님을 증언하는 봉사의 일을 함께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배교했을까?
첫째 그는 주님과 함께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돈궤를 맡았는데,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는 도둑이었다(요 12:6). 돈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주님을 미워하는 것은 사탄을 따르는 것인데, 결국 유다는 사탄이 넣어준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넘겨줬다. 돈을 주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눅 22:3-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둘 중 하나를 중히 여기면서 다른 하나를 가볍게 여기게 된다(눅 16:13).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사실 재물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이 와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과 인기, 하나님과 명예,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 하나님과 권력, 하나님과 개인의 행복, 하나님과 부유한 삶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 외에 섬기는 그것이 결국 배교자의 삶으로 당신을 인도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게 만들어 결국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히여기고 배교하게 만드는 데 아주 능숙하다. 손에 움켜쥐려 한 일시적인 것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을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런데 베드로는 유다가 배교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더욱 근본적인 이유이다.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6절). 성령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시편에 기록하신 뜻이 유다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유다의 배교는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뜻대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실수로 택하신 게 아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다윗의 시편은 시편 69편 25절 그리고 시편 109편 8절이다.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는 유다가 배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유다를 대체할 누군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 이전에도 메시아 시편으로 해석된 시가 있었고, 예수님도 잡히시던 날 밤 가룟 유다를 가리키며 시편 말씀을 사용하기도 하셨다(요 13:18; 17:12; 시 41:9). 그래서 시편을 통해 성령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시편 69:25 참고).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시 109:8 참고). 베드로는 70인 역 성경(구약성경 헬라어 번역본)을 사용했는데, 먼저 인용한 시편 69편 25절은 메시아를 거역하는 원수에 대한 심판의 말씀(“그들”→“그”), 그의 거주하는 곳을 황폐하게 해달라는 간구, 그곳에 아무도 살 수 없도록 해달라는 요청이 담긴 말씀이고, 나중에 인용한 시편 109편 8절은 그의 직분을 폐하고 다른 사람이 대체하게 해달라는 요구(명령)가 담겨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이 말씀은 가룟 유다에게 그대로 응했다.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유다는 예수님이 넘겨지고 나서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거부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대제사장들은 자살한 사람의 돈을 성전고에 보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 그 밭은 “피밭”이라 불렸다(마 27:3-10, 슥 11:12-13).
누가의 기록을 통해(18-19절, 베드로가 한 말은 아니다) 우리는 더 끔찍했던 유다의 종말을 알 수 있다(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 유다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시체가 부패하며 부풀고 무거워지면서 목맨 자리에서 떨어져 납작하게 되었고(곤두박질해) 그러면서 배가 터져 내장이 온통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시체, 끔찍한 죽음이 일어난 그곳을 결국 대제사장들이 유다가 예수님을 팔며 받은 불의의 삯, 은 삼십에 샀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이 알리어져, 밭의 이름이 피밭(아겔다마-아람어, 그들의 말로는)이라 불렸다. 성경 말씀 그대로 그는 황폐한 죽음을 맞이했고 그 장소는 묘지로서 아무도 머물지 않게 되었다. 성령 하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배교자 유다의 결말이 처참한 이유는 단지 육체적인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직무, 사도의 직무를 버려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이 더 안타깝고 충격적인 결말이다. 주님께서 택하신 증인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를 배반한 유다를, 돈과 주님을 함께 사랑하고, 돈을 위해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버리셨다.
가룟 유다의 유기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출한 열두 사도 중 하나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은 날로부터 승천하시는 날까지 모든 행적을 거의 대부분 맛본 자가 어떻게 유기될 수 있을까? 믿기 힘든 일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와 함께 있었던 자들이, 모든 은혜와 진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경험했던 이들이 자기의 유익과 만족, 욕구와 생각을 좇아 우리에게서 나간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는 것이다(요일 2:19).
그 길에서 서성이지 말라. 언저리에서 맴돌지 말고, 증인의 삶으로 깊이 들어오라. 주님과 함께 움켜쥔 모든 것을 버려라. 신실한 주님의 증인으로 주어진 인생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그리고, 주님이 택하신 증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실히 정립하라.
3. 주님께서 택하신 증인(21-26절)
베드로는 성령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다를 대체할 일꾼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고, 그에 합당한 조건으로 21-22절을 제시했다.
①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시점이다. 올려져 가신 날은 승천하신 날을 의미한다(액어법, A부터 Z까지). 우리 가운데 출입하셨다는 표현은 70역의 표현으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의 활동을 가리킨다(민 27:17,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신 31:2, 모세 120세 ‘출입하지 못하겠다…’).
②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그들 가운데 행하신 모든 활동, 가르침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사람(완전한 경험 요구), 열한 사도와 함께 다니던 제자 중 하나가 후보이다. ③ 그를 세우는 목적은 유다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으로 다른 열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25절을 보면 그는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이다.
왜 사도들은 열둘에 집착했나?
사도들은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확신을 가지고 기다렸다(천사의 메시지). 그래서 구약의 의로운 열두 지파의 대표처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열두 대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다(눅 22:28-30; 마 19:28).
사도는 다른 제자에 비해 특별한 권위를 갖는가?
그렇다. 하지만 사도의 권위는 직분이 주는 게 아니다. 그들의 메시지와 부르심에 있다. 그들이 전파할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증인으로서 증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어진 권위이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직접 택하셨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지만, 이후 야고보가 순교당했을 땐 새로운 사도를 세우지 않았다. 사도의 직무는 계승되지 않지만 신약성경을 통해 여전히 권위 있는 증언으로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끼친다.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은 조건에 부합하는 두 사람을 후보로 세웠는데, 하나는 바사바(안식일의 아들, 출생?), 다른 하나는 맛디아(맛다디아의 축약형, 하나님의 선물). 전승에 따르면 바사바는 뱀의 독을 삼키고도 살았다고 알려진다. 맛디아는 예수님이 훈련하신 70인의 제자 중 하나였으며 후에 에디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진다.
흥미롭게도 제자들은 둘 중 하나를 제비 뽑아 택하는 데, 나무나 돌, 동물 뼈, 화살 등에 각각 이름을 쓰고 한 그릇에 넣은 후 흔들면 먼저 나온 이름을 택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레 8:8; 대상 26:13; 스 2:63; 느 7:65, 구약시대 지파 분배). 아주 과학적인 방법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법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첫째, 그들은 사도와 증인, 봉사자로 합당한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했고, 둘째, 그들은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 기도했다. 제비는 그들이 뽑지만,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고 믿었다(잠 16:33). 결과적으로 맛디아를 얻었고 주님께서 택하신 사도로 믿어 나머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갔다.
주님이 택하신 열두 증인, 열두 사도, 열두 봉사자들은 유다처럼 낙오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끝까지 증인으로서 성실한 삶을 살았을까? 알려진 전통에 따르면 그들 삶의 결말은 가룟 유다에 비해 그리 나아 보이지 않는다. 안드레와 베드로는 십자가형으로 죽었고,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으며, 마태는 칼에 맞아서,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 죽었고, 나다나엘은 채찍에 맞아 죽었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요한은 끓는 물이 가득한 솥에 들어가는 고통 속에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밧모섬에서 죽을 때까지 유배되어 강제노역했다. 끝내 배교하지 않음.
오늘날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수고와 슬픔은 우리를 비껴가지 않는다. 세상의 비방과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요구하실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유다와 같이 배교하지 않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이 있다. 그분이 우리를 택하셨고 증인의 일을 다 하도록 하실 것이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들어 흘린 모든 눈물을 그분이 닦아 주시고 친히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 크고 영원한 보상이 되어주실 것이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없다. 내 삶을 곤두박질하게 만들 슬픔과 고통을 허락하신다면 끝까지 충성스러운 증인이 될 수 있을까? 주님께 실망한다면, 원망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아니면 유다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적당히 섞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살게되지 않을까? 혹시 나는 지금 점점 표류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봐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히 12:2). 그분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우리는 삶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 주님을 증언하는 일에 봉사하라고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다.
세상 끝날까지 모든 권세를 가진 그분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 고통, 슬픔, 유혹 모두 이기게 하실 것이다. 지금도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신다. 증인의 삶을 끝까지 완주하도록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직접 구하며 동참하실 것이다. 불신자여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라. 주님의 증인이여, 당신과 함께하시는 그분을 바라보라. 자신 없어도, 누가 뭐래도 당신은 주님께서 택하신 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