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인의 죄, 심판자의 심판

본문 : 시 53편

설교자 : 최종혁

 

성경에는 같은 내용이 반복해서 기록된 경우들이 있다. 그런 반복은 단순 반복이기보다 다른 관점에서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에 기록된 분열왕국의 역사도 그렇고,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도 그렇다. 우리는 그런 반복되는 기록을 통해서 해당 사건을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도 된다.  

시편 53편은 14편과 거의 유사하다. 두 시편을 나란히 놓고 자세히 관찰해보지 않으면 정말 같은 시를 두 번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실제로도 두 시편은 1) 53편의 5절에 해당되는 부분과 2) 14편에서 사용된 ‘여호와’가 53편에서는 모두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주 사소한 차이만 존재한다. 아마 다윗은 시편 14편을 먼저 기록하고 후에 특별한 상황에 맞게, 아마 이스라엘의 대적에게 승리한 후에 약간 수정하여 53편을 기록했던 것 같다. 그래서 53편은 14편에 비해 대적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심판의 메시지가 5절에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의 악과 그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오늘날 우리는 특정할 수 없는) 구체적 사건을 통해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그렇게 이 시편을 살펴보기 원한다. 먼저 죄인의 죄에 대해 1-4절에서 살펴보고 5-6절에서 심판자의 심판을 살펴보자. 이것이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 모두에게 격려와 경고가 될 것이다.  

I. 죄인의 (1-4절) 

1-4절의 말씀을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 봐도 “악인”이나 “죄인”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5-6절까지 범위를 확대해봐도 마찬가지다. 다윗은 단지 그런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칭하면서 그들의 악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 “어리석은 자”의 원어 발음은 ‘나발’이다. 흥미롭게도 시편 52편은 에돔사람 도엑과 관련된 시편이고, 54편은 십 사람과 관련된 시편이다. 도엑 사건은 사무엘상 22장에 나오고 십 사람과 관련된 기록은 23장과 26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인 25장에 나발과 관련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시편 53편의 배경을 사무엘상 25장으로 보기도 한다.   

사무엘상 25장에서 나발은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 소개가 되면서 그의 인성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그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다”(삼상 25:3). 실제로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이 그의 목자들을 보호해주고 약간의 호의를 요구한 것을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선이 악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삼상 25:21) 그를 치러 가게 되는데, 이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사람들이 그의 하인과 아내였다.   

그의 하인 중 한 사람은 나발의 어리석은 선택을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알렸는데, 그러면서 그는 나발에 대해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주인은 ‘벨리알의 아들’이라고 한 것인데,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급히 먹을 것들을 준비하고 다윗을 찾아가서 다윗의 마음을 돌린다. 그런데 그 때 아비가일도 남편인 나발에 대해 “불량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이름처럼 그가 “미련한 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다윗은 마음을 돌리고 나발을 치지 않는다. 하지만 열흘 후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셔서 나발은 죽게 된다. 어쩌면 다윗은 하나님이 없는 듯이 행했던 어리석은 사람 나발을 통해서 또 다른 나발들, 그리고 그들의 악과 그들의 종말을 생각해보면서 이 시편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 기록되었든 이 시편은 죄인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4절은 어리석은 자로 불리는 죄인들의 특징과 그들의 죄를 반복해서 언급한다. 이들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1절)고 하는 것이다.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입으로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입으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이런 마음의 선언은 충동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지적인 차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에 기초한 의지적인 결정과 결단이다. 하나님은 없으니 난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마음의 말은 삶에 중대한 차이를 만든다. 그 차이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부패하여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사실 성경의 이런 말씀은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큰 반감을 산다. 하나님 없어도 충분히 잘 살고 선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다. 또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특히 목사라는 사람들이 행하는 부패하고 가증한 일들은 그들의 말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성경에 이렇게 반응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잘 들어보자.  

 어리석은 자들은 부패하였다.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샘이 더러워진 것(잠 25:26),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된 것(렘 13:7) 등을 의미할 때 사용이 되었고, 특히 도덕적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만 하는 상태로 타락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창 6:12).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외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원하시는 시간에 원하시는 공간에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질서’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부패했다는 것은 그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일도 “가증한 악”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선과 악의 기준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있지, 우리의 합의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면 그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이라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2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이 원리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그 중에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찾으신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이기에 지각이 있는 자, 즉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찾는 자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리석다.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각기 물러섰다.”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셨다는 말이다. 등을 돌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함께 더러운 자들이 되었다. 1절에서 말한 부패했다는 말과 비슷한 의미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니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절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한 사람이거나 일부가 아니라 인간 모두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어리석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런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말했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는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동안 인류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많은 신비들을 밝혀냈다. 우리 조상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우리는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고 알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과거에 비해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와 평등이 균형을 이루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근본적인 우리의 문제이고 죄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제일 잘 알고,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그런 교만이 죄다. 우리가 해결 못하는 세상의 악은 그 근본적인 죄 문제가 겉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것 뿐이다.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것을 우리의 지혜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법에는 언제나 헛점이 있다. 제도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 악이 사라질 수는 없다. 

시 53:4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결국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찾지 않는 무지함은 우리가 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죄의 결과들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떡 먹듯이 먹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문화에 더 적합한 번역은 “밥 먹듯이” 일 것이다. 매 끼니 식사를 하듯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모두가 이런 악을 최선을 다해 행한다는 말은 아니다. 악의 모습들은 다르고 그 정도도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모두가 어떤 모습으로든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모두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돌보고 다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결국 사람은 끝에가서는 자기의 이익, 오늘날 사람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자신의 행복을 최우선에 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중심을 떠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은 다툼과 분쟁과 싸움이 된다. 그 모습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은 버리고 어떤 형태든 다른 영광을 추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하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내가 원하는 각자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원하는 질서는 어떤 면에서는 괜찮아 보일 수 있다. 그것이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하지만 최고 설계자의 설계를 벗어나서 세워진 건물은 겉보기 괜찮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짝퉁’은 겉보기에 그럴싸하고 그 나름의 장점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인 설계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나님 없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그러하다. 죄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악한 일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없다고 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빛이신 하나님, 선이신 하나님을 떠나 참된 빛과 선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죄인은 어리석은 자다. 지각이 없는 자다. 무지한 자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다 그런 죄인이다. 

 하지만 4절에서 한가지 희망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내 백성”이라는 표현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찾으신 사람들은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로 인해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들에게도 때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하실 뿐이다. 그리고 때로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신다. 

 

II. 심판자의 심판(5-6절) 

사실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이지 않은 이유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도 없고 심판자이신 하나님도 없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매순간 즉결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할 사람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여러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즐겨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때로는 그런 시간을 통해 의인들의 믿음이 자라갈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신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많은 이유들로 하나님은 즉결 심판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심판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신다. 여기서 다윗이 언급하고 있는 상황이 그런 상황이다. 

시 53:5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죄악을 행하던 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생각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로 두려워하게 하셨다. 그들의 뼈를 흩으셨다는 말은 그들을 멸하셔서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게 하셨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동안 대적들의 핍박을 당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대적이 수치를 당하게 하였다. 

 앞서 언급한 나발의 경우도 넓은 의미에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다윗과 싸웠던 골리앗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열왕기하와 역대하에 기록된 앗수르 왕 산헤립의 유다 침공 사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다. 당대의 강대국인 앗수르는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점령하고 유다에 올라와 항복할 것을 권했다. 그들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염려할 것이 없었다. 자신만만했다. 지금까지 어떤 나라의 어떤 신도 자신들을 막지 못했으니 유다도 마찬가지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유다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의지했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구했다. 결국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믿음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진영의 군사 18만 5천명이 하루 아침에 송장이 되어 전장에 뒹굴게 되었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성경에 이런 예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하시며 구원을 베푸신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이러한 분명한 역사의 기록, 그리고 성도들 각자의 경험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때 이유가 있는 것처럼 심판하실 때도 이유가 있다. 물론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것이지만, 최종적인 심판이 아닌 이 땅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심판들은 경고와 격려의 의미가 있다. 

 먼저 1-4절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던 어리석은 자, 즉 하나님이 없다는 자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보이는 심판은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다. 지금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안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마찬가지다. 지금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고 계시지 않으신다고 해서 죄를 묵인하시거나 영원히 침묵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이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거기에 더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한,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다양한 모습들이 우리에게 그 심각성을 더욱 일깨우고 있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자연 재해나 인재를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겠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런 재해를 통해서도 누군가를 심판하기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다. 누가 심판을 당했고 구원을 받았는지는 우리가 그것을 당장에 알 수는 없고 사실 알 필요도 없다. 누가 심판을 당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도 빌라도에게 해를 당한 사람,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의 실례를 통해서 하셨던 말씀은 그 일로 인해 경고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즉,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일을 볼 때, 혹은 우리의 역사에서 개인의 삶에서 이런 일들을 만날 때, 그 일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 온 내가 갑작스럽게 뜻밖의 일을 만나 하나님을 만나게 될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더라도 결국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날이 오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다면 하나님께 뭐라고 말하겠는가?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몇 가지 말도 안되는 핑계를 제시한다. 

 1) “진짜 하나님이 계신지 몰랐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성경을 통해, 믿는 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럼, 하나님은 무어라 말씀하실까? 그럼 뭐가 그렇게 중요했느냐고 하실 것이다. 네 영원한 삶을 결정하는 전능한 심판자보다 무엇이 더 중요했냐고 되물으실 것이다. 

 3) “하나님 생각할 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전 나름 착하게 살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교회는 잘 나갔어요”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말도 결국 어리석은 말도 안되는 핑계가 될 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직은 경고하실 때 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격려를 받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다윗도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제시한다. 

시 53:6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지금은 잠시의 평안과 잠시의 기쁨일 수 있다. 이 때가 지나면 또 다시 악이 득세하고 핍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살 때는 기쁨이 잠깐이고 고난만 계속된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히 반대다. 고난은 잠깐이고 영원한 기쁨이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도전 

마지막으로 이 시편의 메시지를 조금 더 확장해서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먼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자들은 이 말씀을 통해 경고만 받는데서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길 바란다. 사실 그것이 경고의 목적이다. 이 시편에서 다윗이 말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있는 사람은 다르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하고 계시다. 그러니 어리석게 되지 말고 지혜롭게 되어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자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다. 죄 사함을 주신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격려의 메시지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미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도 받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여전히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게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삶이 없다. 마음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듯이 사는 것만큼 모순적이 삶이 없다. 그렇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이 없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왔다면 교회는 훨씬 더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허무한 우상들과 바꾼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 가운데서 정말 영광스럽게 선포해왔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모든 교회를 우리가 다 변화시킬 수 없지만, 나 자신은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에 말하는 것이 삶에 중대한 차이를 가져왔다면,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우리의 마음도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와야 맞다. 이것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자, 구원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주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