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다

본문 : 디모데전서 6장 6-10절

설교자 : 이병권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엄마, 내일이 언제에요?” “내일? 내일은 하룻밤을 자고 나면 그날이 내일이란다.” 다음날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엄마에게 가서 말합니다. “엄마, 오늘이 내일이에요?” 그러자 엄마는 “오늘은 오늘이지, 내일은 아니란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은 영원히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이 말이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이 내일을 위해 살지만 마치 구름을 잡는 것처럼 내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게 되는 실수가 오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을 희생하면서, 현재의 시간을 놓치면서 단지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시간은 흐르고 또 흐르지만 언제까지나 내일은 우리에게 오지 않고 언제나 오늘만이 우리에게 반복됩니다. 그래서 잘못 생각하면 내일을 잊어버릴 수 있고 오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기억하고 오늘을 되찾아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기대할 뿐만 아니라 현재를 누리며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없이 반복되는 오늘 같지만,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의 연속인 것 같지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오늘과 내일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고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는 교훈을 우리가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오늘과 내일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되 내일을 무시하지 않고 내일을 보되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삶, 내일을 품고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삶의 태도는 무엇인지, 우리가 훈련해야 하는 인격적인 자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다시 경고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다른 교훈에 대한 경고를 살펴봤는데, 다른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열매와 그들이 그런 일을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들은 경건을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 그와 관련된 활동, 주님께 가치를 두는 삶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용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경고한 후에 오늘 본문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

바울은 5절에 언급했었던 “경건”과 “이익”이라는 단어를 또다시 언급하면서 경건과 이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경건을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경건이 이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그냥 이익이 아니라 큰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경건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그래! 맞다. 경건, 이익이 된다. 그것도 그냥 이익이 아니라 커다란 이익을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경건이 주는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 이것이 조건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스스로 만족함을 느낀다는 말인데,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충분함, 넉넉함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애매할 수 있는데 이어지는 말씀에서 자족이라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7-8)

자족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왜 자족해야 합니까?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출생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1:21)

솔로몬도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 5:15)

이 세상에서의 소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시작과 끝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알몸으로 와서 살다가 다시 알몸으로 갑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을 때 손에 힘을 주고 아무리 세게 붙잡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두고 갑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한 시골 마을에 부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부자는 가족 없이 혼자였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재산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하며 재산을 맡은 변호사에게 질문합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것을 두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다 두고 갑니다.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소유하는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날을 여행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을 나그네의 삶으로 생각한다면, 여행에서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 그 이상의 것을 가지면 안 되는 걸까요? 우리가 더 가지고 있는 것,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걸들 다 버려야 합니까? 우리에게 허락되는 최대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족을 위해 꼭 필요한 최소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족하기 위해서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직장이 아니더라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제차가 없어도 값비싼 고급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광고에 나오는 최신 스마트 폰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속에서 만족하는 것이 자족입니다. 그래서 자족은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삶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상황이 어떠하든지 자족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스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채워지면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는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오늘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족과 경건, 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경건이 내일을 바라보고 오늘을 인내하는 것이라면, 자족은 주님을 바라보고 오늘을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족 없이 내일을 위한 경건만 있다면 오늘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족이 있으면 내일을 기억하면서도 오늘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늘의 만족 없이 어떻게든 내일을 위해 버티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위해 경건을 추구하며 주님 안에서 오늘을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족과 경건이 함께할 때 우리는 오늘과 내일의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다르게 표현하면 “오늘을 위해 내일을 잊다입니다.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 내일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우리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9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우리와 대조되는 부하려 하는 자들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대조되는 오늘을 위해 내일을 잊은 자들입니다.

본문에서 묘사하는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과 올무와 욕심, 그리고 파멸과 멸망으로 빠져가는 모습니다. 그들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 때문에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대적이 설치해둔 덫에 걸립니다. 이 덫은 늪과 같습니다. 혼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발버둥을 칠수록 점점 더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렇게 계속 빠져들고 결국 파멸과 멸망이라는 밑바닥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부를 얻기 위해서 더 많은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욕심으로 부정직한 일을 행하고 여러 가지 시험에 넘어갑니다. 양심을 희생하며 잘못된 일을 합니다. 불의에 눈을 감고 타협합니다.

이러한 욕심은 또 다른 욕심을 낳고 욕심은 더 커지고 더 위험하게 됩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채울 수 없는 욕심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를 붙잡아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망으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고,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욕심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자신까지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돈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려는 강한 욕심, 다른 어떤 것보다도 돈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돈의 지배를 받을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없으면 안 됩니다. 돈을 잘 사용하면 얼마든지 귀한 일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위한 일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는 돈을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 모든 악의 근원이 됩니다. 내 삶에 악이 뿌리를 내리고 내 삶의 양분을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악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돈에 대한 탐욕을 버릴 수 있지만, 누군가는 돈을 사랑함으로 돈이 우상이 되어 믿음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자족이 아니라 탐욕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런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돈을 사랑하여 잘못된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돈을 사랑함으로 생기는 많은 근심들로 자신을 찌릅니다. 고통스러운 가시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물질을 추구하고 돈에 대한 탐욕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고통입니다. 돈은 사람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다스리려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돈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돈의 주인이 되어야지 돈이 나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지금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돈을 사랑하고 있지만 나 자신은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돈을 사랑하다니 말도 안 돼!’ 이렇게 말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나의 마음에는 돈을 사랑함이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돈은 중요하고 우리 마음을 쉽게 사로잡습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돈이 주는 유혹에 금방 넘어갈 수 있습니다. 돈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돈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돈이 주는 편리함, 돈이 주는 안락함, 돈이 주는 달콤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빠져들고 집착할 수 있습니다. 그 매력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돈에 대한 욕심을 경고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5:10)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파멸과 멸망에 이르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멈추시고 자족함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걸로 됐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단지 이 땅에서 더 얻으려고 더 부하기 위해서 돈을 사랑함으로 지금 여기에 모든 관심을 맞추고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을 살고 있지만 우리 삶의 목표는 이 땅이 아닙니다.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합리화하지 말고 자족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내일을 기대하며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애벌레처럼 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게 될 것입니다. 푸른 하늘을 날게 될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 나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일을 위해 경건으로 내 삶을 채우고 오늘을 자족하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