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권자 하나님 Part II
본문: 시편 33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33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주권자다.”라고 선포합니다(4~5절). 하나님은 절대적인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계시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절대 부패하지 않고 언제나 최고의 선을 위해서 일하시는 신뢰할 만한 주권자이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시는지 2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시다(4~12절)

이어지는 6~12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반항도 없었고 실패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보이셨습니다. 많은 천사들, 사람들이 목적을 갖고 계획을 세우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영원히 서고 그분의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각자 자신의 일을 합니다. 좋은 뜻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악한 뜻으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위대한 지휘자처럼 모든 것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욥 23: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잠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그래서 그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 복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자들이 정말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자라고 해서 우리 머릿속에 잔혹한 독재자를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은 항상 타락했기에 주권자에 대해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런 주권자가 아닙니다.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며 인자가 풍성한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는 인자한 주권자시다(13~19절)

공의(13~17절)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공의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공의를 행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도 본능적으로 공의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을 보면 뭔가 불공평한 일을 당하면 (대개는 자기가 어떤 불이익을 당할 때) 부당함에 대해서 말하고 공정하게 대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공의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완전히 공의로울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평을 원하지만 완전히 공의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의에 대한 기준도 제 각각입니다. 공의롭게 결정하고 판단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고 힘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그런 것들을 추구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그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지혜의 한계와 힘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힘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모든 지혜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아시고 왜 그런 일을 하는지도 아십니다. 어떤 강한 힘도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 무언가를 이뤄낼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13~14절)

13~15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을 마치 높은 곳에 앉아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처럼 묘사합니다. 혹은 높은 곳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하는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종종 ‘하늘’이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인 장소인 하늘, 혹은 우주 어딘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우리처럼 물리적인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편재하셔서 어느 곳에나 동일하게 존재하십니다. 다만 이런 표현들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이 우리와는 다르고 높은 분이심을 강조하는 표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하나님이 그저 하늘에서 군림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여기 말씀들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라는 점입니다.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우리를 살펴보신다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실 확인’입니다. 그래서 재판에서는 증거와 증인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황상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도 때로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그렇다고 판결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들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이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들을 보고 계십니다. 13~15절은 반복해서 “모든”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모든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하늘에 거하시지만 이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계십니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15절)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신 이로서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

“굽어 살피시는 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이해하시는 이’, ‘분별하시는 이’입니다. 그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보고 이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해서 서로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의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의 마음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의 마음을 지으셨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실수로 잘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해보라고 하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의도나 설계를 통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다 실수로 사람을 만드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으로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설계와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사람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보이지 않은 마음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은 종종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러나게 하는 일이든, 숨어서 하는 일이든 모두 아십니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나 같은 사람까지 신경 쓰실까 싶겠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보고 계십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만드신 분으로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의 동기를 다 이해하고 알고 계십니다. 재판으로 말하면 모든 증거를 다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공의와 정의로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실제로 그렇게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 하나, 생각 하나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마다 즉각 공의를 나타내시고 심판하신다면 우리 중 누구도 지금처럼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그 인자하심이 세상에 가득할 정도로 넘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구원(18~19절)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19절)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그들”은 누구일까요? 힘 있는 자들? 재물이 많은 자들? 명성이 있는 자들? 권위 있는 자들? 모든 “있는” 자들일까요? 16~17절은 뭐가 있다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16~17절)

이 말씀은 군대가 많고 용사가 힘이 세면 전쟁에서 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이”라는 말이 중간에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구원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힘이 있고 지혜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주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1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18절)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무자비하고 포악한 왕이 아님을 또한 알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가 나타나기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십니다. 성경에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 출애굽 사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등 수없이 많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그들 편에 계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장 극적인 예는 하나님께서 차별없이 믿는 자들을 사망에서 건져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찾는 자를 어떤 차별도 없이 구원하십니다. 나이나 성별은 관련 없습니다. 인종도 상관없습니다. 돈의 유무, 지위 고하도 관계없습니다. 무엇이 있고 없고가 하나님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앞에 낮아져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 왕이심을 알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다른 이유를 들어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너 같은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않다. 좀 더 준비해서 와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에게 오라. 내가 너를 변화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차별 없이 그 인자하심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이 시편에서 언급한 하나님을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주권자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별없이 구원하시는 주권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3, 20~22절)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할까요?

하나님을 바라라(20절)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20절)

가장 첫 번째 반응은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는 것, 즉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관자이신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도움과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을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태양이 힘 있게 비추는데 촛불을 켜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면 됩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라(21절)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21절)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분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실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서술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에 대해 먼저 말했습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1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마땅한 것은 슬픔과 분노가 아니라 기쁨과 찬송입니다. 2~3절을 보면 어떻게 그런 기쁨을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2절)

악기를 가지고 더 즐겁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현악기만 언급 되었지만 꼭 이것들만 가지고 찬송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악기를 가지고 즐겁게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말입니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3절)

이 말씀이 언제나 처음 불러보는 노래로 찬양하라는 의미가 아닌 것은 자명합니다. 시편 자체도 이스라엘의 찬양집으로서 반복해서 불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에 새로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것이 쉽게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것에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노래들이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지만 조금씩 다른 측면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이 조금은 다른 감정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같은 찬양도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새롭게 들리기도 하고 새롭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속해서 경험하며 그 때 그 때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마치 마음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해서 그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노래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기쁨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아름답게 연주하라는 말은 연주를 엉망으로 하지 말고 잘 하라는 것입니다. 악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즐거운 목소리로도 찬양해야 합니다. 1~3절의 말씀은 어떻게 찬양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말 기쁘게 마음을 다해 찬양하라는 명령입니다. 큰 소리로, 악기를 동원해서, 새로운 마음으로 그 기쁨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인자하신 주권자이심을 알고 경험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22절)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절)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소망 가운데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때론 아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힘 세고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자기가 하려고 하는데 안 될 때, 옆에서 도와주려고 하면 “아니에요. 아빠 오실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빠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아빠가 와서 지금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때로 그런 아이들의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인자하신 주권자시기 때문이며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그분이 주십니다.

도전

성경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늘에 계셔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분이십니까? 나 같은 사람 하나를 돌보시기에는 너무 바쁘신 분? 혹은 돌보려고 하는데 그럴만한 힘이 없는 분? 악을 그냥 용납하시는 분? 판결을 굽게 하는 분?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시 가끔씩 하나님을 그런 분처럼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삶에 대한 불안과 염려는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더라도 신뢰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많은 것도 그렇습니다. 분노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혹 내 삶에 그런 모습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로 나의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주권자십니다. 그를 경외하고 그분의 인자하심을 구하는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라면 누구나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들을 보내셔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증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도 기록했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가 그 아들의 모습을 닮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고 우리가 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권자로서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이런 하나님을 기억하기에 좋은 시즌입니다. 귀여운 아이들의 재롱을 보는 것도 즐겁고, 크리스마스라는 따뜻한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주권자 하나님이시고 그 중심에는 주권자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가 계심을 놓치지 마십시오.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삶에서 주권자로서 역사하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