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할 일이 전혀 없다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날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죄와의 싸움은 최종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참 지루하고 때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하는 법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패배했을 때 다시 일어나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회개가 바로 그 방법이다.
죄인이 죄를 지을 때 –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죄를 범한다. 자기가 만든 세상의 왕이되어 하나님보다 자신의 뜻이 세워지기를 원하며 그렇게 행동한다.
죄인이 회개할 때 – 죄인이 회개할 때는 그가 왕이 되어 부정했던 하나님의 기준들을 인정한다. 죄를 죄로서 인정하고 그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 즉 자백이다.
회개는 이렇게 자신을 바르게 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 하나님께 온전한 죄 문제의 해결과 온전한 회복이 있다.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은 하나님께 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내가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종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죄를 사하셔야지만 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그래서 죄인은 긍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를 구한다. 나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며 나아가는 것이다. 죄인이 회개할 때, 죄인이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하지만 시편 51편에서 다윗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죄 문제만 해결된 상태를 다윗은 원하지 않는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온전한 회복이다.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이다. 사실 이것이 모든 죄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죄 문제의 해결은 사실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을 원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51편 1-9절에서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 즉 긍휼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고 이제 10절부터는 그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을 구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구해야할 온전한 회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자.
I. 죄로부터의 온전한 회개를 구함(1-9절)
II.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을 구함(10-19절)
‘회복’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먼저 13절부터의 말씀을 통해 다윗이 돌아가고자 하는 이전의 상태, 회복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온전한 회복(13-19절)
“그리하면”(13절)은 앞선 말씀, 특히 10-12절의 회복에 대한 간구를 통해 다윗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에 대하여 이제부터 말할 것임을 의미한다.
다윗이 바라는 것은 한마디로 온전한 예배의 회복이다. 삶의 일부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목적(창조, 구원)으로서의 예배다. 성경은 인간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즉 ‘예배’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은 온전한 예배로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아름다운 꽃, 웅장한 산과 바다, 놀라운 질서를 보여주는 우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놀라우신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알면서 그분을 예배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은 곧 예배의 회복으로 드러난다.
다윗은 온전히 회복된 예배에서 개인적인 측면과 공동체적인 측면을 모두 생각하고 있다. 다윗의 시선은 개인의 외적인 예배에서 내적인 예배로 옮겨가고 거기서 다시 공동체의 온전한 예배로 향한다.
4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 전도의 예배(13절), 찬송의 예배(14-15절), 마음의 예배(16-17절), 그리고 중보의 예배(18-19절)
전도의 예배(13절)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13절)
다윗은 범죄자, 즉 자신과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것을 말한다. 다윗이 가르칠 하나님의 길은 무엇일까? 그가 자신의 죄와 회개의 과정에서 배운 하나님의 길일 것이다.
- 하나님을 대항하여 마음을 높이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함을 가르칠 것이다.
- 자신의 죄를 숨기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칠 것이다.
- 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가르칠 것이다.
- 긍휼의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칠 것이다.
- 결국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가르칠 것이다.
가르침의 목적은 단순히 그런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다. 죄인들이 실제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이 가르침은 복음 전도다. 올바른 회개가 예배할 수 없는 자들, 예배하지 못하던 자들을 예배할 수 있게 한다. 한번도 하나님께 나온 적이 없는 자든, 잠시 하나님을 떠난 자든, 누구든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자들은 다윗의 이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시편 51편은 다윗의 이런 바람은 이루어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회개했다. 다윗의 범죄와 진정한 회개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 것이다.
찬송의 예배(14-15절)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죄를 “피 흘린 죄”라고 표현하며 구원의 하나님께서 구해주셔야만 함을 언급한다. 앞에서와 같이 긍휼의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이지만 그 죄의 심각성을 좀 더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피 흘린 죄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의 피 흘림, 즉 죽음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아니면 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면 다윗은 그 혀로, 그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입을 열어주셔야 한다.
특별히 다윗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용서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결과지만, 로마서에서 바울이 밝히는 것처럼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 1:17).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8절에 나오는 다윗의 표현에 따르면 뼈들까지도 즐거워할 기쁜 소리가 바로 용서의 소리,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그 소리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긍휼도 필요하지 않다. 애초에 하나님도 의롭지 않다면 죄인도 굳이 의로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둘 사이의 적당한 타협과 상호 간의 화해가 필요할 것이다. 죄인이라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교통사고가 났을 때 서로 합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 긍휼이라는 것을 베푸시더라도 그 긍휼은 의로우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긍휼과는 다르다.
그래서 용서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의를 높이 찬양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나의 죄악됨을 상기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게 한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베푸신 온전한 하나님의 긍휼,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게 한다. 상호 간의 합의나 화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분노를 누그러뜨리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의 입술을 여셨기에 주를 찬송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했다.
마음의 예배(16-17절)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서 다윗은 가장 직접적인 예배를 언급한다.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다. 다윗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예배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자신도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는 그런 예배다. 하지만 제사가 어떤 마술적인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제사만 드리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어야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겉으로 보여지는 그런 예배 전에 그가 드려야할 마음의 예배가 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의 제사를 먼저 원하신다.
그런데 이 마음의 제사는 더 특별하고 한편 고통스럽다. (앨런 로스의 표현에 따르면) 제사에 드려지는 짐승은 온전한 것이어야 했지만, 마음의 제사에 드려지는 마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 상한 것, 즉 깨어진 것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릴 때 흠이 없는 짐승을 가져와서 흠을 내어 하나님께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의 제사를 드릴 때는 그 마음을 찢어 깨진 마음을 가져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온전하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했던 것이다.
마음을 찢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져야 한다. 자신이 한 때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쳐야 한다. 그 상황이 되면 난 또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할거야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그런 선택을 하려는 나를 쳐서라도 복종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이 범죄 했다면 눈을 빼버리는 것이고 손이 범죄했다면 그 손을 잘라서라도 그 죄를 막고 싶은 마음이 지금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낮아진 마음, 순종하는 마음, 회개하는 마음, 진실한 마음, 그런 제사를, 마음의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멸시하지 않으신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다윗은 지금 이 시편을 기록했을 것이고, 또한 그런 마음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기 원했다.
중보의 예배(18-19절)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왕인 다윗의 죄는 그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주변, 더 나아가 그의 나라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다윗은 백성들의 온전한 예배가 회복되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나타내셔서 시온,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시고 그들을 다시 굳게 세우셔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드리는 아름다운 예배가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물론 다윗 자신도 그 중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평안한 가운데 즐겁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다윗이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윗이 구하는 온전한 회복의 모습을 정리하면 이렇다.
- 다윗은 회개가 필요한 죄인들에게 회개의 길을 가르치길 원한다.
- 다윗은 그의 입술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송하기 원한다.
- 다윗은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한다.
- 다윗은 그와 온 백성이 함께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
이런 완전한 회복으로 가는 핵심은 이전과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빌 때 우리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다시는 안그럴거지? 절대 다시 그러면 안돼. 그땐 용서 안할거야.”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나 용서 하는 사람이나 변화를 원한다.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전과 같으면 이전과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하나님께로의 완전한 회복, 즉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다윗도 그래서 죄 용서만 구한 것이 아니라 이런 ‘다름’을 구한다. 변화를 구한다.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10-12절)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소서”(10절)
다윗이 구하는 변화는 약간의 변화가 아니라 대대적인 변화다.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극적인 변화다. 기적적인 변화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능력,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구한다.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필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윗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미 언급했다. 그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다. 이 속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될 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스펄전, “이게 무슨 일인가! 죄가 얼마나 우리를 망가뜨렸으면 창조주가 다시 소환되어야 하는가! 악이 인류에 가져온 파멸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겉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텅 비어있다. 황폐하고 공허하다. 주여 오셔서 나의 옛자아에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보이소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주님이시오니, 이제 내 안에 새로운 사람을 만드소서!”
이 변화는 일차적으로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마음에 대한 것이다. 타락한 마음이 아니라 정한 마음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정직한, 즉 올곧은 마음, 견고한 마음이 필요하다. 다윗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죄는 어떤 모습으로든 그를 계속해서 무너뜨릴 것이다. 마음이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이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윗은 온전한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이 기적을 구하는 것이다.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11절)
다윗의 회복을 위한 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기를 구한다. 아마 그는 사울의 경우를 생각했을 것이다. 사울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결국 사울을 버리셨고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를 통해 일하지도 않으셨다. 그런 사울의 삶은 비참했다.
다윗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그 마음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원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쓰임 받기를 원했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계속해서 거해야했고 다윗은 그것을 구하는 것이다.
“구원의 즐거움”, “자원하는 심령”(12절)
새로운 마음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다윗이 어쩔 수 없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참된 즐거움이 거기에 있었고 그는 계속해서 진심으로 그것을 자원하기를 원했다.
그가 죄를 범했을 때 구원의 즐거움을 잃었다.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참된 즐거움을 잃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문제는 무엇을 즐거워하느냐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고 그것을 명하시는 이유는 그 안에 참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죄다. 보이스는 이런 면에서 좋은 지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즐거움과 행복은 죄를 통해서 오고, 경건은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정반대다. 죄는 슬픔을 가져오고 의가 기쁨을 가져온다. 죄가 계속되면 그것은 우리 삶의 모든 좋은 것들, 기쁨, 건강, 부, 결국은 생명 자체를 빼앗아 갈 것이다. 오직 의가 그 모든 것들을 회복할 수 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참된 즐거움에 대한 오해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과거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마치 마약에 중독되어 헛된 즐거움을 찾는 사람처럼, 정말 참된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런 죄의 유혹과 내가 정말 원하는 것 사이에서 계속되는 싸움을 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일이 우리에가 많다.
그래서 다윗도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 안에 계속해서 거하기를,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가기를 구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자신을 붙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다윗이 10절에서 드린 기도의 연장이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기적적인 변화를 일으키셔야만 된다. 그런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이 가능하지 않다. 죄로부터의 온전한 회개가 긍휼하신 하나님께 달려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도 바로 그 능력의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러니 하나님께 구할 수 밖에 없다.
사실 10절의 기도는 다윗 뿐 아니라 다른 구약의 성도들도 간절히 바랬던 기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언약의 백성들에게 바로 그 기적을 약속하셨다.
겔 36:26-27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지금 우리는 다윗보다 더 굳은 확신 가운데 이런 회복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우리 안에 이미 함께 하시며 절대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희생에 기초하여, 그리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다. 죄로 인해 잃어버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계속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참된 예배를, 우리의 입을 열어, 우리의 깨어진 마음으로, 다른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도전
시편 51편에서 우리는 다윗의 회개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와 회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방탕한 생활을 끝내고 아버지께로 돌아갔던 탕자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면서 본래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종과 같은 신분으로 살더라도 지금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비유이긴 하지만 현실이라고 가정해보면, 그것이 정말 그 아들이 최종적으로 원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아들이 정말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갔던 것이라면 그는 이런 방탕한 삶 이전의 아버자와 아들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했던 일들, 그가 지금 처해있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버지의 종으로라도 사는게 낫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였고 그가 돌아오기만 하면 잔치를 베풀며 맞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용서 뿐 아니라 온전한 회복을 위한 준비가 아버지는 이미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그렇게 맞아주었고 회복시켰다.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그로 인해 기쁨을 함께 누린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죄 용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정말 원하는 것은 죄 용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죄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이유는 단순히 죄의 나쁜 결과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로의 온전한 회복을 구해야 한다.
아직 구원 받지 않은 자에게는 당연히 이런 회개와 회복이 필요하다. 그런데 구원 받은 자도 죄를 범했다면 이런 회개가 필요하고 이런 회복이 필요하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어 놓지는 않지만 멀어지게는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시편에서 종종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에게서 은혜를 완전히 거두신 것처럼, 관계를 끊으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그대로지만 구원의 즐거움은 상실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여전하지만 관계의 친밀함은 누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회복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셔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길을 이루어 놓으셨다. 우리의 책임은 깨어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 진실된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신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의 참된 기쁨이 있다. 우리의 예배에 이런 깨어진 마음이 드리는 넘치는 즐거움의 찬양이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