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좁은 길에서 드리는 기도 Part II
본문 : 시편 25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 25편은 히브리어의 abc에 해당하는 문자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답관체 시입니다. 3행시를 지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글자의 순서에 맞추어 글을 쓰다보면 주제를 일치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시편에도 그러한 어려움이 부분적으로 나타납니다. 지난 시간에는 좁은 길, 고난의 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시편 중에 고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시편은 총 15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왜 실제 시편에는 이러한 고난에 대한 시가 많을까요?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편은 다윗의 시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고난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지요. 오랜 세월 도망자로 살았고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뒤에도 대적들로 인해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했고 자신이 믿는 신앙 때문에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랬기에 이러한 시편을 많이 썼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25편에서는 고난 중에 우리가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당하는 고난도 있고 자신의 죄 때문에 경험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 고난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죄책감과 외로움, 괴로움 등입니다. 이것은 다윗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고난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실까요?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사람처럼, 문제를 스스로 다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되기도 하고 다른 이를 찾아가서 맘껏 하소연을 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25편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이여” 그리고 그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구하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인도하심’, ‘죄용서’, ‘보호하심’입니다.
구원(2~3, 17, 20, 22절)
다윗은 먼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2-3),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17),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20),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속량하소서”(22).
“구원”은 성경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 구원은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충분히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이기적인 기도는 아닙니다. ‘고난이 우리 삶에 필요한가?’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우리가 항상 고난을 추구하고 고난 가운데 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 자체를 원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의미 역시 아닙니다.
성경에서 고난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고 믿음이 자라게 합니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났을 때 그들의 믿음이 어디 있는지, 고난은 그들의 믿음의 성숙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욱 찾게 하고 의지할 수 있게 합니다. 또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때론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이가 어려움 당하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항상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싫어하는 것을 절대 주지 않지는 않습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들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아이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먹기 싫어하는 음식도 먹으라고 합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 잘못을 하면 때려서라도 그것이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정말 싫어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잘못을 깨닫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영광 돌리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고난 자체를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 있을 때, 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꼭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가 자주 잊는 것입니다.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인도(4~5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4-5).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이 시편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다윗의 다른 고난의 시를 보면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호소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은 조금 특별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8-10),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12-14). 다윗은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뜻을 보여주시는지 언약을 나타내시는 지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기본적으로 힘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힘든 것을 통과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나 유익을 바라보며 힘든 것을 참는 것이지 힘든 것 자체를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생각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에 중심에 근본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서 올바르게 드러나시고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감정적이 되기 쉽고,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여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투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 뜻에 따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의 예를 수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예는 사도 바울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바울에게 고난이 있었습니다. 벗어나고 싶은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족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오히려 그 고난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난 중에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 우선순위는 자신의 평안함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더욱 드러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지금의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언제나 옳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도 시련 중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2-8).
시험 중에 있을 때 감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바라봤던 사람은 성경에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감동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고난에 공감하고 어려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난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는지 배워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큰 일을 앞두고 우리는 그런 기도를 자주 합니다. 그런데 삶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어려움 중에서도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위해 차에 뛰어들 수는 있는데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는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큰 일뿐만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작은 일들, 사소한 일들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다면 용서할 수 있도록, 회개할 수 없다면 회개할 수 있도록, 내가 참을 수 없다면 참을 수 있도록, 고난 중에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일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이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내 삶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도를 구해야 합니다.
자백(7, 11, 18절)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7),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11),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18). 죄에 대한 자백은 전체 내용에서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내가 어떤 자인지 안다면 죄에 대한 고백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음을 알면서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죄를 범했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죄를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죄가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됐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경우가 있고, 죄를 인정하지만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는 경우, 다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회개보다 죄에 대해 변명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경우는 죄책감에 빠져서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와 같은 잘못의 대표적인 예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지적했을 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 변명했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아담은 하와에게 핑계를 댔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죄책을 떠넘겼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변명이 회개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도 동일했습니다. 사울은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변명하며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죄가 명백해진 상황에서도 그는 “부득이하게” 그렇게 했다고 하고 “백성을 두려워해서” 그렇게 했다고 변명합니다. 우리도 죄에 대해서 비슷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잘못에 대해 지적하면 뻔한 변명을 하는 것을 보며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죄책감에 빠져서 회개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를 담당하셨어도 내 죄는 담당하지 않으신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가 너무 커서, 너무 많아서, 너무 반복되어서 주님께 가져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교만한 생각이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너무 작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올 때 하나님은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시는 것을 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교만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죄책감과 자책에 빠지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고난 자체가 죄로 인한 결과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저 ‘죄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어차피 용서하시니까 죄는 마음껏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 비통해 하며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서 죄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옵니다. 그의 고난이 죄의 문제와 연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보호(15~16, 19~21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15-16),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19-21). 두려움, 외로움, 근심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은 누군가 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구합니다. 함께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다윗의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손 내밀고 계십니다. 때론 그 손에 회초리를 들고 계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 다른 데를 보시거나 떠나시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이 여기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더 귀 기울이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호의를 베푸셔서 환난에서 벗어나기를 혹은 그 안에서 보호 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의 편보다는 원수가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원수들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면 그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구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기다립니다(“내가 주를 바라오니”, 21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20절). 그것을 구하며 다윗은 동시에 확신합니다(3절). 기도에 있어서 그런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누가 그런 확신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지를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다윗이 좁은 길에서 드린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가끔 우리는 ‘기도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조금은 무기력함 가운데 말할 때도 있는데,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볼 것 다해보고 안되면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전혀 없어서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좁은 길을 걸으며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본다”(15)고 말합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17). 좁은 길에서는 항상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폭풍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바람과 거센 파도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눈은 항상 여호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죄가 문제라면 자백하십시오. 두렵고 떨린다면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십시오. 외롭고 괴롭다면 하나님의 동행을 구하십시오. 그 상황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 있는 그분의 뜻을 알기를 구하십시오. 그 때 우리가 하나님을 드러내며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