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Part 1
본문 : 시편 69편
설교자 : 최종혁
착하게 사는게 쉽지 않다.여기에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그보다도 힘든 일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착한 것 이상으로 살아야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다를게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른빰을 맞고 가만히만 있어도 세상에서는 성인군자라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왼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셨다.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오리를 같이 가면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십 리를 동행하라고 하셨다. 속옷을 원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은 아버지 하나님과 같은 의로움과 사랑이었다.
또 그러면서 세상의 기준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에 더 힘들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원하는 모습도 있고 그렇지 않은 모습도 있는 것이다. 사회 봉사나 구제, 자선과 같은 것은 세상도 원하는 것이지만, 동성애나 낙태를 반대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사랑은 원하지만 진리는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도 정확히 이런 경험을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먹을 것을 주셨을 때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찾아다녔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않았고 말씀을 듣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예수님을 떠나갔다. 예수님 당시의 세상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5:18-19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그렇게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를수록, 예수님을 닮을수록 더 그러할 것은 자명하다. 우리가 세상을 미워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해서 사랑과 진리로 그들을 대할 때, 세상은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더 분명히 알게 되고 따라서 그들 중 하나가 아닌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예수님 이후의 성도들만 경험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시편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최근의 예레미야 말씀을 통해 익히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정상이다.
시편 69편은 정확히 이런 경험을 기록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으로 인해 고난을 받으며 이 시편을 기록했다. 사적인 경험이지만, 다윗은 이 고난을 사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6절의 기도를 보면 자기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다른 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를 구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경험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시편도 68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한다. 68편은 축제로 들뜬 분위기에서 그렇게 했다면 69편의 분위기는 정반대로 무겁게 가라 앉아 있는 상황에서 다윗은 탄식하고 간구하면서 결국 찬양과 기대로 나아간다. 의로운 동기로 행한 의로운 일이 결국 삶의 고난으로 돌아올 때, 다윗은 탄식했고 간구했고 그리고 찬양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을 함께 살펴보자.
탄식(1-12절)
다윗은 마치 물에 빠져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다급하게 외쳤던 것처럼(마 14:30),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시를 시작한다. 상황도 비슷하다.
시 69:1-2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깊은 수렁에 빠졌다는 표현 때문에 저자를 예레미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표제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의 시가 아니라고 주장할만한 근거는 없다. 우리는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시 18:4,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40:2,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다윗은 실제로 물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깊은 물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상황이 절박함을 표현한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것 밖에 없다. 베드로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다윗도 그렇게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윗을 구할 수 있는 구조요원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다윗은 하나님께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다. 한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했다는 것을 3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시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다윗은 피곤할 정도로 소리를 질렀고 너무 소리를 질러서 목이 말라버릴 정도였다. 구원해 줄 하나님을 너무 오랫동안 쳐다봐서 눈도 아플지경이다.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자면 눈이 빠지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정말 물에 빠져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다. 그래서 함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들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만큼 물에 빠진 사람은 절박하다. 다윗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살다보면 우리는 그런 상황들을 한두번씩, 혹은 자주 마주하게 된다.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게 된다. 자연 재해나 개인의 질병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다. 여러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특정하고 있는 상황은 그런 것이 아니다. 4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는 이유를 말한다.
시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다윗은 “까닭 없이”, “부당하게”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 쪽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 그저 그를 미워하는 자가 머리털보다도 많고, 또 그의 원수가 되어 그를 끊으려고 하는 자, 즉 그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가 강하다는 것이 문제다. 수적으로도 많고 힘도 강하다. 다윗이 그들의 공격을 ‘큰 물’로 느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다윗이 느끼기에 거대한 홍수, 강한 파도와 같았다.
다윗은 빼앗지도 않은 것을 물어주어야 하는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것을 꼭 다윗의 대적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훔쳤다고 누명을 씌운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표현은 단순히 하지도 않은 일, 하지도 않은 말에 대해서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혹은 실제 사실에 대한 왜곡된 오해가 있음을 말한다.
쉽게 말해 다윗은 잘못한게 없다. 그의 대적들이 비난하면서 그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이런 상황에 대한 죄책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과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구원을 구한다.
물론 자신이 모든 일에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시 69:5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상황은 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욥이 친구들에게 반복했던 주장과 같다. 내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죄악된 책임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여 오해를 풀고 하는데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시편 7편에서는 다윗은 억울함에 이렇게 기도했었다.
시 7:3-5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5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셀라)
원수들의 말처럼 정말 자신이 죄를 범한 것이 있다면,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치를 당해도 상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억울하고, 무고함을 증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받고 있는 비방, 오해는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7-12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시 69:7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
다윗은 자신이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로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되었고 또한 그 수치로 인해 그의 형제들도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취급한다고 말한다.
시 69:8 내가 나의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나의 어머니의 자녀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었나이다
이 시편의 배경은 아니겠지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했을 때 정확히 다윗은 이런 경험을 했었다. 그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신이 나가서 싸우려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는데, 그의 형은 다윗을 비방했다.
삼상 17:28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자기 할 일은 제쳐두고 전쟁을 구경하러 왔다면서 비방한 것이다. 다윗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고자 했지만 돌아온 것은 조롱과 비방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그런 경험들을 그 후에도 했었다. 특히 그가 언약궤를 가져오면서 힘써 춤을 추었을 때 그의 아내였던 미갈은 그 모습을 보고 업신여기면서 조롱했었다.
삼하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다윗 시대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다윗의 가족 중에도 있었고 그의 관원들 중에도 있었다. 여기서 다윗을 비방하던 사람들은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된 모습을 보며 비방을 했던 것이다.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다윗만큼 주의 집, 즉 성막과 성전을 위하는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 언약궤를 이스라엘의 예배와 삶의 중심으로 다시 가져왔던 사람이 다윗이었고, 그런 예배의 장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를 임시 장막이 아닌 영원한 집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도 다윗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의 마음만 받으시고 성전을 짓는 것은 그의 역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을 때, 다윗은 그 말씀에 순종했지만 성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스스로 했다. 건축 재료를 준비했을 뿐 아니라, 성전에서 드려질 예배를 위해 사람들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그런 열심에 다윗은 사로잡혀 있었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비방을 그 스스로 받았던 것이다.
시 69:10-11 10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11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
여기 곡하고 금식하는 것, 굵은 베로 옷을 입는 것은 모두 예배의 행위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다. 이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바탕에 있는 예배의 행위다. 주로 회개와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문맥 상 자신의 죄 때문에 드리는 회개의 예배는 아니다. 9절 말씀이 신약에서 예수님께 적용되었을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해지던 잘못된 예배를 바로 잡으셨다. 아마 다윗이 여기서 언급하는 회개의 예배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예배가 그의 통치 아래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열심이 그에게 가득했기에, 그는 잘못된 예배, 예배자들로 인해 슬퍼하며 하나님께 예배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그의 대적들은 이용했고 조롱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윗이 어떤 ‘죄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를 비방했을 것이다. 12절을 보면 이런 일이 양지와 음지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시 69:12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비난하며 독주에 취한 무리가 나를 두고 노래하나이다
성문에 앉은 자는 지도자들이다. 독주에 취한 무리는 술을 마시면서 가십거리를 나누는 일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을 비방하는 자들이 많고 강하다는 4절의 말씀처럼, 다윗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있던 것이다. 다윗은 확실히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고 있었고, 어쩌면 넓은 의미에서는 그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회개의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비방은 피할 수가 없다. 막을 수가 없다. 다윗 자신이 그의 원수들처럼 되거나 혹은 그의 원수들이 그와 같이 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고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셨던 말씀도 같은 이치다. 제자들이 세상과 같이 되거나 세상이 제자들과 같이 되지 않는 이상, 고난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구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1절), 자신처럼 주를 향한 열심이 가득한 자들의 구원도 있다.
시 69: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다윗은 여기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두 차례 직접적으로 부른다. 만군의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능력에 있어 이 기도를 들으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 관계에 있어 이 기도를 들어주셔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하나님께서 주를 바라는 자들, 주를 찾는 자들을 위하여 일해주실 것을 구한다. 그들이 다윗 때문에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게 하여 달라고 구한다.
다윗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고, 특히 다윗은 그 공동체의 리더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고 찾는 사람이 수치를 당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수치를 당할 것이다. 다윗은 어떻게든 그런 일이 하나님을 바라고 찾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첫째로는 자신이 구원을 얻을 때 그렇게 될 것이고, 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조롱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구한다. 다윗이 가장 원하는 것은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구원하시고 원수들은 심판하시는 일이다. 이 간구는 다음 시편 말씀을 나눌 때 함께 실펴보자.
도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두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욥과 친구들은 고난의 이유는 언제나 죄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죄와 상관없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와 관련된 고난은 어떨까? 의와 관련된 고난은 우리가 당해야하는 고난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베드로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오늘날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난 자체가 없다면 내가 세상과 너무 비슷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세상이 나를 자기 편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고난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이 없는 삶은 정상적이지 않다. 우리에게는 고난과 탄식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의 때문이어야 한다. 때로는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겠지만, 의를 추구하는 우리는 그 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많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리에 따라 살아가며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을 기억하라. 다윗과 같은 경험, 즉 의가 고난으로 돌아오는 일을 가장 극한으로 경험했던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다.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던 예수님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다윗의 상황처럼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좇아 다녔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승리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정말 기운이 빠진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쉽지 않은 일을 했을 때 그 결과라도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내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아내로서 남편을 더 존경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상대방은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는 것 같을 수 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려고 나름 최선을 다 했지만, 자녀가 어떤 긍정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직장에서 힘들고 귀찮은 일은 먼저하고, 정직하게 주께 하듯 최선을 다했는데,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순진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의가 고난으로 돌아올 때, 주님을 생각하라. 우리 삶의 결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결국 승리할 것이고, 주께서 그 승리를 바라보시며 고난을 견디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주님 안에 있는 참된 평안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의를 행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