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부모다 4.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 : 에베소서 6장 4절

설교자 : 이병권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 양육, 네 번째 시간입니다. 그동안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면서 계속해서 부모인 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믿는 부모이기에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 남편과 아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 삶의 본으로 자녀의 건강한 독립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나를 사로잡을 때 조금 더 긍정적인 모습으로 자녀를 대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계속 이러한 사실을 마음에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조금 더 방법적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을 가지고 적용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이러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떻게 자녀를 화나지 않게 할 수 있지?’ 부모가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이 명령에 대해서 지금 우리도 이상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명령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당시의 배경과 문화 속에서 이 명령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아버지의 권력’이라 불리는 법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인 남자는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은 남자의 소유였고 재산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노예로 팔수도 있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록된 당시의 문헌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서운 황소는 도살하고 미친개는 교살하며 병든 짐승은 죽여서 버린다. 그리고 약하게 태어나거나 불구로 태어난 자식은 익사시킨다.’ 충격적인 글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는 물에 던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자녀에 대해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재산으로, 아버지의 소유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으로 보고 존중히 여길 것을 명령합니다. 물론, 이 명령은 자녀가 화내지 않도록 다 맞춰주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자녀는 죄의 본성에 따라 부모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자녀의 이기심과 욕심, 성숙하지 못한 마음과 잘못된 생각으로 화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받아주고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가르쳐야 하는 자녀의 죄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그릇된 목적으로 자녀를 괴롭게 하고 화를 부추기는 일은 부모가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함부로 대하기가 쉽습니다. 자녀에 대해서 생각 없이 막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 부모가 자녀의 화를 일으킨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잘못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 자신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골로새서에도 나오는데 참고하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골 3: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본문에는 없는 “낙심할까 함이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해서 나타나는 결과가 낙심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부모는 자녀를 낙심케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떨 때 부모가 자녀의 화를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로 자녀를 낙심이라는 늪에 빠뜨리게 되는 걸까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낙심케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하기에 따라 언급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가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 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자녀의 특별한 모습을 보고, ‘혹시 내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자라면 ‘아! 아니구나!’ 하며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녀에 대한 기대는 계속됩니다. 자녀에 대한 기대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녀에 대해서 기대할 수 있고 기대를 가지며 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기대가 지나칠 때, 부모의 기대가 과도할 경우에 그 기대는 자녀에게 짐이 되고 자녀를 분노케 합니다. 자녀를 낙심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모의 기대를 채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녀는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자녀를 보며 이런 고민을 합니다. 이과 쪽으로 의대가 좋을까? 아니면 문과 쪽으로 법대가 좋을까? 자녀의 지능은 보통, 유전이라고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그 기대가 욕심이 될 때 부모는 자녀에게서 완벽을 바라게 되고 자녀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칭찬보다는 책망을 하게 되고 자녀에 대해서 엄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한 것에 대해서는 알아채지 못합니다.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단번에 눈치 챕니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열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그 한 번의 실수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야 할 부분을 부모가 조바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지 못할 때 자녀는 낙심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뭘 하든지 실수투성입니다. 배워야 되는 것들이 많이 있고 시간이 필요합니다. 더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의 눈높이로 자녀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욕심입니다.

나의 마음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정말 자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자녀가 해주기를 바라고 자녀를 통해 나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통해 내가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자녀가 뭔가 잘 해서 좋은 결과를 내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면 부모로서 기분이 좋고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 자녀에게 욕심을 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자녀 양육 말씀을 준비하면서 여러 책들을 참고했는데 어느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진정한 평가는 자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는 우리 삶의 열매이며 부모들의 면류관입니다.”
저자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말은 오해되기 쉬운 말이고 자녀에 대한 욕심을 부추길 수 있습니다. 자녀를 통해서 부모의 삶이 평가될까요? 이런 생각은 사탄이 설치해놓은 올무입니다. 그런 함정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때부터 만족과 기쁨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니라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기대합니다. 결과적인 성공이 아니라 과정에서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자녀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의 마음을 진단할 수 있는 테스트 항목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마음 진단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교’입니다.
한 번 생각해볼까요? ‘엄친아’라는 말이 왜 나왔을까요? ‘엄마 친구 아들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그런데 넌 왜 그러니?’ 비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교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가 비교라는 함정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학교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왔습니다. 그럼 부모가 시험 결과를 보고 어떤 말을 할까요? ‘잘했구나! 근데 너희 반에 100점이 몇 명이니?’ 하고 물어봅니다. 반에서 백설 공주 연극을 준비해서 발표합니다. 내 자녀가 맡은 역할은 ‘세 번째 난쟁이’입니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자녀가 ‘엄마! 나 세 번째 난쟁이야!’라고 말하면 엄마는 무엇을 물어볼까요? ‘백설 공주는 누구니?’ 하고 물어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만족은 비교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녀를 통해 사람들의 인정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나친 기대를 버리고 자녀의 실수를 용납해주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비교하지 마시고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시고 주님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로, 분노는 다스려야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진노하십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때에 따라 분노합니다. 그래서 분노에 대해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어떻게 분노를 표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뜻이 무시되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죄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다른 이유로 분노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내 욕심을 이루지 못해서 다시 말해, 자녀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분노합니다. 나의 악한 본성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분노입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분노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절제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표현될 때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자녀를 대할 때 늘 이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녀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부모는 자신의 감정을, 그 화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녀 때문에 화가 났을 때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화를 낼만한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녀가 하지 않았기에 화가 난 것은 아닌지요? 나의 분노가 정당한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분노라면 그 분노를 적절하게 잘 표현해야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자녀 때문에 분노할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부모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자녀에 대해서 정당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떨 때는 정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기억합니다. 다시 마음에 새기고 또 생각합니다.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자녀에게 분노하는 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는 일이고 자녀를 낙심케 하는 일입니다. 화내는 것으로는 자녀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 자녀를 바꿀 수 없습니다.

부모는 몇 마디의 말로 자녀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을 수 있습니다. 다스리지 못한 분노로 자녀에게 엄청난 충격과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자녀에게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낸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자녀의 잘못을 다루면서 부모가 화를 낸다면 아무리 의도가 좋고 바른 목적으로 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정말 좋은 것으로 전해질 수 있도록 전달되는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좋은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자녀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르친다 해도 화를 내면서 그 일을 한다면 소용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화를 내면서 진리를 가르치지 마십시오. 분노하면서 훈계하지 마십시오. 화를 내는 것도 습관이 됩니다. 정말 고쳐야 합니다. 자녀를 대할 때 화를 내지 않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화내는 것은 폭력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화를 내는 것은 자녀를 학대하는 일입니다. 피부에는 멍이 생기지 않겠지만 마음에는 멍이 남을 것입니다. 자녀에게 화가 났을 때, 먼저 심호흡을 하시고 약간의 브레이크 타임을 가진 후에 다시 자녀를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훈육할 때에는 화를 빼고 담백한 태도로 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셋째로, 사랑은 바르게 해야 합니다.

제가 첫 번째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행동이 사실은 사랑이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바르게 해야 합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 집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엄마들은 자기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아!’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족과 자기유익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진짜 사랑은 자기희생입니다. 진짜 사랑은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녀를 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짐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미루며 떠넘깁니다. 여기저기에 자녀를 맡기면서 자녀를 돌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세상으로 인해 우리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이 멋지게 사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녀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인생을 즐기는 것 같고 부러워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키우며 자녀에게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나도 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에 대해서는 쉬운 사랑을 하게 됩니다. 쉬운 사랑,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원하는 것을 하게 내버려 둡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아이의 손에는 스마트 폰이 들려있고, 아이가 먹는 음식은 아이 입맛을 자극하는 것들뿐입니다. 그러면서 아이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더 안 좋아지는 것입니다.

쉬운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쉬운 사랑은 가짜 사랑입니다. 자녀를 단순히 돈으로 사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선물 하나 사주고 원하는 것 하나 해주면서 그렇게 자녀의 마음을 달래고 자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망치는 일입니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가짜 사랑이 아닌 진짜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희생이 필요하고 부모의 수고가 필요하고 부모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르게 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상대방입니다. 부모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쉬운 사랑과 정반대로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서 극진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자녀를 섬기며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나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의 생각 차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좀 생각할 수 있는 글이라서 말씀드립니다. 개는 주인이 밥을 주고 보살펴주면 자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개는 주인을 신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주인이 밥을 주고 보살펴주면 자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고양이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일을 했는데 개는 주인을 신으로 생각하고 고양이는 주인을 종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섬기지만, 마치 종처럼 섬기고 있지만 부모는 자녀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이 되셔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종으로 생각하면 될까요? ‘저렇게 나를 섬기는 것을 보니까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종이야!’ 정말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섬기지만 자녀를 떠받들면서 왕으로 키우면 안 됩니다. 자녀를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순위를 지키십시오.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가 하나님보다 먼저 되지 않도록 자녀가 우상이 되지 않도록 바르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사랑에 있어서 언제나 최우선은 하나님입니다.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자녀를 바르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사랑을 말로써 표현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함으로 일상에서 사랑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자녀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쁘더라도 자녀가 훌쩍 커버리기 전에 자녀와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반영합니다. 자녀는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 자신이 부모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자녀양육 과정을 회상하며 남긴 한 아버지의 고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만약에 다시 내 가정을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아이들보다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하려 합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아이들에게 더 많이 웃어주겠습니다. 아기 때부터 자녀 말에 더 많이 귀 기울여 들을 겁니다. 내 약점에 대해 훨씬 더 정직할 것이며, 완벽한 체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가족을 위해 기도할 겁니다. 가족을 탓하기보다 나를 탓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만들 겁니다. 더 많이 격려하고 더 많이 칭찬해줄 겁니다. 사소한 일도 더 잘 챙겨줄 겁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훨씬 더 많이 들려줄 겁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매일 접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줄 겁니다.”

어쩌면 후회가 담긴 고백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자라서 부모의 품을 떠났을 때에 이러한 아쉬움과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 할 수 있을 때 자녀에 대해서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자녀의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나의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자녀에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때에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자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자녀에게 무엇을 바라게 될까요?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무엇이 가장 후회되고 아쉬움이 남겠습니까? 조금 더 웃어주고 조금 더 안아주고 조금 더 이해하고 조금 더 들어주고 조금 더 칭찬하고 조금 더 용납하고 조금 더 아껴주고 조금 더 함께하고 조금 더 사랑할걸.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지금 하십시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