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육체의 탄식과 소망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7절
설교자 : 조성훈
육체의 탄식이라는 말보다는 영혼의 탄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우리가 짐을 진 것같이 탄식한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인생의 수고를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고,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의 삶은 참 즐거웠습니다. 그들 안에는 사랑과 희락과 온유와 의 등의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즐거움으로 에덴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천국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보일러가 필요하지 않았고 의복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하나님이 설계한 환경은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땅은 너희로 저주를 받고 너희는 평생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다음 달에 은퇴를 하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까요? 그러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이 저주는 풀릴 수 없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자녀 교육 시킬 때 얼굴에 땀을 흘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를 벗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탄식은 아마도 영혼의 탄식일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죽는 순간까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고통 중에 있는 것처럼, 영혼도 늘 고통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인간이 범죄하면서 우리 안에는 온갖 죄악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탐욕과 시기, 질투, 온갖 죄성이 인간 안에 있기에 영혼의 탄식이 늘 있습니다. 사람의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 안에는 항상 목마름이 있습니다. 또한 많은 무리 중에 있으면서도 외로움, 고독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고통 가운데서 투쟁하다 안 될 때 그것을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살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하루에 4-5명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갈 때 고통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어떠할까요? 처음에 구원받았을 때는 마음이 새롭고 기분이 날아갈 듯 기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죽어있던 영혼이 살리심을 받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 두셨던 거룩한 성품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를 베드로는 우리가 양심의 깨끗함을 받아서 다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내 안에 옛 성품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고 말씀을 사모하고 싶고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쪽에서 육체의 소욕이 있어 여전히 우리 안에서 시기와 질투, 탐욕 등이 나타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 안에 악이 함께 있으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도 고통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신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 고통은 언제까지일까요? 우리가 관에 들어가는 날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것이 방해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인 문제와 교회의 문제 때문에 신앙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큰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라고 말했습니다. 저 역시 이 몸에서 은퇴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괴롭기 때문에 육체를 벗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집, 하늘나라를 소망하기에 덧입고 싶은 것입니다.
이 목마름과 외로움을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기쁨과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이가 꽤 많을 때인데 그도 많이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외롭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아닌 늘 만족이 거하고 거룩과 의가 거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가운데 만족과 기쁨으로 덧입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사도 바울은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사도 바울은 그의 시선을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후 4:6)” 우리가 비록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님과 떨어져 있으나 담대하게 사는 이유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4:7)”입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생활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주님은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 다음에 있는 영광을 볼 때 주님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늘나라에 거할 성을 생각하며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바라봐야 합니다.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영원히 썩지 않는 몸을 입게 될 것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곳을 바라보기에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었습니까?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항상 방황하지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에서 하늘을 생각하고 땅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땀을 흘려 수고해야 하는 고통, 그리스도인들은 선과 악의 싸움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지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주님과의 관계가 가까울수록 양심은 살아납니다. 우리의 양심이 날카로워질수록 죄악된 속성으로부터 우리 안에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안에 이런 싸움이 없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죄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고 말할 때 한 목사는 시체 위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무거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양심 때문에 내면에 큰 싸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집을 기다릴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떨까요? 주님의 오심이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우리의 탄식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더욱 살아남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는 자는 넘어지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은 넘어지지 않았을까요? 주님의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은 사람도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도 자주 넘어지고 가끔 승리하고 또 수시로 넘어집니다. 어떨 때는 주님께 기도드리기도 민망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한편으로 여기 계신 젊은 분들을 생각할 때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앞으로 싸울 싸움이 더욱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맥카피 선교사님은 늘 주머니에 칼과 숫돌을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하실 때마다 칼을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칼을 갈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살아가면서 양심의 칼을 갈아야 합니다. 말씀에 여러분의 양심의 칼을 갈 때 여러분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점점 신앙의 양심이 무뎌지고 세속화될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말씀으로 늘 여러분의 양심을 날카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싸움을 피하지 마십시오. 넘어져도 일어나십시오. 새로운 영원한 집을 생각하며 소망을 가지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싸움을 싸웠습니다. 우리는 쉬운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싸움을 싸웠다면 여러분도 이런 싸움을 싸우게 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넘어질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시고 새롭게 입게 될 몸을 생각하십시오. 영원토록 주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찬양하며 영원토록 만족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늘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목에 깁스를 해서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이 소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가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이 땅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싸움에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