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가운데 계신 주께서 하시는 일 part 2

본문 : 시편 68:19-35

설교자 : 최종혁

 

시편 68편은 아마도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왔던 일이 배경일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라는 이 시편의 주제는 그런 배경에 잘 어울린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만 계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도 계신다. 그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는 1-6절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은혜의 구원을 베푸신다.

7-18절의 말씀에서 다윗은 그런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의 조상 가운데 계시면서 하셨던 일에 주목한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들 가운데 계셨는지, 그 가운데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하면서, 다윗은 광야 생활과 가나안 땅에서의 정착을 회상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고 필요를 공급하셨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다. 그런 하나님은 높은 산이 아니라 작은 언덕 같은 시온 산에서 자신을 나타내셨고, 이런 특권을 얻은 시온 산을 다른 산들은 시기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다른 민족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모세의 말처럼 이스라엘은 큰 민족도 아니고 어떤 특별함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복을 주셨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19절에서 다윗은 자신들의 현재로 넘어온다.

 

현재 :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19-31절)

19절은 전체 시의 전환점이 되는 구절이고 특히 “날마다”라는 표현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즉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항상 하신 일이었고 지금도 계속 하고 계신 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과 관계된 일을 다윗은 언급한다.

시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다윗은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말하면서 그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신다고 묘사한다. 앞선 말씀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고독한 자, 갇힌 자들을 위해 일하시지만(5-6절), 그들만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계시면서 백성들의 필요를 돌보신다. 그들의 매일의 고통을 보시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신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건져내신다. 상황을 바꿔주실 때도 있다. 혹은 그 상황을 견대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때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은 구원하신다.

구원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위험이고 따라서 그 구원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구원은 아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도 그것은 구원이었다. 실제로 영적인 구원과 같은 단어가 병이 낫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있어 구원은 단지 영적인 일이거나 먼 미래의 일이 아니었다.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신 모든 일이 바로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다윗은 그 구원의 일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셨다”고 표현한다. 그들이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를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대신 지어 주셨다는 말이다(이스라엘, 다윗,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엘리야와 엘리사 때의 과부들 등). 물론 가장 큰 일은 인류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신 일이다. 이사야 46장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46:1-5 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렸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들도 잡혀 갔느니라 3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하나님은 여기서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상들은 사람들이 짐승의 등에 실어서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무거운 짐일 뿐이다. 다른 짐하고 다를 것이 전혀 없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우상을 실어 날라야 하고 보살펴야 한다. 더러워지면 닦아줘야 한다. 넘어지면 세워줘야 하고 어딜 가려면 사람이 옮겨 주어야 한다. 애초에 사람이 우상을 만들었고, 우상은 클수록 무거울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신다.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태어남에서 죽을 때까지 돌보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품고 업고 구하신다. 광야에서 그렇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서도 그렇게 하셨다. 어느 순간에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하시는 분이심을 다윗은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이 구원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1-6절), 인도하시는 하나님(7-10절),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11-18절) 다윗은 지금도 기대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특히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는 왕으로서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기대한다.

시 68:20-21 20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21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망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의 짐을 지시는 여호와 덕분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원수를 하나님은 완전히 패하게 하신다. 이들은 죄를 짓고 다니는 하나님의 대적들이고 이들의 머리를 하나님은 깨뜨리실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이것이 왕으로서 다윗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이었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 68:22-23 2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23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바산은 15절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높은 산이다. 즉, 높은 곳이든 깊은 곳이든 어디든 도망하려고 해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원수들을 찾아내서 그들을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즉 22절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승리를 말씀하셨다.

23절에서 묘사하는 이미지는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좀 섬뜩할 수도 있지만, 시편 58편 10절과 비슷하다. 승리자의 모습을 당시의 상황에 기초하여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2절이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표현했다면, 23절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승리를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다(“네” 4x). 그냥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셨대라고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 백성이 직접 경험하고 그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전에 필리핀에 몇몇 학생들과 선교지 방문을 다녀오면서 학생들이 했던 말에 대해서 교회에서 간증을 했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은 선교사들의 경험했던 일들을 듣고 그 결과들을 그곳에서 보면서 여기 오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하나같이 얘기했었다. 그것이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도 있었다. 사실 필리핀이든 어디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동일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 그 학생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좀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있는가이다.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라고 정말 믿고 살아가고 그분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내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죄에서, 죄의 영향력에서 건져내고 계심을 믿고 있느냐는 것이다. 내 삶의 문제는 그냥 내가 알아서 해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일도 없다.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도 사라진다.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24-27절에서 그들 가운데 행차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게 한다.

시 68:24-27 24 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25 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26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27 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

하나님은 영이셔서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약궤, 성소, 예루살렘 등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들을 보면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오면서 축제를 벌인 것이다. 그 자신도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췄고(삼하 6:14), 25절 말씀처럼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며 함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그들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환영했다. 찬양했다.

다윗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라고 불렀다. 12지파의 시초가 되었던 이스라엘, 즉 야곱을 언급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하는 것이다. 27절은 남쪽의 두 지파인 베냐민과 유다, 그리고 북쪽의 두 지파인 스불론과 납달리를 언급하여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이 축제에 함께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이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며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시 68:28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지금까지 과거를 기억하면서 찬양을 했다면, 여기서는 앞으로를 기대하면서 기도한다. 여기서 기대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에 때문에 확신이 되어 있다. 과거에 자기 백성을 이끌며 앞장 서서 싸우는 장수와 같았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들에게 힘을 명하시고 함께 싸우신다.

골딩게이는 여기서 다윗이 전제로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냥 힘만 주시고, 싸우는 것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전쟁에 함께 나가서 그들 가운데서 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대한 것 이상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심이 전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분으로서 그렇게 관계 속에서 일하신다. 어떤 대단한 능력만 주시고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출애굽이라는 거대한 사명을 모세에게 맡기시면서 하나님은 모세가 여러 이적도 행하게 하셨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 아론도 주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는 약속이었다. 그저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사명으로 주시면서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수 1:5)라고 같은 약속을 주셨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 이 능력을 너희에게 줄 테니, 내가 떠나면 그 능력으로 잘 해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마 28:20).

하나님의 백성이 강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은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로 다윗이 기대하는 것도 그러하다.

시 68:29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여기 왕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왕들이다. 다른 나라의 왕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실 때 그렇게 된다.

시 68:30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여기 등장하는 들짐승, 수소, 송아지는 분명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우리가 알기는 어렵다. 앞뒤의 문맥을 고려하면 애굽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강국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다윗이 기대하는 것이다. 31절은 부한 나라들도 하나님께 나아올 것을 말한다.

시 68:31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즉, 힘 있는 자든, 부한 자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 부분적으로 이런 모습들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때 성취될 기대이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0) 다윗은 이런 이상적인 나라가 그의 때에도 이루어지기를 바랐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시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예배 받으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이 기록한 이 시편의 결론은 이렇다.

 

결론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32-35절)

시 68:32-35 32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34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35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지금은 성소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그의 백성들 가운데 계시며 그들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신다. 날마다 그들의 짐을 지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감사와 찬송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하고 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해야한다.

도전

시편 68편에서 다윗은 그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그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펴보며 이야기했다. 그 핵심은 19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고 그래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일을 하신다. 이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반응 세 가지가 있다.

먼저는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혹 그것이 의심스럽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돌아보라. 다윗에게는 언약궤와 성소, 희생 제사, 때에 따라 돌아오는 절기들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하셨던 일들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던 일, 사울과의 긴 싸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의 삶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게 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잘 기록되어 있는 성경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주일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만찬 예식을 행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 것, 찬양을 하는 것, 성도와 교제하는 것,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에 기초하고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시며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조용히 묵상해 보라. 하나님은 내 삶에서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 하나님이 정말 내 삶에 계시지 않았던 적이 있는지. 나의 과거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지, 어떤 일을 하셨다고 증언하는지 묵상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고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신다.

둘째로 이것을 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면서 앞으로 그의 나라에서 펼쳐질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언약궤에 신비한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바, 즉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다. 오늘 시편에서도 그런 기대를 우리가 살펴봤었다.

우리도 과거에 나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에만 우리의 생각이 머물러서는 안된다. ‘옛날에 참 좋았지. 내 신앙의 전성기는 20년 전이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런 기억들은 추억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기대하게 만드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더 알아가게 된다. 그렇게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알고 있다면 내 신앙의 전성기는 지금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영생이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기 때문이다.

아마 선교지에서 하나님을 더 경험하는 것은 더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댈 곳이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대고 기대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기댈 곳이 많아졌다. 우리 짐을 둘 곳이 많아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내 짐이 그리 무겁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냥 저냥 감당할만한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삶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제거하면, 우리 신앙의 전성기는 20년 전이 될 수 밖에 없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졌는가?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했는가? 그냥 일어나서 평소와 다름 없이 하루를 살고, 조금 힘들긴 해도 하루를 잘 마무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평범함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면, 내가 잘 못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혹시 하나님이 내 짐을 지시는 것이 무거우실까봐 염려하지는 말라. 싫어하실까봐 걱정하지도 말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니었어요’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의 어떤 성취든 나에게 힘주시는 하나님께서 다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 아닌 것이 없다’는 고백도 이렇게 구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기대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고백이다. 결국 ‘주가 하셨다’라고 우리가 고백을 하면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최종적으로 우리가 할 일이다.

이런 우리의 삶으로 온 열방이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되지는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직장 동료가 우리 가운데 계신 주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역사를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우리 가운데 계신 주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에 대한 더 큰 확신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더 알고, 기대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