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를 기뻐하게 하소서
본문: 시편 85편
설교자: 최종혁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점령 당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은 국토를 잃고 주권을 잃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땅과 자손과 복을 약속하셨는데, 이것을 아브라함 언약이라 한다. 그 후로 하나님은 차근차근 그 약속을 이루어 가셨다. 민족적으로 보면, 야곱의 가족이 기근으로 인해서 요셉이 있던 애굽으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크게 번성하여 한 가족은 한 민족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출애굽의 리더로 세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미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그 여정 중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을 세우셨다. 이 언약은 중보자였던 모세의 이름을 따서 모세 언약이라 부르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 언약이라 할 수 있다.
모세 언약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 마치 결혼 서약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기초적 사실 위에,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온전히 헌신하며 신실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며 번성하게 할 것을 약속하셨고,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말씀에 순종할 것을 약속했다. 만약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실 것이고 그런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다른 나라로 흩어지고 그곳에서 종살이를 하며 고통당하게 될 것이 이 언약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언약에 따라 흘러갔다. 사사시대, 왕국시대의 역사가 그러했다. 느헤미야 9장을 보면 포로되었다가 돌아온 백성들이 자복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정확하게 이 역사를 인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셨다. 그들의 기도 마지막 쯤을 보면 이렇게 고백한다.
느 9:35–36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36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이스라엘은 국력이 약해서 나라를 빼앗겼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누렸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고 은혜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심판을 내리셨던 것이다.
포로로 잡혀갔었던 다니엘도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가까왔음을 알고 이렇게 기도했다.
단 9:13–14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내리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이어서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단 9:18–19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이것이 참된 회복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이스라엘 백성은 다니엘처럼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문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성하지 못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깨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가운데서 더럽혀지고 수치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회복해야 할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이며, 그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의 땅에서의 풍족한 삶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었다. 참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런 회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은 바사 왕 고레스의 귀국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마치 출애굽의 그때처럼 종되었던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할 때, 그들은 마침내 회복의 때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며 즐거워 했다. 아마도 시편 126편이 그런 상황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시 126:1–3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부부와 같은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관계가 멀어졌는데 마침내 용서를 받고 화해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심정이 귀환길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이제는 회복의 즐거움만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복의 과정은 그들이 원했던대로는 되지 않았다. 처음 귀환한 사람들은 대적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건축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후 성벽을 건축하는데 실패했고 그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했다.
느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모든 것들이 다시 회복되고 기쁨을 누릴 것을 기대했었지만, 현실은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귀환한 백성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었다.
이것이 정확히 시편 85편의 바탕이 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포로생활을 마치고 1, 2차 귀환을 한 이후 느헤미야를 통한 3차 귀환을 하기 전이 이 시편의 배경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사실 이런 역사를 계속해서 되풀이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다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고 돌이키기를 반복했었다. 하지만 1, 2차 귀환을 마치고 난 후의 이스라엘의 상황이 시편 85편의 가장 좋은 배경 혹은 예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부푼 기대를 안고 기쁨으로 다시 약속의 땅에 돌아왔다. 오랜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는 회복의 시간이 시작된다고 믿었을 것이다. 성전의 기초가 놓였을 때 그들은 큰 소리로 즐겁게 노래했었다(스 3:11). 방해로 인해서 성전 건축이 멈추기도 했지만, 결국 건축을 완성하였고 즐거움으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이 회복되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고난의 시간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라면 절대 깨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과 기대가 보기좋게 무너진 것이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까.
살면서 비슷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어둠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터널이 너무 길어서 도대체 끝이 없어 보일때 쯤 저 멀리 빛이 보인다. 희망이 생기니 그나마 힘이 난다. 겨우 힘을 내서 그 끝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거기서부터 또 다른 터널이 시작된다. 희망 고문이다. 더 큰 좌절과 절망에 빠진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는 나와는 관계없는 것 같다. 애초에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없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어떤 힘도 없고 의욕도 없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뿐이다.
여러 상황들이 우리를 이런 상태로 만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복되는 죄의 문제로 인해서 좌절한다. 성경도 읽고 기도하고 상담도 받고 하면서 죄와 싸우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잘 된다고 생각할 때 죄의 유혹은 더욱 거세지고 그 앞에 또 다시 무너질 때 ‘난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나봐’라며 좌절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서 그럴 때도 있다. 잘 될 것 같았던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그럴 때도 있다. 건강 때문에 그럴 때도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그럴 때도 있다. 결혼 때문에 그럴 때도 있다. 교회 때문에 그럴 때도 있다. 여러 상황들이, 특히 반복되는 어려움들이 우리로 절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포기하고 싶게 만든다. 하나님도 떠나고 교회도 떠나고 싶게 만든다. 지금 그런 상황에 있다면 시편 85편이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이 말씀을 통하여 소망을 주신다.
85편의 말씀은 시간에 따라 나눠볼 수 있다. 과거의 회상(1-3절), 현재의 간구(4-7절), 그리고 미래의 기대(8-13절)이다. 우리는 회상과 간구, 기대를 통해 회복을 소망할 수 있다.
과거: 회상(1-3절)
시 85:1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시편기자는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회상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때다. 히브리시의 특징 상 하나님께서 땅에 은혜를 베푸신 것과 야곱의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신 것은 같은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은 문맥에 따라 문자 그대로 포로된 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재물이나 소유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욥의 경우 모든 소유를 잃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를 배로 돌려주셨는데, 그때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욥 42:10). 여기 시편의 맥락에서는 둘 다 가능하기 때문에 이 시편의 배경이 포로 귀환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매우 적절한 상황이기는 하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시인이 염두에 두고 있었든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은혜는 ‘회복’의 은혜다. 1절 끝의 “돌아오게 하셨으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슈브’인데, 이 단어는 3절, 4절, 6절, 그리고 8절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 어떤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럼 이스라엘은 왜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
시 85:2–3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3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누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돌이키셨을 때(슈브), 그들은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에 대해서 하신 일을 두 가지 조금은 상반되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했다.
먼저는 죄악을 사하신 것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는 ‘들어 올리다’는 의미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죄의 결과를 감당하는 것이다. 가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에 대해서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창 4:13)라고 말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들의 죄 때문에 감당해야할 죄의 무게가 있었다. 기근이 찾아오기도 했고 질병이 찾아오기도 했다. 전쟁에서 패하기도 했다. 그 땅에서 쫓겨나 이방민족의 종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그들이 감당해야할 죄의 무게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의 무게를 ‘들어 올리’시면 그들은 죄에서 자유로워진다. 그것이 죄사함이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서 그 짐을 대신 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운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내가 그 죄의 결과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한 사람에게 갚아주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죄에 대해 나는 마땅히 분노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용서에는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이것이 산술적으로 드러난다. 100데나리온을 탕감해주면 나는 100데나리온을 손해봐야 하는 것이다. 실제적이든, 감정적이든, 무엇이든 죄의 무게를 내가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우리 죄를 들어 올리신 것이다. 그것이 죄 사함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분노를 거두시고 그들의 죄악을 사하셨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 들어 올리는 것과는 반대로 죄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사실 죄를 덮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그리 긍정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죄를 감춘다. 숨긴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죄를 모른 척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감싼다는 의미다. 앞의 이미지처럼 죄의 결과를 끝까지 감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서 죄의 영향력에서 서로를 보호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다.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셨을 때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이 그들이 회상하고 기억해야할 과거였다. 회복의 은혜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며 희망을 얻는 것은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때로 우리를 더 깊은 절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그렇지 않느냐는 회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회상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 자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때에 따라서 다를 수 있고 우리가 그 이유를 다 모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할 수 있는 분이시다. 용서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회상’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과거가 없다. 우리의 과거를 통해 기억하는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시다. 그 하나님께 여전히 회복의 소망이 있다. 그러니 과거의 회상을 통해 여전하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얻어야 한다.
현재: 간구(4-7절)
다음으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소망을 얻을 수 있다. 현재의 간구는 과거의 회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시 85:4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거두소서
그냥 읽으면 여기 말씀이 1-3절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거두셨다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해달라고 구하기 때문이다. 1-3절이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 확실하게 하자면 ‘하셨다’보다는 ‘하셨었다’와 같이 번역을 하는게 좋았을 것이다. 4절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신 적이 있고 우리를 돌이키신 적이 있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달라는 간구다. 그러면서 5절에서는 조금 과장된 표현으로 마땅히 그리고 신속히 그렇게 해주실 것을 강조한다.
시 85:5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진노하시겠나이까
조금 발칙한 기도이기도 하다. 어차피 영원히 노하실 것은 아니니 지금 진노를 멈추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도에는 지금까지 오래 견뎌왔다는 탄식도 묻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원히 노하실 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그 노를 거두실 때가 되시지 않았느냐고 탄식하는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도에서 분명한 요구를 밝힌다.
시 85:6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여기서 시편 기자는 온전한 회복을 하나님께 구한다. “다시 살리사”에서 “다시”가 앞서 언급했던 ‘슈브’다. 따라서 반복의 의미에서 ‘다시’가 아니라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의 ‘다시’다. 그 본래의 자리가 바로 회복의 목적에서 언급된다. 주의 백성이 온전히 주를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그 풍성한 기쁨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회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다. 부부가 싸움을 하고 나서 화해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애들 때문’이라거나 ‘돈 때문’이라면 정말 슬플 것이다. 심지어 그 화해의 진정성도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하는 회복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지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노를 거두어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물론 그런 회복에는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도 가득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진정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하고 그것을 위해 구해야 한다.
또 하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주께서”와 “주의 백성”이다. 느낌을 조금 살리자면 “주께서 친히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인 우리가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정도가 될 것이다. 온전한 회복은 하나님께서 하셔야할 일이며 그 근거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시 85:7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헤세드)을 보이시는 것이 지금 이 절망의 상황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과 이들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기에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그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심으로 그들을 다시 살리시기를 하나님의 백성은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시 그들이 주를 기뻐하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과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현재 드리는 간구의 하나의 기초가 된다면, 또 다른 기초는 바로 이 언약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하지 않는 두 기초가 있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담대하게 구할 수 있다. 우릴 다시 살리사 주를 기뻐하게 하소서라고 소망 가운데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 기대(8-13절)
아마 7절까지 말씀으로 시편이 마무리 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구하는 기도로 마무리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가서 미래의 기대를 통한 소망에 대해서 언급한다.
시 85:8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주실 것은 화평(샬롬)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많이 경험했고 지금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마지막에 경험하게 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주실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슈브’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이시지 과거의 어리석은 데가 아닌 것이다. 지금의 모습이 기대와 다르다고 해서 과거의 어리석었던 삶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마치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무서워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사람들처럼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포로기에서 돌아왔는데 이곳의 삶도 고통스럽다고 해서 다시 포로가 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럴 수 없다.
시편 기자는 그들을 이렇게 위로한다.
시 85:9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끝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 땅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런 구원의 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더 나아가서 더 먼 미래에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다.
시 85:10–13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11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12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13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며 주의 길을 닦으리로다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은 어떤 면에서는 대조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들이다. 그런 하나님의 조화로운 속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좋은 것들을 풍성하게 하실 것이고 평화와 의가 그 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치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통해서 이런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 어떤 삶을 살든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노하시고 대대로 진노하실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본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당장에라도 미래의 소망을 현실로 만드실 수 있으시다. 그러니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평화와 의의 나라를 소망하며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좌절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불평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참된 삶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도전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여전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가나안 땅을 앞두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며 돌아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그런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다. 뭔가 하나님 안에는 소망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될 때 더욱 그럴 것이다. 애굽으로 가면 소망이 있을 것 같은 것이다. 차라리 예전이 나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럴 때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셨던 일을 회상하고 또한 미래에 하실 약속을 기대하기 바란다. 그리고 지금 나를 다시 살리사 주를 기뻐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기 바란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