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4~17절
설교자: 최종혁

한 가지 질문을 먼저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살면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아침에 일어나게 하고, 직장에 가게 하고, 학교에 가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교회에 나오게 하는가? 우리는 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가? 왜 같은 시간에 주일에 봉사하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하기도 하고, 하지 않게 하기도 하는가? 그렇게 나를 이끌어가고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동기’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람마다 다른 동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무엇인지가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교회에 좋아하는 이성이 있어서, 설교나 다른 성도들이 위로가 돼서, 교회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이어서, 부모님이 열심히 나가시니까,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것이 기뻐서 등의 동기가 있습니다.

꼭 단 하나의 동기만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있는 가장 근본이 되는 동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 받는 것이 교회에 나가는 근본 동기라면 집에 지속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기게 되면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좋아하는 이성이 동기라면 그 이성이 다른 곳으로 가면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 똑같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그 동기에 따라 미래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다른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동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동기라는 것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움직이고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경쟁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것으로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동기가 경쟁심이라면 그가 어떤 삶을 살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명성이나 인기를 동기로 살아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남겨지는 것,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을 마음의 동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끌어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우리 삶의 근본 동기로 삼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에 쓴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다른 서신들도 썼지만, 성경에 포함된 것은 고린도전서와 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면서 교리적으로 가르치는데 초점을 주어서 논리적이고 정돈된 서신이라면, 고린도 후서는 개인적인 서신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변호하는데 많은 지면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성도 개인을 무너뜨리는데 핵심 타깃으로 삼는 것이 개인의 마음이라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핵심 타깃은 교회의 가르침과 인도자들입니다. 그래서 서신서들을 보면 이런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 경고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들에 대한 공격을 보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복음과 구원에 대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종말(세상의 끝)에 대한 거짓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성경의 진리에 대한 공격을 한 번에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 진리를 가르치는 인도자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을 성도들이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들이 하는 말에 대한 신뢰는 당연히 같이 무너집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들의 자격에 대해서 성경은 잘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든 밖에서든 영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좋은 평판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변호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 싫고 거슬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교회를 지키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런 어려움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귀한 일꾼의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의 동기를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맥도날드는 <신자주석>에서, ‘본서를 통하여 바울은 우리를 자신의 영혼 깊숙한 비밀스러운 곳까지 안내하는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바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동기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아마 바울일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길 원합니다.

1. 사랑의 방법(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4절). ‘강권한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도록 억지로 권한다는 사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적으로는 그런 ‘억지’가 꼭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강한 힘입니다. 같은 단어가 사도행전에서 ‘붙잡혔다’로 번역되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행 18:5) 또는 ‘휘어잡다. 지배하고 있다. 사로잡고 있다.’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한 영어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다른 선택도 할 수 없게 한다.”고 번역했습니다. 즉,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강력해서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바울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그가 살았던 삶은 그저 그냥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묘사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고(1:5) 환난을 당했다고 말하며(1:6)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말하고(1:8)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1:9).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했습니다. 박해를 받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살았습니다(4:8-10).

우리는 그냥 “배고파 죽겠어”, “졸려 죽겠어”와 같은 표현을 쓰는데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의 삶은 사망이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삶이었습니다(4:11).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은 삶을 살았고 더 그렇게 살고 싶어 했고,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바울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살았을까요?(4:18; 5:7) 왜 바울은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그렇게 살았을까요?(5:13)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 이유 혹은 동기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주의 두려우심”(5:11)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랑”(5:14)입니다. 주의 두려우심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 둘이 바울을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두려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 삶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움직이지 않고 다른 무엇이 동기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 될 수도 있고, 그저 하나의 동호회 같은 취미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나의 명성을 얻기 위한 도구로 교회에 나와 성도들과 지낼 수 있습니다. 결국 나를 위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말합니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그는 그의 적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이 나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물불 안 가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신이 온전하다고 해도 그 역시 자신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해 그런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정신이 나갔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고 온전할 때는 성도들을 위해 그렇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태이든지, 자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를 공격하던 자들이 그렇게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그는 감옥에 있었는데, 그를 시기한 어떤 사람들은 그 기회를 틈타서 복음 전도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바울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효과가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저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대적들이 했던 것은 오히려 바울에게 또 다른 기쁨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도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불의를 행하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고 모함했습니다(고후 7:2). 바울이 하는 일의 동기, 그 마음에는 ‘자기 자신’이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세상 속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나한테 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논리를 가진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그렇게 공격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왜 저렇게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왜 저렇게 죽을 고생을 자처하겠는가? 다 자기 잘 되려고 하는 것일 거다. 그러니까 그 사람 말 들을 필요 없다. 그렇게 사도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이끌었던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이끌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사랑의 방법과 목적, 그리고 사랑의 결과에 대해 말합니다. 그 사랑이 자신을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최종 결론은(“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한 궁극적인 방법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대신하여”라는 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바로 “대신한 죽음”입니다. “대신했다”는 말은 우리가 죽어야 했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 지위나 나이가 고려되어 돈을 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가서 돈을 냅니다. 나의 숙제를 대신해주거나 해야 할 일을 해주면 그것으로부터 오는 유익을 우리가 누립니다. 대신이라는 의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죽어야 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우리는 죄로 인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고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것이 죄인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대신하셨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요한 훨씬 전에 이사야가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 53: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의 죄악을 우리에게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담당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을 지켜보았던 베드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대가로 사망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이 죄의 대가로서 사망을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실제 사망에서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실제의 죽음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한 사람의 죽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희생은 불필요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도 남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많아도 유한하지만 그리스도는 한 분이셔도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속의 은혜를 직접 맛보고 누리는 것은 그 예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두는 사람에게 제한됩니다.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억울해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은 희생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포기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굳이 이런 희생을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구원할 자들의 어떠함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신체적인 아름다움이나 능력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구원 받고 나서 얼마나 잘 살 수 있는 사람인지도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조건을 따지셨다면 우리 중에 선택을 받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보다 뛰어난 사람은 세상에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쪽에서 찾아야 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떠함은 조건에 없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먼저 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베풀어 준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랑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도와달라고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던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런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며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서 누구도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1~39).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강력한 힘,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영원한 곳으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때로 바울은 자신이 얻을 상에 대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장 궁극적으로 그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성적으로 수고에 대한 보상이 우리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뛰어 넘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을 우리가 받았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랑을 하셨을까요? 역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에 올바르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이끕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우리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까요?

2. 사랑의 목적(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5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목적을 죽음 이후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지옥에 가지 않는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씀에서 바울은 그 목적을 지금의 삶에서 찾습니다. 물론 이것이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의 사는 목적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과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은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누가 말해주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삽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결국 내가 우선이고 때로는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내가 피해를 입거나 권리에 침해를 당하면 분노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복잡한 세상의 제도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만 동시에 함께 살기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궁극적인 이유도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가 앉은 결과인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데, 죄는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자리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그리스도의 사랑이 조건이 없다고 하면서 왜 이런 목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결국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뭔가 우리를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죄인인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이 원리를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싫어하는 훈육을 하고 싫어하는 채소를 먹게 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때로 우리는 완벽하지 못해서 잘못 알고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우리 최고의 만족, 최고의 기쁨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려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은 분명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데서 우리의 생각이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의 목적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해 죽으셨고 우리가 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3. 사랑의 결과(16~17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절) 두 번 동일하게 반복되는 “이제부터는”이라는 말입니다. 과거와 무엇이 달라져야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이제’입니까? 지금입니다. 구원받고 난 후 매 순간이 이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분의 삶이 나의 삶이 된 순간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 없이 함을 받은 그 순간이 ‘이제’입니다. 내가 원수에서 자녀가 된 그 순간부터 매 순간이 ‘이제’입니다. 과거와 지금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그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육신을 따라 알았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기준을 가지고 가치를 발견하고 사람을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4-6). 바울은 이런 것들을 신뢰하고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랍비가 가르쳐준 율법을 잘 지키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에 기초한 전통을 칼같이 지키는 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직 참된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안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고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 그 사람에게 있으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을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배척합니다. 나를 좋게 봐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싫어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렇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우합니다. 나의 이익에 내가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도 육신으로 알았으나” 바울에게 있어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하며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전통을 무너뜨리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견고히 지켜오던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알았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삽니다. 그리스도가 그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 결과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절)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전의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 사랑하던 것,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은 지나갔습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내 삶의 방향을 이끌던 모든 동기들은 지나갔습니다. 그것들은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자리에서 대신 죽으신 것처럼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자리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도전

무엇이 당신을 움직입니까?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이곳으로 저곳으로 이끌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고 그 사랑이 우리를 우리가 아닌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합니다. 그 사랑이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가치, 기준, 동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나의 선택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나보다도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그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 다투고 갈등이 생길까요? 왜 교회를 사랑해서 하는 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어려움을 줄까요? 왜 성도가 미울까요? 왜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까요? 왜 다른 사람에게 실망할까요? 왜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 마음이 불편할까요?

다른 사람에게서 답을 찾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들은 당연한 일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야 맞습니다. 말처럼 쉽고 단순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의 의미가 나에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