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왜 예배하는가

본문 : 시편 150편 6절

설교자 : 최종혁

 

예배는 예배의 대상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높인다는 말은 높이는 대상의 가치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칭찬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하지만 예배는 그저 칭찬하는 것 이상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가치를 인정하는 만큼 그 영향력은 더 커지게 됩니다. 어떤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딱히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이 달라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IS같은 경우 그들은 예배하는 대상의 가치를 그들은 자신들의 이 땅에서의 목숨보다 귀하게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상의 명령에 따라 자살 폭탄 테러까지도 감행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대상이 누구 혹은 무엇이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다른 무엇을 예배합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어떤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가족의 행복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사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무엇을 예배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높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즉,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근본적인 차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차이는 영원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누구를 예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예배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인 ‘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왜’로 시작하는 질문은 정말 중요하지만 대답하기에는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질문의 의도가 달라집니다. 오늘은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와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가?”의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배는 당연히 하는거지 왜 하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혹 그런 생각이 들지라도 잠시 내려놓고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무언가를 할 때 ‘왜’하는지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게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자, 우리는 왜 예배할까요?

1. 예배해야하는 이유

먼저, 우리는 왜 예배해야 할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예배에 대한 명령은 정말로 많습니다. “예배하라”는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더라도 “절하라”, “찬양하라”, “감사하라” 등이 예배와 관련된 명령으로 사용됩니다. 다른 어떤 명령보다 이런 명령이 많고,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예배하라는 명령은 성경의 다른 모든 명령을 포함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신 5:7-10 [7]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말이 여러 다른 표현으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오직 하나님 만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절하고 하나님 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에 포함된 의미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신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만 예배하라는 명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은 그들을 통해 다른 민족들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셨기 때문이지, 그들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도 말씀하셨고 그 후로도 계속 언급하셨던 부분입니다.

시편 2편의 말씀은 이방인들 역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함을 아주 분명히 말합니다.

“시 2:10-11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148편은 누가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해야 하는지를 언급합니다. 천사들, 해와 달, 하늘을 비롯한 모든 것들, 그리고 사람들인데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남녀노소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편의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시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즉,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성경의 명령은 어느 특정 시대의 특정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이런 명령을 주실까? 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할까?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A. 창조의 목적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성경의 시작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냥 창조하셨을까?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니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곧 예배입니다.

“사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cf. 골 1:16”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 중심적이어서 창조도 마치 우리가 주인공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그렇듯, 창조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즉 예배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창세기 1장의 역사성과 진실성을 부인하면 나머지 성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 해야 합니다. 특별히 시편을 읽어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예배가 깊은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cf. 시 100:1~3; 103:22).

하나님의 창조를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책임 혹은 사명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 세상을 사는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당신의 존재의 이유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미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피조물도 정확히 같지 않습니다. 피조물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해는 그 빛을 발함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내고 달 또한 그렇습니다. 태풍의 엄청난 위력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보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며 그 꽃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피조물들은 그 나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어떤 피조물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누구도 당신처럼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문이 다르고 홍채가 다르고 목소리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다 유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외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재능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고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 해야만 합니다.

B. 구원의 목적

이 창조의 목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 것이 죄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다시 들어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죄는 마치 우리를 고장 난 전자 제품과 같은 처지가 되게 했습니다. 더 이상 만들어진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고장 난 휴대폰은 어떻게 할까요? 고치거나 버리고 새로 사거나 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좀 기분 나쁠 수 있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같은 상황에 있었고, 하나님은 우리를 재창조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새로운 창조’로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창조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구원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엡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창조의 목적이 그랬던 것처럼 구원의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위해 구원 받았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장 3~14절도 주의깊게 읽어 보십시오. 무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엄청난 일을 하시는데, 즉, 구원하기 위해 예정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자녀가 되게 하시고, 죄 사함을 얻게 하고, 하나님의 기업에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시고 보증하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왜 구원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사실 죄로 인해 이룰 수 없게 되었던 창조의 목적을 구원을 통해 다시 이룰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즉 그분을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 구원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잃어 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여 참된 예배자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자가 나는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인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려고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명령할 수 있고 그 명령에 불순종 할 때에 심판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스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영원에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거절한다면 영원에서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빌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cf. 계 5:13”

모두가 예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영광을 돌릴 때가 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자들만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언젠가 자신의 의견과 상관없이 예수 이름 앞에 모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날이 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찬양할 날이 옵니다. 누군가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날이 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선택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목적이며 사명입니다.

2. 예배 할 수 있는 이유

지금까지의 얘기는 어쩌면 좀 거부감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것도 하라고 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들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이유, 즐겁게,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앞서 얘기한 예배 해야하는 이유가 그렇듯 우리가 기꺼이 예배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은 ‘나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삐딱하게 생각하면 마치 폭군이 ‘나를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꼭 폭군이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높이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예배는 우리들에게 있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배는 무언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멋진 자연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멋진 그림, 사진, 작품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뿐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은 운동 경기를 관람하러 갈까요? 커다란 골대에 공 하나 발로 잘 차 넣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그걸 잘 하는 사람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벌까요?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이 그것을 잘하는 게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축구 경기를 보기위해 돈을 지불합니다. 그 안에서 느끼는 가치 혹은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말 대단한 패스와 슈팅, 방어는 보는 사람에게 쾌감을 주고 감탄을 자아냅니다. 물론 그것을 알고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가치를 느끼는 부분이 다릅니다. 누군가는 힘이라는 것에 큰 가치를 느낍니다. 몸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에 가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있습니다. 질서 정연한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음악에 빠진 사람, 스포츠에 빠진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 등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무언가의 가치를 인정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더 추구하고 더 좋은 것을 보기 원하고 경험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가치를 인정하는 것, 높이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원합니다. “이거 진짜 재미있지 않아? 어제 그 게임 정말 대단했지? 어제 그거 봤어? 정말 재밌었지?” 이런 대화들은 정말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혹은 자발적인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가치’를 우리가 얼마나 인정하느냐의 문제가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큼 가치있고 귀한 분이신가요?

A. 하나님의 속성

성경은 종종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주와 같은가? 누가 우리 하나님과 비할 수 있는가?

“삼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사 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cf. 출 15:11”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다르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존 파이퍼)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좋은 것을 가져와도 하나님은 그보다 무한히 더 좋은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강력한 힘에 매료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강하십니까? 전능하십니다. 힘을 좀 쓰면 휴식이 필요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지식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모든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는데 하나님은 모르는 무언가가 있지 않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지혜로우십니까?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지혜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즐거움과 행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변하지 않는 영원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죄악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은 최고의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과 구분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위엄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위대하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영광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이것을 “여호와의 아름다움”(4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나 사모할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면 그분께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만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치 요즘 같은 폭염에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가 아니라 햇빛이 내리쬐는 남사중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형제님들을 보고 있는 자매님들과 같은 심정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형제님들이 알고 있는 가치를 모르고, 알더라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구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그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즐겁게, 기꺼이,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B. 하나님의 행사

사실, 다윗이 “여호와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때, 다윗은 하나님의 속성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 드러나는 것, 하나님께서 그 속성에 따라 하시는 일들도 그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27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13절에서 결국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는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을 베푸실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난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까요? 우리는 절대적인 능력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했었는지 그리고 하고 있는지를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더욱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하나님도 그러실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에 대해 ‘은혜로우시다’, ‘자비로우시다’, ‘사랑 많으시다’, ‘선하시다’라고 말합니다.

“시 103:8 [다윗]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민 14:18 [모세,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

“느 9: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 후 회개하며 예배할 때 함께 드린 기도] …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 5:10)이라 표현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고 정의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고후 1:3)이며 “긍휼이 풍성”(엡 2:4)하신 분으로 표현합니다. 왜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셔서 그런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선하신 일의 절정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일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롬 5:6-11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정말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를 구원하신 일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차피 별 것 아닌 일이라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 그 크신 은혜, 놀라운 자비, 끝없는 긍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선하신 일을 하십니다. 좋은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은 그 여호와의 선하심의 절정을 맛본 자들입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보다 더욱 더 분명하게 구원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조차 부끄러워질 만큼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없다면 큰 일 나는 분이실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예배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애초에 사람을 창조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명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마땅한 것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우리에게도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보면 시편의 기자들은 하나님에 매료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기에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시편 기자들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다들 그랬습니다. 사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분을 예배합니다.

모세는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우리는 정말 놀라운 것을 목격하고 경험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구약의 그 어떤 성도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체험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들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며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는 자들이 없습니다. 막막함 속에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며 지루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를 기억하고 더욱 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고 거기에 우리의 참된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구역 모임을 위한 질문들

  1. 우리가 창조된 목적, 구원받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왜 중요합니까?
  2.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무엇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길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