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본문 : 고린도전서 14장 40절
설교자 : 조정의

우리는 몇 주에 걸쳐 예배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누구를 예배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을 하나님답게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왜 예배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창조와 구원의 목적으로서,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신 선하심을 기억하며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형식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설교입니다. 예배에 대한 자세와 방법을 함께 다뤄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라는 것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기에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롬 12:1; 벧전 2-3장). 그래서 오늘은 질문의 폭을 좁혀서 어떻게 공적 예배(회중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현재 우리는 이미 예배의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 혼자서 마이크를 잡지 않고 형제님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정숙을 요하고, 만찬 예배시간을 뒷부분에 배치합니다. 한 몸을 상징하는 하나의 떡을 준비하여 만찬에 참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위적인 형식입니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기 위해 그분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형식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쳐주신 예배의 형식이 있을까요? 감사하게도 성경은 예배의 목적과 대상을 말씀하면서, 또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배의 형식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품위 있는 예배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고전 14:40)

이는 회중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서, 당시에는 은사를 가진 형제들이 나와서 자발적으로 은사(찬송시, 설교, 계시, 방언, 통역 등)를 활용하여 모든 성도가 그것으로 유익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예배가 품위 있고 질서 있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형식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인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규칙이나 형식을 만드는 것을 인위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인위적이지 않은 형식은 없습니다. 모든 형식은 인위적이고 그러한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 회중 예배는 없습니다. 다만 그 형식이 ‘본질을 벗어났는가’, ‘품위가 있는가’, ‘질서가 있는가’를 판단해야합니다. 형식을 갖추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부분은 품위와 질서가 있는 형식을 갖추는 것이지 형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품위와 질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품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과 장소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상황에 알맞게 행동합니다(축구 관람, 장례식). 본문에서 바울은 예배에 합당하게 반응할 것을 요구합니다. 방언과 예언을 할 때 순차적으로 참여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고, 여자들에게는 잠잠할 것을 명령합니다. 예배의 형식을 갖출 때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합당하고 알맞은 형식인지, 질서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행하고 있는 형식 가운데서 성경에서 명하신 것을 실행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은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승진이나 결혼, 개인적인 간구 등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세속적인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배에서 기념하고자 하는 목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품위 있게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의 진리와 떡과 잔에 어울리는 내용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형식에 있어서도 합당해야 합니다. 나에게 진심이 있다 하더라도 노란색 옷으로 장례식에 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바른 내용을 나누고자 앞에 나왔다 하더라도 바른 방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자신이 너무 기쁘다 해도 예배시간에 특송을 하거나 춤을 추지 않고 랩을 하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볼 때 찬송시나 기도, 예언 등 언어로 진리를 선포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자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품위 있는 예배를 위해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심으로 찬양하고 낭독되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묵상하며 기도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알맞은 자세와 태도를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배에 관람자의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예배 인도자들을 판단하고 관중석에 앉아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으신 분들이라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신 분들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자입니다. 우리는 관중이 아니라 우리는 경기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입니다. 한 마음으로 예배에 집중하는 것이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의 형식입니다.

 

2. 본이 되는 예배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과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24-25절). 성도들의 예배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질서를 바로 잡고 알맞고 품위 있는 예배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방문자들에게 영향력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식을 취하든지 믿지 않는 자들이 볼 때 이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각 가정에 있는 어린 아이들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이 가치가 참 귀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 이 가치를 전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시간에 아이들이 어른의 수준에 맞춘 찬양과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세계적인 명소나 박물관의 명화를 보여주면서 아이에게 그것이 가진 가치를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가치, 선하심의 놀라움, 사랑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예배시간에 함께 참여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여러분은 본이 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회중 예배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훈의 시간인 것입니다. 교회에 오기 전에 예배를 기대하는 마음과 기쁨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회자의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부모의 교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모습, 예배시간에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훈육과 부모가 예배드리는 모습의 괴리감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신학교수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자라온 가정환경에 대해서 물었을 때 자신의 집에선 한 번도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훌륭한 신앙인으로 자란 이유는 아버지가 보여준 본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슬프게도 수많은 자녀들이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괴리감에 환멸을 느끼고 진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3. 덕이 되는 예배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4장 26절).

예배를 교회를 굳건하게 세우고, 강하게 하고, 유익을 얻게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은 아무도 유익을 얻지 못하니 하지 말라고 금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방언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들은 자신이 느낀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모든 성도를 대표하여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말씀과 찬양, 기도로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이유가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이듯이, 예배에 참여하는 형제님들도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참여하기보다 대표성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해야합니다. 모든 형식은 모든 성도에게 고루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예배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참석한 교회에는 ‘아이돌봄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성인 예배를 드리는 동안 다른 방에서 아이들이 수준에 맞게 예배를 드리도록 분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미취학 아이들을 돌보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주일학교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매우 귀하다고 여기는 교회였는데 아이들을 성인 예배에서 분리시켰습니다. 덕이 되는 예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모에게나 아이들에게 이것이 더욱 덕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형식을 택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성인 예배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과 찬송가를 견뎌야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이돌봄 프로그램’은 아이들 입장에서 더욱 유익이 되는 시간입니다. 아이를 훈육하느라 집중하지 못하는 부모에게도 유익이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훈육하고 본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자신은 10년 간 말씀의 유익을 얻지 못했다는 어떤 자매님의 말을 듣고 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경우, 교회에 처음 방문하신 분들은 아이들의 소리로 예배시간이 산만하다고 느끼고 어린 자녀들이 있는 가족의 주위에 앉은 다른 분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이를 옆에 두고 예배를 보여주며 부모가 신앙의 본이 되는 가치도 중요하지만, 부모와 자녀, 주위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좋은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는 것은 성경적인 원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아이들과 성도들에게 더 많은 유익을 끼치기 위함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에 대해 회중 예배 안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품위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 앞에 합당하고 알맞게 질서 있게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본이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믿지 않는 아이, 방문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예배를 통하여 모든 성도에게 유익이 되는, 덕이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