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온전치 못한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요한계시록 3장 7-13절

설교자: 최종혁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책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정말 잘하고 싶은데,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그렇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이런 힘이 있었으면, 이런 재능이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단순한 바람을 넘어서 ‘그랬어야만 했는데’하는 후회가 커질 때도 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그런 자책도 비례해서 커진다.

참된 성도라면 다른 무엇보다 주님께 대해서 이런 마음이 많을 것이다.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의 부족함이 신경쓰이는 것이다. 능력에 있어서도 그렇고 죄에 대해서도 그렇다. 신앙생활을 10, 20년을 했는데 여전히 나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전도에 대해서도 항상 부담은 있지만 제대로 전도를 해보지도 못했고 그러니 내가 주님께 인도했다고 말할 만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맡아서 하고는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든다. 빨리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야지하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내가 주님과 교회에 더 방해만 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 일이 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잘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는 생각들이다.

성도 개인으로서도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지만, 교회로서도 비슷하다. 지역 교회의 고민은 항상 주님께서 교회에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데 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주님의 명령대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할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뭔가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교회 소식을 들으면 부럽기도 하다. 성도 수가 늘어나고 그만큼 지역 사회에 기여도 하고 선교도 하는 교회들을 보면 그렇다. 이것이 자칫 질투가 될 수도 있지만, 순수하게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어느 교회와 같아지거나 그 교회를 이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교회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계시록의 6번째 편지를 받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8절). 그들 스스로는 ‘우린 이정도면 괜찮은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이 “아니야, 너희 별거 없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다. 완벽함보다는 부족함에 더 가까운 교회였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님을 위해 더 많을 일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보내신 편지가 도착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3:7–13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은 이들의 온전치 못함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약속의 말씀을 주시며 이들을 격려하셨다. 이 편지를 통해 우리 교회와 개인에게 주시는 주님의 격려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자.

편지의 서론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7절)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다른 소아시아의 많은 교회들처럼 바울의 에베소 사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이전 도시인 사데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48km 거리에 있었다. 계시록의 일곱 도시 중 가장 신생 도시로, 형에게 충성했던 아탈루스 2세의 별명인 필라델푸스의 이름을 따서 “형제 사랑”이라는 뜻의 필라델피아로 명명되었다. 필라델피아는 서신서에 종종 등장하는 단어이지만, 이 도시명은 그런 성경의 배경과는 관련이 없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최소한 한세기 전에 이미 필라델피아로 불렸기 때문이다.

빌라델비아는 소아시아 동쪽의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동양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명칭을 얻은 도시다. 무역로가 교차하고 버가모, 사데를 거쳐 동쪽으로 이어지는 로마의 우편 도로가 통과하는 등 중요한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도시였다. 문제는 그곳에 지진이 자주 일어났다는 점이다. 특히 AD17년에 사데를 초토화시켰던 지진은 인근의 빌라델비아도 황폐시켰다. 최소에는 사데가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진앙지에 가까웠던 빌라델비아는 여진이 더 오래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인구가 주변으로 빠져나갔다. 

로마의 도움으로 도시를 재건하면서 황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도시 이름을 ‘네오가이사랴’로 부르기도 했지만, AD92년에 로마 황제는 군대를 위한 곡물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서 빌라델비아 경제의 핵심이었던 포도 재배를 제한하였다. 여기에 흉년까지 더해지면서 빌라델비아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도시의 생계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어쩌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런 불안 요소와 장애로 인해 그렇게 성장하지 못했고, 교회도 마찬가지의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떠나갔다. 성도들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했을 것이다. 

9절을 보면 이들 중에도 서머나 교회와 같은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cf. 계 2:9)

. 예수님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이 교회를 비방하고 핍박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한계를 경험하고 성도들은 좌절했을 것이다. 작은 능력을 가진 그들에게 주님께서 편지하신 것이다.

지금까지의 편지에서 예수님은 1장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표현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셨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구약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신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7절)

자연스러움을 위해 이렇게 번역되었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자신을 표현하셨다. 즉, 이 표현은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강조하기 보다는 호칭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거룩한 이”는 구약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호칭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서 표현된다. 또한 메시아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로 표현된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절대적인 거룩이기 때문에 유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하나님 외에는 “거룩한 이”로 불릴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속성이 신약에 와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사용되었고, 여기서는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편지를 보내고 계신다.

“진실한 이”는 이 맥락에서는 ‘거짓이 아닌 참이신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교회를 대적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거짓 메시아라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참된 메시아이심을 스스로 증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참된 메시아시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가지고 계신 절대적인 권세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사야 22:22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 구절만 읽어 보면 그대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 같지만, 사실은 당시의 엘리아김이라는 사람에게 국고를 맡기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다. 엘리아김이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다윗 집의 접근을 통제하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메시아인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다윗의 뿌리이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계속해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다. 이 나라는 지금이 아닌 미래에 실제로 이 땅에 세워지겠지만, 지금도 그 통치의 영역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확장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결정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계시록 1:18에서는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표현했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생명과 구원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표현되었다. 우리의 운명에 대한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의 왕으로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예수님은 엄중하고 단호하게 이 편지를 보내는 분의 권위를 강조하셨다.

궁금한 것은 왜 예수님께서 이 작은 교회에게 편지하시면서 자신을 이런 절대적 권위를 가진 분으로 표현하셨느냐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목자나 아버지같은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한 이미지를 사용했으면 좋았을텐데,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빌라델비아 성도들은 그런 비슷한 이미지로 주님이 묘사되었던 에베소나 두아디라와 같은 책망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동양으로 가는 관문”에 위치한 만큼 복음을 더욱 확장하기는커녕 그 지역에서의 영향력도 미비한 것이 마음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고 격려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난다. 주님은 이들에게 3개의 약속을 주신다. 

8절 : 네 앞에 열린 문을 계속 두겠다.

9절 :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네 원수들이 알게 하겠다.

10절 :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

편지의 본론

약속 1. “네 앞에 열린 문을 계속 두겠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절) 

우리말 번역은 순서가 달라졌는데, 본래 주님은 여기서 다른 편지에서처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먼저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혹시 오해라도 할까봐 염려라도 하신 듯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절)

앞서 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바로 그들 앞에 누구도 닫을 수 없는 열린 문을 계속 주신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유대인 회당의 문은 닫혀 있었다. 회당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교회를 핍박했다. 더구나 교회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이방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자신들 앞에 무릎 꿇게 될 원수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는데, 그런 이방인도 아무런 조건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그들이 볼 때 이단 사상이었다. 이방인들이 그런 말을 한다면 모르겠지만 같은 유대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교회를 핍박하고 회당에서 쫓아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그 장면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계속해서 경험해야 했던 그 일이 빌라델비아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교회가 처한 이런 상황으로 인해서 낙심할수도 있었겠지만, 정작 그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린 문은 회당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있었다. 예수님이 아니면 누구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구원의 열린 문을 교회 앞에 두신 것이다. 이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실함’으로 그들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8절)

이것이 주님이 알고 계신 그들의 행위였다. 주님은 이들의 “작은 능력”을 언급하셨지만, 그것 자체를 칭찬하신 것도 아니고 책망하신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들의 믿음을 증명한 것은 능력의 크고 작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능력을 통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루었는지도 예수님은 신경쓰지 않으신다. 성도 수가 얼마나 늘고 있는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능력이 크든 작든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작은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들의 신실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큰 능력을 가지면 더 하기 쉬운 일들이 있을 것이다. 만약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이 회당의 유대인들을 압도했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그 도시 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고난도 적었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기 더 용이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생각지 못한 다른 측면에서의 어려움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가운데 그들이 주님의 말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셨다.

주님의 말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였다.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

또한 주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라고도 말씀하셨다(요 8:47).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구원 받은 사람의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특히 10절에서 주님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 말씀하신다. 주님은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끝까지 인내할 것을 제자들에게 여러번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과하시면서 그런 인내의 본을 보여주셨고, 사도들은 교회에게 주님의 인내를 본받을 것을 격려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렇게 어려움 중에도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진리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한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 결과 그들은 더욱 핍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서 교회의 숫자는 더 줄었을 수도 있다. 안그래도 힘든 삶이 더 힘들어졌을 것이다.

교회가 바라는 것이 그래도 좀 삶이 나아지는 것이었다면, 신실한 삶을 사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이 참된 구원, 영생이었다면 그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약속이 주어졌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열린 문”은 말 그대로 열린 문이기에 그들이 들어갈 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인도하여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문이기도 하다. 즉, 주님께 신실한 자들에게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신실하게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힘이 되는 약속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약속이다. 내 능력이 작아 부끄러워도, 오랜 노력의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온전하지 못한 교회여도, 우리가 주님께 신실한 교회라면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신다. 

당연한 얘기다. 하나님께 우리의 작은 능력이 문제 되지 않는다. 우리의 큰 능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모든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상관 없는 것이다. 깨끗한 그릇이면 된다. 작은 능력이든 큰 능력이든, 신실하면 된다. 주님은 그런 성도를, 그런 교회를 칭찬하시고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신다.

약속 2.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네 원수들이 알게 하겠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절)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어려움을 가중 시켰던 사람들은 바로 회당의 유대인들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핍박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교회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주님은 그들의 모임을 “사탄의 회당”이라는 거친 표현으로 지칭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씀하셨는데(요 8:44), 빌라델비아에 있던 유대인들도 그러했던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자칭 유대인”이라고도 표현하셨다.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닌데 유대인인 척 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39). 즉, 아브라함이 행한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말했다(롬 2:28-29). 육적으로 유대인이면서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빌라델비아 회당의 유대인들은 이런 면에서 그저 거짓말을 하는 자들일 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행하시겠다고 하신 이 말씀이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9절)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던 자들 중 몇을 교회에게 주어서 그들 앞에 와서 절하게 하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발 앞에 절한다는 것은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의 언약의 성취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굴욕적인 말이다.

60:14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던 날은 바로 이런 날이었다. 그들을 괴롭히던 이방인들이 그들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도 그런 메시아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의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인이 이방인이 포함된 교회 앞에 절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궁극적인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을 의미할 것이다. 이사야 53장에서 그 때의 유대인들이 고백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듣지 않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 이들은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 나라를 이 땅에서 시작하실 때에 일어날 일이지만, 바울처럼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이 회심하는 일도 빌라델비아 교회 안에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을 통해 교회는 주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약속을 통해 더욱 분명히하고자 하는 진리는 이것이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절)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친히 증명하실 것이다. 온전하지 못하고 능력이 작은 교회라고 해도 주님께 신실한 교회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셨고 여전히 사랑하신다. 그 사실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님께 신실할 때, 주님의 그 사랑이 드러나고 우리도 그 사랑을 더욱 경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이 더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다면, 그들 가운데서도 구원 받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약속 3.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10절)

여기서 주님은 특별한 “시험의 때”를 언급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시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미 많은 시험을 당하고 있었다. 그 시험 중에 교회는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있었고, 11절을 보면 주님은 계속해서 그렇게 할 것을 명하신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이 “면하게 될 시험의 때”를 말씀하신다. 이 때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말씀을 찾아보고 해야하지만 오늘은 이 때에 대해서 주님께서 묘사하신 이 표현들만 보자. 이 시험의 때는 1) 지금이 아니라 장차 임할 것이고, 2) 빌라델비아 도시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할 것이며, 3)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때가 될 것이다. 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는 항상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전 지구적인 시험의 때가 장차 있을 것을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계시록 6장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이 시험의 때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시험 가운데서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얘 그 시험을 벗어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것은 시험이 임할 때 이 땅에 있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전에 세상을 떠나거나 그 시험의 순간에 세상을 떠나면 된다. 바울은 이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비록 지금은 시험을 당하고 있지만 믿음을 지키는 교회를 주님은 극심한 대환난의 때 전에 휴거를 통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실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로 “서로 위로하라”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했다. 빌라델비아 교회도 이 사실로 인해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능력이 작고 원하는만큼 충분히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온전하지 못한 교회이지만, 주님은 그들의 신실함을 아셔서 구원의 문을 열어 두셨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시며 또한 최후까지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것이다.

명령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11절)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이 말씀은 누군가에게는 두려운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격려가 되는 말이다.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경우는 격려가 되는 말이다. 주님의 오심은 곧 그들의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 열려있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주님은 신실할 것을 원하셨다. 그때까지 성도 수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한다거나 빌라델비아 제 2성전 같은 것을 지어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선교사 몇 명을 파송하고 어떤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거나 하는 말씀도 전혀 없다. 그저 “가진 것을 굳게 잡을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영생의 면류관을 받을 자들은 그런 자들이다.

편지의 결론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12절)

끝으로 주님은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여기서 주님은 지진으로 불안해 하고 회당에서 쫓겨났던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절대 흔들리지 않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그들은 성전의 기둥같이 될 것이고 결코 다시 나가게 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안전히 거할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세 이름을 언급하신다.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예수님의 새 이름이다. 이들은 확실히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새 예루살렘에 속한 백성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지금껏 부분적으로 알던 주님이 아니라, 요한의 말처럼 그분이 계시는 모습 그대로 영광스러운 모습의 주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끝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3절)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주님의 말씀을 들었는가? 온전치 못한 교회인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어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까? 

온전한 교회는 없다. 책망 받지 않은 서머나나 빌라델비아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책망 받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온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결과로서의 온전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낙심이 될 때가 있다. 더 유능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주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꼭 교회 안에서의 일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우리의 약한 능력이, 그로 인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주님은 원하지도 않으시는 결과의 온전함을 우리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좌절하고 넘어진다. 왜 이런 작은 능력만 나에게 주셨냐고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온전함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방향이지 결과는 아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과정에서의 신실함이다. 때로는 신실함의 결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30배를 맺든, 60배를 맺든, 100배를 맺든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5달란트를 남기든, 2달란트를 남기든, 1달란트를 남기든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주인의 말씀에 따라 충성했는지가 중요하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을 받은 것은 작은 능력으로 많은 일을 해서가 아니다. 작은 능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그 말씀을 지켜온 것, 즉 신실함 때문이었다.

우리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업적과 성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왔는지가 중요하다. 그들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힘을 얻기 바란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이 고백을 우리가 함께 고백하자.

딤후 2: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신실하신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