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법

본문 : 로마서 12장 14-21절

설교자 : 이병권

샬롬은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지금 샬롬이라는 인사가 더욱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평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더욱 평화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평화가 필요합니다. 평화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화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는 명령이 나오는데 여기 나오는 ‘화목하라’는 단어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성경에는 ‘평화하라’라고 번역했었습니다.

사람들과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는 것,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일까요?

어린왕자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라고 소개되는 글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은 어린왕자가 아니라 소금편지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같아. 각각의 얼굴만큼 이나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은 순간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 같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마음을 얻는 것,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화목하게 잘 지내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직장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업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는데 사람이 힘든 건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러 조언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 사람을 대하는 방법, 그에 대한 조언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처세술이 필요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기 위해서, 진리를 가진 공동체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며 우리가 가진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우리도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조언이 필요하고 그러한 방법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사람들과 화목하게 잘 지낼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다릅니다. 우리의 목적은 단순히 나의 유익을 위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넘어서 그들의 영혼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것이고 화목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법’, 우리가 어떻게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 따라 그 난이도가 달라지는데 세 단계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법 1단계는 공감하기입니다.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5절의 대상은 즐거워하는 사람, 그리고 우는 사람입니다.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는 것, 그렇게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 공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면에서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쉬운 일이지만 경우에 따라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즐거운 일이 나에게는 괴로움이 될 수 있고 시기심이나 미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안 좋은 일에 대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원수가 망하면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러합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지난 본문과 같이 여러 명령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바탕에는 거짓 없는 사랑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배경으로 해서 본문의 명령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의 성공이나 기쁨을 두고 질투하거나 심술을 내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그 사람의 즐거움에 동참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슬픔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함께 슬퍼하며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기쁨과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잔치에 참여하셨고 그들을 위해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죄인들과도 함께 먹고 즐기며 기쁨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함께 우셨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이유가 되신다면 무엇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고 무엇이 우리의 슬픔이 될까요? 주님을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의 기쁨에 반감을 가질 이유가 있을까요? 주님을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의 슬픔에 동참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히려 그 마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법 2단계는 겸손하기입니다.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6절에는 어떤 대상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 성경은 “낮은 데”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 의미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들은 “비천한 사람”, “낮은 자들”,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등으로 번역합니다. 쉽게 말하면 교만하지 말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내가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 대상에서 빼기가 쉽습니다. 가까이 해봐야 별 유익이 없을 것 같으니 친구 목록에서 제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 없는 사랑은 도리어 낮은 자를 향합니다. 사랑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랑은 겸손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들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다니지 않는 시장을 방문해서 상인들을 만나고 길거리 음식을 먹기도 하고 시민들과 어울리는 일을 합니다.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한꺼번에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낮은 데 처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겸손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없는 진짜는 그런 이벤트가 아니라 삶으로 증거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체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삶이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내 안에 있는 교만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교만은 내가 맞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고 말합니다. 교만은 나는 그럴 자격이 있지만 다른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교만은 나는 할 수 있고 그래도 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교만이 끼어들면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입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는 법 3단계는 축복하기입니다.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단계와 2단계는 세상 사람들도 말하는 처세술입니다. 하지만 3단계는 차원이 다릅니다. 난이도가 아주 높아집니다. 대상이 박해하는 자입니다. 가까이 하기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박해하는 자에 대해서 이렇게 해야 합니다. ‘축복하기’ 그리고 ‘저주금지’ 축복과 저주는 우리의 말에 대한 것입니다. 박해하는 자에 대해서 말로서 선을 행하고 말로서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 가장 즉각적이고 쉽게 할 수 있는 대응이 말입니다. 그 사람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 같습니다. 비록 그 앞에서 어렵더라도 뒤에서 보이지 않을 때 저주하며 주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면 만족도는 더 커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것을 명령합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처세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6:27-28)

자기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축복하라는 명령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부담스럽고 불편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3단계는 좀 더 구체적인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말로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는 명령은 행동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축복하기’에서 ‘선행하기’로 ‘저주금지’에서 ‘복수금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복수심이 있습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당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갚아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복수심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려움과 같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 가려운 부분을 내가 긁을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복수를 할 수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행하는 복수를 보며 대신 만족을 얻고 통쾌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용서하고 받아주는 마음 따뜻한 이야기보다 복수하고 되갚아주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열광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악을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반응해야 함을 명령합니다. 악을 행한 사람을 축복하고 그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니, 저주하지 말고 복수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니, 우리에게 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를 박해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18절의 말씀은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순종했을 때 그 결과로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에도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따라야 하는 명령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주어진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을 보응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악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한 악을 가볍게 여기고 그냥 넘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것을 망가뜨리는 것이 악입니다. 절대 용납될 수 없고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악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살펴볼 본문은 하나님이 권세자들을 통해 악을 보응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죄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와 말씀을 따라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악을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 대해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악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령입니다. 맡기라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잠언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숯불을 머리에 쌓아 놓는다고 하니까 원수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며 복수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보다 원수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돌이키게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원수를 섬김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복수금지는 마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데 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섬기라

3단계에서 요약된 명령들을 다시 정리하면 첫째, 맡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둘째, 섬기라 차원이 다른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이기라” 입니다.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 대해서 우리가 악이 아니라 선으로 대응할 때 그럴 때 우리가 악에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악에 대해서 이기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승리를 위한 구호가 있습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오늘 명령으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맡기자! 섬기자! 이기자!’ 사람과의 관계에서 악에게 승리하기 위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 레미제라블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감옥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장발장은 머물 곳 없는 딱한 상황이었지만 미리엘 신부의 도움으로 그 집에 머물며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장발장은 그 은혜를 저버리고 은접시를 훔쳐 도망갔고 붙잡혔습니다. 하지만 미리엘 신부는 오히려 장발장을 걱정해주고 은촛대를 놓고 갔다며 은촛대까지 주며 더 큰 은혜를 베풉니다. 그렇게 장발장은 은혜를 경험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왜 감동적인 걸까요?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특별히 더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장발장이 경험한 은혜를 우리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장발장과 같은 자인데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에 대해서 악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승리하신 주님,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주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해봅니다. 지금 우리가 원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우리 목숨을 위협하고 박해하는 대적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그런 원수에 대해서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은 그보다는 쉬운 사람이 아닐까요?

솔직히 사랑으로 섬기고 용납하고 가까이 하기에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인내하며 계속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숯불을 쌓아올려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숯불의 따뜻함을 즐기고 이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해야 하나? 이 방법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 생각되는 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 정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일, 주님은 그 일을 원하십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까지 사랑으로 반응하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복수하기를 거절한다면,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한다면, 선을 행하는 것으로 순종한다면,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면, 사랑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진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