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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예배자의 세 가지 발견
본 문: 이사야 6장 1-8절
설교자: 이 병 권
“웃 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지 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제가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여기에 앉아계십니까? 황금 같은 휴가 기간에, 편히 쉴 수 있는 휴일의 여유를 뒤로하고, 교회 오기 위해, 다양한 수고와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금 여기에 계신 여러분, 여러분은 왜 교회에 오셨습니까?
여 러 가지 다양한 이유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에는 집사람이 밥을 안 주거든요. 밥 먹으려면 교회에 와야 합니다” “형제들과 같이 축구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서 교회에 옵니다” “맡은 일이 있어서 가지 않으면 안돼요. 어쩔 수 없이 교회 옵니다” “교회 안 가면 부모님이 용돈을 안 준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와요” 우리가 교회에 오게 되는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이런 것들을 근본적인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저는 오늘 왜 교회에 왔을까요? 설교하기 위해서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첫째 되는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오는 첫째 되는 이유 근본적인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하기 위해 교회 온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내가 교회에 오는 첫 번째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이지’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함입니다. 그 분을 찬양하며, 그 분께 감사하며, 그 분의 사랑과 그 희생을 기억하고,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이를 위해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다가 가시면 안 됩니다. 매 주하는 거니까 대충 적당히 시간 때우기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한주도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왔다 하더라도 그러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자로서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배를 통해 발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배 가운데 그것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사야 말씀을 토대로 예배자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본문에 1절을 보면,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으로 갑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를 52년간 다스렸던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통치 기간 동안 웃시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부강했으며 군사적으로 막강했습니다. 블레셋을 정복했고, 암몬에게 조공을 받았습니다. 웃시야의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웃시야는 교만하여져서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 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별궁에서 홀로 지내게 됩니다. 그 웃시야 왕이 죽은 때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나 라의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성전에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사야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유다를 다스리며 나라를 부강하게 했던 이 땅의 왕은 죽었지만, 백성들이 바라보며 의지했던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유다뿐만 아니라 그 모든 나라를 다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왕을 보았습니다. 참 왕이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사야가 본 하나님의 모습은 한 마디로 놀라웠습니다. 그분은 높이 계셨고, 위엄을 상징하는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스랍이라는 특별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큰소리로 서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스랍들이 “거룩하다”라고 세 번 반복합니다. 그것은 정말 지극히 거룩하다. 더 이상 비할 데 없이 완전하게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정말 정말 정말 진짜 진짜 진짜 진짜로 완전히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별된다’ ‘다르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완전히 구별되신 분이십니다.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 어떤 존재와도 같지 않은 거룩하신 완전히 다른 분이십니다. 그 영광 앞에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천사들만 하나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하나님을 봤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자가 예배 가운데 봐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지 금 예배 가운데 계신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시선이 이 강대상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 강대상 너머를 바라보십시오. 이 공간 너머 진정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주일에 교회 와서 봐야 할 것을 보는 대신 안 봐도 될 것들을 열심히 보고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은 예배 중에 성도들을 부지런히 관찰하고 분석합니다. “저 형제님의 넥타이 색깔이 너무 강한 거 같아” “어머! 저 자매 머리했네” “목사님 머리가 더 하얗게 되신 거 같아, 염색하셔야 될까봐” “오늘 내가 중요한 거 발견했는데 병권형제 얼굴에 여드름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애” 네, 맞습니다. 갈수록 제 얼굴에 여드름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드름을 짜는 제 아내의 즐거움도 커지고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우리가 바라봐야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배 중에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다른 무엇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 랑하는 여러분! 마음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육신의 눈부터 크게 뜨셔야 하겠습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보게 되면, 주님의 은혜의 영광이 내 심령에 비취면, 이 땅의 일들은 빛을 잃게 됩니다. 하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면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말씀하시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그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십시오.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또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엄위하신 하나님, 죄 없는 천사들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던 거룩하신 하나님, 성전 문지방의 터를 흔드시는 권능의 하나님, 연기로 성전을 가득 채우신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 하나님을 보고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고서 제일 먼저 한 말입니다. “재앙이로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이사야는 하나님을 봤다고 으스대며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보았다.’라는 책을 출판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본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사람들에게 강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악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한탄하며 울부짖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났다고 떠들지 않습니다. 예배자는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자신의 죄악과 연약함과 무가치함에 가슴을 치고 애통합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조차도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너무도 거룩하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눈부신 빛 안에서 너무도 비천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햇빛이 이곳에 들어왔을 때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무가치하고, 얼마나 허물이 큰 사람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집니다.
우 리는 우리 자신의 실상을 잘 모르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래도 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알리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세상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홍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영어로 하면. 자기 PR의 시대. 자기 PR 이라고 하면 자신을 홍보하는 것, 한마디로 광고하는 것입니다. PR.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 우리는 실제보다 더 낫게 보이도록 자신을 치장하고 포장하는데 너무도 능숙합니다. 여러분 사진 찍으면 어떻게 합니까? 포토샵으로 수정합니다. 요즘 증명사진을 찍으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사진관에서 고쳐줍니다. 때로는 이게 누구 사진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깔끔하게 고쳐주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실제보다 더 낫게 보이도록 해주는 것들로, 약한 것은 가려주고, 꾸며주고, 치장해주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키가 좀 작으면 어떻습니까? 신발 속에 깔창을 깔고 키 높이 구두 신으면 됩니다. 얼굴이 좀 안되면 어떻습니까?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화장으로 변장을 하면 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살짝 손봐서 고치면 됩니다. 비싼 옷으로 잘 차려 입고 좋은 차를 타면, 그것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모든 포장과 우리를 꾸며주는 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준이 되시면, 우리가 그분 앞에 서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직면하게 되면 한 낱 피조물일 뿐인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놀라고 떨며 엎드려 지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베드로처럼, 나사렛 예수가 보통분이 아님을 알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그 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 때문에 아파하고 떨며 두려워하는, 상하고 부서진 마음을 가진 그 예배 자에게 하나님께서 다가가셔서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한 이사야의 그 입에, 하나님의 천사가 숯을 데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애통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나아올 때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하 나님은 가식적인,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는 예배자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여전히 자아가 살아있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똑똑한 사람, 자신이 훌륭하다고,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정말 자신이 죽을 만큼 죄인인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지고 낮아진 마음을 원하십니다.
다 윗은 이 진리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깨진 마음, 아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 우리가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여러분을 멸시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로 감격하게 하시며,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의 기쁨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더 열정적이고, 더 순수한 예배자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동시에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사명을 발견합니다. 8 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이사야는 유다의 정치적, 영적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까?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이 깨어지고 아파하는 세상에서 내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누가 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렇게 자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명에 자신을 기꺼이 드린 것입니다. 죄인을 깨끗하게 하시고, 무너지고 상한 마음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이렇게 자원했던 것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인 나를 살려주셨는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분명하고도,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사명에 헌신하게 됩니다.
여 러분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단순히 종교적인 예식도, 감정적인 행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마음에 감동이 되고, 때로 눈물이 납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며, 큰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그것은 부족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해서,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감격한 목소리로, 감동적인 내용으로 기도를 한다 해도, 아무리 기쁨으로 열정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른 다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드려진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주 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가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제를 보내소서” 세상의 문제를 봅니다. 교회의 필요를 봅니다. 다른 성도들의 어려움을 듣습니다. “네 잘 봤습니다. 네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 네! 알겠습니다. 목사님을 보내소서” “하나님, 저 형제님, 저 자매님을 통해 일하소서” 농담처럼 들리지만.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껍데기뿐인 그런 예배가 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예배 때 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명령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그 사명에 반응하십시오. 그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주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교사를 후원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직장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 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교회에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돕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제 자신의 시간과 재능으로 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주시는 사명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예배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고 그분의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는 결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진 정한 예배자는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하고 이에 헌신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음으로써 예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일에 어떻게 헌신할지, 어떻게 교회를 섬기며, 어떻게 이웃을 섬길지,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널려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일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단하십시오. 큰 것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밥 퍼나눔’이라는 운동이 있습니다. 밥퍼나눔운동은 소외된 이웃들, 밥을 굶는 이들에게 밥을 퍼주겠다는 다짐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다섯 가지 구호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여 러분이 지금 할 수 있는 일, 작은 것부터 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마시고, 나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리고 교회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신 일, 그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결론
이 사야는 성전에서 자신이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봤습니다. 이사야는 영광의 하나님과 자신의 무가치함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도 예배 가운데 영광의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실체를 보고 주님 앞에 엎드려지고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보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물로 울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파하고, 하나님의 손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의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예배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 나님이 왜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나라에 태어나게 하셔서 날마다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입고 살게 하실까요? 왜 그러실까요?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고 계실까요? 왜 우리는 이 곳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지 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예배를 통해 발견하십시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순종의 걸음을 힘차게 내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를 그 사명 가운데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우리들이 이제 그 부르심에 응답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