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배자의 노래
본문: 시편 84편
설교자: 조정의
그리스도인은 나그네로서 이 세상을 산다. 우리의 본향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나님 나라이며, 이 땅에선 외국인과 거류민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나그네의 또 다른 이름은 예배자이다. 예배자는 이 땅에서 자기 삶을 영적 예배로 하나님께 바친다. 본향에 이르러 영원토록 천사와 성도가 함께 할 일도 예배이다.
오늘은 특별히 예배자로 살아가는 교회가 하나님께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예배자의 노래로 무엇을 고백할 것인지 시편 84편을 통해 살펴보기 원한다.
스펄전을 비롯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시편 84편을 150편의 시편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받는 시편이라고 말했다. 고핫의 후손인 고라 자손, 성전의 문지기와 음악 담당인 그들이 만든 찬송시이며, 깃딧이라는 블레셋 가드 지방과 관련된(혹은 포도주틀, 포도주 제조하며 부른 노래와 관련된 멜로디) 기타 모양의 악기에 맞춰 노래가 만들어졌다(대상 26:1).
시편 84편은 시온의 노래로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주제가 매우 유사한데, 예배자인 시편 기자가 하나님계신 성전을 사모하며, 그 성전에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 중에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온전히 신뢰하는 고백이 담겨있다. 이 시편을 통해 오늘날 예배자인 그리스도인,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같은 고백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사랑합니다(1-4)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3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예배자의 첫 번째 노래는 “사랑합니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시편 저자의 사랑은 1-12절까지 계속해서 표현되지만, 특별히 1-4절에서 아주 분명히 볼 수 있다.
시편 기자가 사랑을 고백하는 대상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천군을 거느리신 절대군주,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노래한다. 대단한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를 막연히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며, 시편 기자는 3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르며,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예배자는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능력의 하나님이다. 동시에 그분은 예배자의 하나님이시며 예배자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은혜로 그 백성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셨다.
하나님이 맺으신 관계 안에서, 예배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노래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가?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절). 주님이 계신 장막, 성막(성전)이 참으로 사랑스럽다고 고백한다.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계신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때문에, 그분이 자기 이름을 두고 계시고,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장소를 사모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절). 시편 기자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전인)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내 영혼” 그리고 “내 마음”, “내 육체”, 한 마디로 ‘나의 전부’가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합심하여 몰두한다.
시편 기자의 영혼은 여호와의 궁정, 앞서 말한 것처럼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만나주시는 그곳을 너무나 사모한 나머지 쇠약해졌다(사 40:7, “풀은 마르고”). 풀이 마름같이 영혼이 시들시들해지거나 사라져버릴 것 같은 간절하고 강렬한 사랑의 표현이다.
시편 기자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님을 향해 크게 소리 지른다. 괴로움과 애통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와 교통하시고 교제하시며 은혜와 영광을 친히 베푸시는 그분을 사모하기 때문에 크게 부르짖는 것이다.
이 땅의 예배자로 살아가는 교회가 부를 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도 하나님께 “사랑합니다”라고 전심으로 노래해야 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교회의 하나님, 교회가 영원히 섬기는 왕이시다. 그분이 인격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방법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통해서다. 한때 하나님의 원수였던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고백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거처로 삼으신 교회(건물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임), 영원히 거하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 한다. 사모하여 괴롭고, 간절하다 못해 애절하게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와 마음을 다해 그분께 사랑 고백을 드리자. 크게 부르짖으며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자.
하나님에 대한 시편 기자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질투로 변한다(3-4절). 악한 질투는 잘못된 것이지만, 참된 사랑은 질투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걸 보며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편 기자의 질투 대상은 첫째 새들, 둘째 제사장이다.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전 번제단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참새와 제비를 떠올렸다. 돌로 만든 번제단 사이사이에 새들이 둥지를 마련할 공간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성전의 넓은 뜰 주변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참새나 제비는 그렇게 값이 나가는 새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흔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새들이 여호와의 제단에 집을 짓고 산다. 참 부러울 따름이다.
4절에 나오는 것처럼 둘째로 부러운 대상은 제사장이다. 그들은 주의 집에 산다. 여호와의 장막, 여호와의 궁정, 시편 기자가 사모하는 그곳에 상주한다. 시편 기자가 영혼과 마음과 육체를 다해 찬양하기 원하는 주님을 그들은 항상 찬송한다. 일 년에 세 차례 성전에 모여 예배하는 순례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러운가!
하지만 만일 시편 기자가 오늘날 교회를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새들이나 제사장보다 우리, 즉 교회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교회의 머리 곧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0:31).
새들이 여호와의 번제단에 깃들어 산 것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제단, 십자가에 우리는 깃들어 산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성전이라는 제한된 장소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주의 집에 사는 존재가 되었다. 친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주의 집이 되게 하셨다. 교회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 공동체다. 각 사람은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모일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깃들어 사는 은혜 받은 백성이란 사실을 확증하신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그분께 바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와 영원한 화목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은 그분에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온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노래하자.
- 갈망합니다(5-8)
5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두 번째 예배자의 고백은 “갈망합니다”이다. 5-8절은 예배자가 시온산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걸을 때 사모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갈망하며 인도하심을 구하는 노래다.
5절을 보면 예배자의 마음에는 “시온의 대로”가 있다. 히브리시 본문에는 “시온”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주님께 힘을 얻은 순례자의 마음으로부터 뻗어난 넓고 큰길은 분명히 시온을 향하여 나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하는 소원, 갈망이 있는 것이다(7절,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예배자의 갈망은 자기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주께 힘을 얻었다. 주님께서 예배자의 마음에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넣어주시고 불러일으키신다.
순례자의 길은 멀고 험하다. 도로가 잘 닦여 있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쉴만한 휴게소가 갖춰진 것도 아니다. 환경이나 기후가 좋지 않다. 광야의 건조하고 모래가 많은 길을 걷는 것은 정말 수고스럽다. 시편 기자는 그런 험난한 순례길을 가리켜 “눈물 골짜기”라고 불렀다(6절).
발삼나무가 있는 건조한 골짜기를 가리키거나 발삼나무를 뜻하는 히브리어 바카아와 발음이 거의 비슷한 바카하, “눈물” 골짜기, 고생과 수고가 넘쳐 눈물 나는 골짜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위로가 넘친다. 그 순례의 길,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줄 것이다(모두 미래형). 하나님께서 이른 비로 웅덩이를 채워 마시고 쉴 수 있는 샘을 많이 순례의 길 중에 준비해주실 것을 갈망하고 간구하는 고백이다.
순례의 길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는가? 결국은 7절에 노래하는 것처럼 예배자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필요할 때마다 힘을 계속해서 공급받아), 결국엔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것이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각기 목적지인 시온에 도착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 그곳에서 다른 예배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노래하게 될 것이다.
시온을 향한 대로를 마음에 품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 시온까지 여러 가지 수고와 고난을 감수하며 도달하도록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다. 8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예배자의 기도는 갈망의 기도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기도한다. 주님께서 그 마음에 불러일으키신 대로, 그 마음에 있는 대로를 따라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서게 해달라는 기도다.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언제나 힘을 주셔서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애굽 땅까지 선하게 인도하신 것처럼, 예배자는 야곱의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셔서 갈망하는 순례의 길을 무사히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오늘날 예배자인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는가? 예배 공동체인 교회가 갈망하며 부를 노래 제목은 무엇인가? 우리도 함께 모이는 것을 갈망해야 한다. 각자 있는 곳에서 함께 모이는 곳에 이르도록 주께서 우리 마음을 강권하시고 인도하신다. 당신의 마음엔 교회를 향한 대로가 있는가?
조금 더 확장해서 우리는 인생 자체가 순례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나님 나라에 각기 나타나기까지 눈물골짜기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길을 기쁨으로 걷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걸음걸음마다 인도하시며 은혜의 샘물로 힘을 얻게 하시고 위로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라. 마침내 주를 뵙고 예배하고픈 갈망을 담아 순례의 길을 걷도록 힘을 얻고 또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 신뢰합니다(9-12)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마지막 예배자의 노래는 “신뢰합니다”이다. 마지막 12절에 만군의 여호와를 다시 한번 부르며,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노래했다. 주를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이며, 그것이 참으로 복되다는 걸 믿는 신뢰의 노래다. 왜 주를 신뢰하는 것이 복인가? 하나님이 예배자에게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보자.
예배자에게 하나님은 방패시다(9, 11절). 모든 위협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말이다. 특별히 주님은 ‘기름 부으신 자’(왕)의 얼굴을 살펴 보시며 그를 통해 백성의 안위를 보호하신다. 오늘날 세우신 권세를 통해 교회를 고요하고 평안하게 살도록 보호하시는 것과 같다(딤전 2:1-2).
여호와 하나님은 예배자의 해가 되신다(11절). 모든 생명과 에너지를 공급하신다는 말이다. 여호와는 예배자에게 은혜와 영화를 주신다(11절).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신다. 영광을 나타내신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나아가 여호와는 예배자가 정직하게 행할 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하나도 감추거나 감하여 주지 않으시고, 주 앞에 정직하게 살아갈 때 그분의 모든 은혜를 풍성히 베푸실 것이다.
예배자가 언약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여호와께서 이런 분이시라면, 이렇게 자기 백성에게 인자와 은혜가 풍성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라면, 예배자의 따라오는 이 고백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와 함께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 사는 것보다 낫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좋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턱에 서 있는 것이 좋다’이다. 문 앞에 서 있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아무 집에라도 들어가서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편 기자는 악인의 장막에 거하며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성전 문턱에 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노래한다.
우리도 이와 같은 신뢰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악인과 함께 이 세상에 사는 것보다 천국 문턱에 서 있는 그것을 더 바라고 있는가? 천년만년 사는 것보다 주와 함께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가?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분이 나의 방패이시며 해이심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한 삶을 살아갈 때, 당장 눈앞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베푸실 것을 믿어야 한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분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는가?
코로나 19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다시 한번 이 세상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임을 피부로 와닿도록 느끼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이 세계 모든 사람을 위협하며 우리 인생이 풀처럼 금방 말라버리는 인생이라는 진리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이 험악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가? 짧고 허무한 인생 그 길에서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노래를 부를 수 있나?
첫째,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 영혼을 쇠약하게 만들 정도의 강렬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 하나님을 노래한다.
둘째,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에 하나님에 베푸실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또 얻어 마침내 그분 앞에 나타날 것을 갈망한다. 우리는 인도자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셋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주시고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시며 걸음걸음마다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믿음을 둔 하나님 그분을 노래한다.
아직 이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대로가 열리기를, 하나님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일으켜주시길, 그래서 이 복된 길을 함께 걷기를 기도한다. 예배자로 사는 이들이여! 함께 노래하자.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갈망합니다. 하나님 신뢰합니다. 이 노래가 우리가 함께 그리고 각자 처한 곳에서 날마다 부를 예배자의 노래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