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을 바꾸는 방법

본문 : 디모데전서 6장 1-2절

설교자 : 이병권

 

바울은 5장을 시작하면서 디모데가 교회의 여러 대상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권면합니다. 평범한 대상으로 시작한 권면은 특별한 대상이라 할 수 있는 과부와 장로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특별한 대상인 “종”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1-2)

종들에게 상전을 잘 섬기게 하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권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말씀이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사실, 종이라고 하니까 우리에게 익숙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종이라는 말을 많이 봐왔고 많이 들어왔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종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주인을 잘 섬기라는 명령을 봐도 별로 불편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셨습니다. 고난 받는 종이 되셨고 죽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자신을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을 보여주신 대로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라는 신분을 말하더라도 이것이 불편한 주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따라야 할 본으로서 우리도 종의 모습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여기 말씀에서 “종”이라는 것은 “노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재산으로 소유하고 사람을 도구로 이용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고 사람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뜻에 맞지 않는 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사람을 노예 취급하며 학대하고 인권을 유린했다는 뉴스입니다. 이런 뉴스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은 노예에 대해서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들을 향한 이 말씀이 조금은 불편해지십니까? 바울은 왜 이런 명령을 하고 있는 걸까요? 바울이 실제로 해야 하는 명령은 이런 명령이 아닐까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귀한 존재이니 다른 사람을 종으로 삼는 일은 금지하고 종들을 풀어주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노예는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1/3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노예의 수가 인구의 절반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노예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가장 천한 일에서 가정교사와 생산과 의료, 재산 관리에 이르기까지 사회 거의 대부분 영역에서 활동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러 가지 과학 기술과 기계들을 이용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노예들을 이용했고 노예들을 통해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노예제도를 오늘날 에너지 자원에 빗대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석유나 가스, 전기로 여러 편리함을 누리는 것처럼, 그 당시에는 노예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에너지 자원으로 활동했던 많은 노예들은 어디서 온 걸까요? 어떻게 노예가 되는 걸까요? 당시 노예제도는 인종 차별보다는 경제적인 것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이 노예가 되는 이유를 네 가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히거나 해적에게 납치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경매로 팔려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둘째, 출생에 의해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가 자녀를 낳으면 자녀도 노예가 되었습니다. 셋째, 유기된 아기를 노예로 삼는 경우입니다. 당시에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아기를 낳았을 때, 아기를 바깥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아기는 아무나 데려다가 노예로 기를 수 있었습니다.때로 가난한 부모는 자녀를 노예로 팔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원시적인 형태의 입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넷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가 되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해결되었고 주인의 뜻에 따라 일을 하며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 중에는 재산을 모아서 값을 치르고 자유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노예가 되는 것, 종으로 사는 것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의 삶은 오늘 본문에서 “멍에”라는 말로 요약이 됩니다. 멍에는 매임과 억압에 대한 강력한 상징입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멍에는 소를 단단히 구속시켰고 소는 주인이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마치 멍에 아래에 있는 소처럼, 종은 상전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면 멍에로 표현되는 노예제도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노예제도를 무너뜨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실제적인 조언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절과 2절의 말씀을 각각 세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는 대상, 명령, 이유입니다. 누가, 무엇을, 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이 세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상,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명령,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유,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상전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여겨야 합니다. 상전을 공경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1절 말씀의 대상과 2절 말씀의 대상은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2절이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참고하면 1절 말씀의 대상은 ‘믿지 않는 상전을 둔 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전이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성품이나 행동에 관계없이 모든 일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고 섬기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종이 하는 일에는 단순히 종의 어떠함이 아니라 그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종이 다른 종들과 똑같다면, 상전에 대한 공경함이 없다면 하나님이 업신여김을 받으며 그분이 하신 말씀이 비방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종이 상전을 범사에 공경함으로 다르게 산다면, 다른 종들과 다르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당시 종들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은 다르지만, 비록 우리가 노예의 신분으로 상전을 섬기는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공경함으로 섬겨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나보다 높은 사람, 위에 있는 권위를 만나게 되고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들이 있고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 명령을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공경하며 섬기는 일은 우리 본성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마음이, 타락한 죄의 성품이 그러한 일을 저항하는 것입니다. 잠깐의 노력으로 우리 마음이 변화되고 바뀌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노력과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속적인 순종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이 명령에 따르기 어려운 것은 공경하기 싫은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공경할 만한 사람들만 내 위에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 자리에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있을 때도 있고, 정말 공경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아직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직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주님을 비방하거나 복음을 깎아내릴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공경함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내 위에 있는 사람이 공경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임을 기억합니다. 단순히 그가 아니라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전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며 우리 주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2절 말씀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상,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명령,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유,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바울은 이번에는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을 향해 명령하고 있습니다. 믿는 상전이라면 상전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믿는 상전을 두었을 때 어떤 종들은 이것을 악용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추구하며 상전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상전이 형제이기 때문에 덜 공경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는 자이고 사랑을 받는 자이기에 더 잘 섬겨야 합니다. 종과 상전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믿음과 사랑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상전을 더 열심히 섬기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믿는 상전을 둔 종들은 상전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더 잘 섬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섬김으로 형제가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고로 유익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알바생으로 물건을 팔 때와 가게 주인으로 팔 때 어떤 경우에 더 열심히 물건을 팔겠습니까? 알바생으로 물건을 팔 때 어떤 마음일까요? 물건이 많이 팔리든 적게 팔리든 일당은 변하지 않습니다. 찾아오는 손님을 막지는 않지만 손님이 찾아오도록 추가적인 수고는 잘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건을 팔 때마다 나에게 유익이 돌아오는 주인이라면 어떨까요? 물건을 더 팔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내가 가게 주인은 아니지만 나의 가족이 가게 주인이라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일할까요? 정말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주인처럼 일할 것입니다.

믿는 상전을 둔 종도 그러합니다. 상전을 위한 수고와 봉사를 통해 얻는 유익은 상전뿐만 아니라 종인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종과 상전이 유익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고 더 잘 섬기고 공경해야 합니다. 믿는 상전이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명령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에베소 교회에게 이것을 전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렇게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걸까요? 주인들에게 종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종들에게 주인을 공경하고 열심히 섬기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주인이 종에게 친절을 베푼다 하더라도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노예제도는 인간 가치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노예제도를 없애라고 하지 않을까요?

당시 노예제도는 로마 제국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누구나 노예를 가지고 있었고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수백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로마 사회에서 노예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만약 노예가 사라진다면 모든 분야에서의 사회 활동이 정지될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으로 인해 여러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으니 지금부터 화석 연료를 금지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것입니다.

노예제도를 즉각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사회의 혼란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어떤 형태로든 노예들의 반란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어떠한 이유든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만약 로마 제국 당시에 교회가 노예제도를 반대했다면 교회는 노예 반란을 조장하는 무리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가 해야 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놓쳤을 것입니다. 당시에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우선되어야 했던 일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많은 부정과 부패, 사회적인 악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복음뿐입니다. 사람의 악함으로 생겨나는 모든 제도들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노예제도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종과 주인에 대해서 새로운 관계와 기준을 제시합니다. 복음이 종과 주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복음은 종의 마음과 주인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노예제도의 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합니다. 사람이 만든 노예제도의 악함을 복음이 바로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해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복음이 사람을 바꾸면,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세상을 바꿉니다. 복음을 통해 각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된 각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더 큰 변화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더 큰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결국 때가 되어서 복음이 노예제도를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복음이 가져오는 혁명적인 변화를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종이나 주인이나 다 같은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면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이 변화가 세상을 바꿉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안에 시작된 변화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믿는 우리가 각처에서 주님을 드러낼 때 우리가 자리한 곳에서 말씀에 따라 나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할 때, 윗사람을 공경하고 섬기며, 나의 위치에서 복음에 합당하게 살 때, 하나님의 이름과 그 교훈이 선한 간증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유익을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말씀에 따라 나의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마음을 삶으로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세상을 바꾸는 일에 우리의 삶을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