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알라, 그리고 경외하라
본문: 시편 76편
설교자: 최종혁
73편부터 시작된 시편 3권은 공의와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지금까지 다루고 있다. 73편에서 아삽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을 제기했었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임을 깨달았었다. 74편에서는 국가적인 재앙을 만난 상황에서 여전히 왕이신 하나님께 구원해주실 것을 구하는 내용이었다. 75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정하신 방법으로 공의를 나타내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었다.
오늘 살펴볼 76편은 그런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더 큰 궁극적인 구원을 기대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시편이다. 전체 구성은 “셀라”(3, 9절)와 내용을 중심으로 나눠볼 수 있다. 내용 상으로 1-6절은 하나님이 “알려지셨음”을 말하고 7-12절은 하나님이 “경외 받을 이”심을 말한다. 그리고 “셀라”가 그 중간에서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알려지신 하나님(1-6절)
1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먼저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유다에 알려지셨다”는 선포로 시작한다. 바로 이어서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 꼭 ‘유다에만’ 알려지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1절은 사실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에 그의 이름이 크시다고 알려지셨다’는 한 문장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유다와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려지셨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어떤 정보를 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가 그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반응은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용된 “안다”는 표현이 대부분 지식적이기 보다는 관계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그렇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출애굽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신 큰 사건이었다. 처음 모세가 바로 앞에 나아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답했었다(출 5:2).
바로만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여호와는 그들 조상들의 신으로서 들어본 존재였지 그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본격적인 출애굽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즉, 출애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바로와 애굽과 주변의 나라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사건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계속해서 기억하게 하시려고 유월절을 제정하셨고, 그 달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셨다(출 12:2). 그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할 때도 자주 출애굽 사건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 78편을 보면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가 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는데(시 78:8), 그 가르침의 중심에 출애굽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그렇게 “알려지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출애굽 역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알려지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자신을 알리셨다.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특히 전쟁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드러내셨다.
여리고 성에 있던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 2:10–11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승리와 적들에게 내리신 심판을 통해 라합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골리앗에게 돌진하던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삼상 17:46–47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승리의 구원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앗수르는 유다도 침략했고, 군사력을 봤을 때 유다의 멸망은 자명했었다. 앗수르 왕은 자신들이 그동안 여러 나라를 무너뜨렸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신이 구원하지 못한 것처럼 유다의 하나님도 구원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편지를 보내며 항복하라고 위협했다.
그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고 이렇게 기도했다.
왕하 19:15–19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6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17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18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지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고 앗수르 왕에게 하는 말씀을 히스기야에게 알게 하셨다.
왕하 19:21–28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23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24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25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 28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갈고리를 코에 꿰고 재갈을 입에 물리는 것은 짐승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고대에는 포로들을 이렇게 짐승처럼 끌고 가기도 했었다.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계획이나 의지와 관계 없이 그들의 군대를 패하게 하실 것이고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다. 그날 밤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쳐서 죽였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패잔병처럼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신을 경배하는 중에 살해 당하게 된다.
이 시편이 정확히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이런 전쟁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저자인 아삽은 하나님을 강력한 사자처럼 묘사한다.
2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장막”과 “처소”는 자연스럽게 성막이나 성전을 생각나게 하는데, 여기 사용된 단어는 사실 일반적으로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욥 38:40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여기서 굴과 숲에 해당되는 단어가 2절의 처소와 장막이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으로서 살렘과 시온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며 백성들 가운데 머무시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 장소를 마치 강력한 사자가 지키고 있는 보금자리로 묘사한 것이다. 그곳을 다른 짐승이 빼앗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예루살렘을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화살과 방패와 칼.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들을 가지고 적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없이하셨다. 모두 부수셨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한 전쟁들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바로의 군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력했다. 모두가 두려워하던 골리앗의 갑옷과 창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들을 다 굴복시켰던 앗수르도 그러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무기를 없이하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그런 무기들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항복해야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우려던 그들이었던 것이다.
적군의 무기 뿐 아니라 사실상 이스라엘의 무기도 큰 의미는 없었다. 아말렉과 싸울 때, 싸우는 것은 여호수아였지만 승패는 모세의 기도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도 강력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은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던진 작은 돌멩이였다. 앗수르의 대군을 물리치기 위해 이스라엘은 칼을 들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무기는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 편이 승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승리하게 하셨을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알려졌다.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약탈한 산”이라는 표현은 산을 약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먹이를 잡은 사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5-6절이 이 상황을 좀 더 분명하게 묘사한다.
5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6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마음이 강한 자, 즉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확신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그런 자들도 빼앗긴다. 약탈을 당한 것이다. 패배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패배가 의미하는 것은 잠에 빠지는 것, 곧 죽음이다. 아무리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다.
장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 손을 만날 수 없도다”는 문자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손을 찾을 수 없었다”. 손이 주로 도움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도움으로 번역이 되었고 그런 의미일 수도 있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공격을 하거나 방어를 할 손이 없었다. ‘손 쓸 수 없었다’가 딱 어울리는 번역이다. 아무리 장사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다. 6절의 그들의 병거와 말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마치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쫓아왔던 바로의 군사들에 대한 묘사와도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실 때 그렇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면 그 어떤 용사든, 장사든, 승리할 수 없다. 그들은 무력해지고 전장에는 그들의 시체가 가득할 것이다. 이 장면이 바로 4절에서 말하는 “약탈한 산”이다. 마치 사냥을 끝내고 먹이감을 밟고 서 있는 사자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같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알려진다.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영화로우시며”는 ‘빛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을 빛낸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눈에 보이기에는 다윗이나 히스기야가 승리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의지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용사이시며 심판자이심이 드러난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알려지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그분이 주권적으로 행하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사실은 의문의 대상이 아니다. 그분이 공의로 판결하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신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아마 여기서 우리가 할만한 질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에게도 그렇게 알려지셨느냐일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목격하지 못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알려지신 것이 맞을까?
먼저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알려졌다.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간 사람들은 누구도 하나님이 나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음으로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셨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가장 객관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아덴에서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에게 하나님은 알려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믿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는 비할 수 없는 구원의 경험이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알려지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알려지신 하나님을 그대로 알아야 한다.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이 마땅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경외 받을 하나님(7-12절)
7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여기서 아삽은 “주”를 강조한다. ‘오직 주님만이 경외 받을 이시니’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8, 1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경외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을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6절에서도 말한 것처럼 주께서 심판하실 때는 누구도 그 앞에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다면 누구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8절은 이렇게 표현한다.
8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하나님께서 판결을 선포하실 때 땅은 두려워 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을 받는 피조물의 관계를 분명히 선포한다.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께서 판결을 선포하실 때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판결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그 앞에서 두려워하며 잠잠할 수 밖에 없다. 변호도 변명도 불가능하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은 곧 구원과도 연결되어 있다.
9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은 자를 의미한다. 즉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6절까지 말씀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면, 7-9절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를 바라보고 있다. 75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정한 기약”의 때다. 그 때에 온유한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을 받게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잠잠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10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사실 모든 것이 결국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분노하는 모든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혹 그들에게 남은 분노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끝까지 그 모든 것을 사용하실 것이다.
앞서 언급했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굽이든, 골리앗이든, 앗수르든, 모두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결국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드러났다. 그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면 대적할수록 더욱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이 땅에서 그들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땅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고 하늘의 하나님의 판결을 받을 자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진노보다 사람의 진노가 두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정말 두려워해야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할 때가 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 만이 경외 받으실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그리고 나에게 어떻게 드러나셨는지를 안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한다. 지금 나를 두렵게 하는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를 사용하셨고 앗수르를 사용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결국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냈고 오직 하나님만이 경외 받으실 분이심을 증명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바로나 앗수르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위대하신 재판관,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안다면, 지금 우리가 만나는 상황들, 어려움들,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한다. 그래서 아삽은 끝으로 이렇게 권면한다.
11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2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세인 왕들에게도 두려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그것이 마땅하다.
서원한 것을 갚는 것, 예물을 드리는 것은 교회에 헌금 많이 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이다. 이 시편에서 사용된 전쟁의 이미지를 따르자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야한다. 하나님께 구원의 소망을 품고 있는 자라면 오늘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도전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과거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렇다. 2022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 당신은 그 알려지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는가?
시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알면서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분노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있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그에게 입맞추고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이 정말 복이 있는 자들이다.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그런 복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있을 때 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만 보고 계실 때는 한다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떤 금전적인 손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확히 금하신 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다. 직장 때문에, 아이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건강 때문에, 진로 때문에, 지금 상황 때문에 등등 우리 삶의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가 경외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눅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결국 최후에 모든 것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입은 그 앞에서 잠잠할 것이다. 그때에 침묵할 수 밖에 없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만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핑계일 뿐이다. 그런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그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그런 삶은 다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알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