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는 자들의 세상보기 Part II
본문: 시편 36편 7~12절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시편 36편을 통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죄인들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 당하는 것이 마땅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J. C. 라일은 “천국을 위한 준비의 첫 단계는 우리에게는 지옥 외에는 아무 것도 합당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5-6절에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면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에게 합당한 것은 심판이지만,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원하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들이 믿는 자들입니다. 주를 아는 자들입니다. 이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자신 보기(7~9절)
7-9절은 하나님께로 돌이킨 자들이 어떤 복을 누리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 복은 7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7절).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하고 그분의 심판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어디에 숨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 심판을 피하는 방법은 그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 2:12).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아들에게 입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길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나님은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피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하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 날개 아래에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미새가 아기새를 날개 아래에 숨겨서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피한 자들을 그렇게 보호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사랑(헤세드)을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피한 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보배로운지요”라는 말은 보석 같다는 것입니다. 귀하고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앨런 로스는 이에 대해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피한 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 39).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랑을 멈추실 수 있는 분이시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헛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나님 스스로도 절대 그 사랑을 멈추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미새에 대한 아기새의 신뢰가 그럴 것입니다. 다만 어미새는 하나님 같지 않기 때문에 때로 아기새의 신뢰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신뢰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국면을 맞이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알아갈수록 경험할수록, 더욱 의지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자하심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런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 복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날개아래 피한 자들에게 어떤 복을 내려주는지, 다윗은 크게 두 가지 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우리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은 이 복에 대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비유로 들어서 표현합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8절) “살진 것”은 기름진 것이라고도 기록하는 구절입니다. 실제 고기의 일부도 되지만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은 주의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풍족할 것입니다. ‘주의 집’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전’이라기보다는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피한 자들이 있는 곳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7절의 표현을 따르면 “주의 날개 그늘 아래”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는 풍족함을 누립니다. 빈약한 것으로 겨우 겨우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것으로 채웁니다. 가치 없는 것, 별 것 아닌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웁니다. 맛도 없는데 양도 부족한 식당이 있습니다. 맛은 있는데 양이 부족하거나, 양은 충분한데 맛이 그저 그런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식당은 그렇지 않습니다. 최고의 맛을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풍족하게 자신을 채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관계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히 채울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여기서 “복락”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에덴입니다. 다윗은 어쩌면 하나님과 인간이 완벽한 교제 가운데 거했고 그러기에 온전한 기쁨이 넘쳤던 그 시간을 지금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진정한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복락의 강물을 마신다고 표현하는데, “강물”은 성경에서 무엇이 풍성하게 흘러가는 통로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그런 의미입니다. 주의 기쁨이 풍성히 흘러 넘치고 주께 피하는 자들이 그 물을 흡족하게 마실 수 있다, 즉, 기쁨으로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충만한 기쁨이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쨌든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 즐거움을 하나님 안에서 찾은 자들이 있고 하나님 밖에서 찾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즐거움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자들이 하나님께 피한 자들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을 마시는 자들입니다. 그 즐거움은 결코 우리를 목마르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생명과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절)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에게서 생명이 솟아납니다. 모든 생명이 그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육체적인 생명 뿐 아니라 영적인 생명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겨우 겨우 살아갈 수만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 풍성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 빛이 있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없는 상태, 즉 흑암 가운데 있는 것은 성경에서 늘 고통 중에 있는 것이고 무지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무엇이 참인지, 의인지, 거룩인지, 기쁨이고 행복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둠은 죽음과 연결하고, 빛은 생명과 연결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빛이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으로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는 말은 평생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린 아기 때는 사탕 하나, 장난감 하나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만족은 없습니다. 그것을 얻을 때만 기쁩니다. 그 기쁨은 곧 사라지고 또 다른 사탕과 장난감이 필요합니다. 청소년이 되면 어떨까요? 공부만 안 하면 세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친구하고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는 끝나지 않습니다. 학교생활은 끝날 수 있지만 또 다른 공부와 시험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좋아하는 친구가 나를 실망시킵니다. 어른이 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그것이 돈, 명예, 명성, 이성, 가족, 행복 등으로 달라질 뿐, 여전히 만족을 찾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무엇으로 만족하려고 하고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그 무엇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좋은 것, 우리에게 궁극적인 기쁨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데, 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조금씩 만족해 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사실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나무를 보았을 때 여자는 먹기에 좋아 보였고, 그 눈에 기쁨이 되었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즉, 이 열매가 하나님보다 자신에게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우리는 그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고 난 이후에도 말입니다. 하나님께 피한 이후에도 이상하게 우리는 다른 것으로도 만족하고 다른 것에서도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마음의 반은 하나님으로 채우고 나머지 반은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한쪽 눈은 하늘을 보고 있고 한쪽 눈은 땅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피한 자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아는 자들은 참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서 만족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초월한 것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을 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으로만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자들인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현실 보기(10~12절)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러한 복들을 생각하면 믿는 자의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상황만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현실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많고, 정직하게 행하려는 자들을 이용하며 그들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더 잘되는 것 같고 그래서 그게 맞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부러울 때도 있을지 모릅니다(37편).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보며 다윗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확신 가운데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주를 아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10절).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해서 베풀어 주시고 공의를 나타내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피한 자들이 기댈 곳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공의를 나타내신다면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는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그분의 응답을 기다리며 지금의 현실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악인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기도합니다(11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런 자들이 세상에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내 주변에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런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윗은 확신으로 이 기도를 마무리 합니다(12절).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실 때, 악인에게 닥칠 심판은 확실하고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믿는 자로서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믿는 자가 그렇게 사는 것이 옳거나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로서 볼 수는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런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이 나를 미워하였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고 우리는 하나님께 기대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도전
결론적으로, 그렇다면 ‘아는 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간단히 말하면,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봐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로 봐야 합니다.
세상은 사람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세상은 사람이 악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 선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나의 행복이 최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있더라도 우리하고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하고 상관이 있더라도 좋은 쪽으로만 관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돕는 일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잘못한 것은 너그러이 용서한다고 말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없다고 말합니다.
믿는 자들에 대해서 세상은 뭐라고 말합니까? 어리석다고 합니다. 불쌍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누리고 즐길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들을 다 포기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천국을 믿으면서 사냐고 말합니다.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합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합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보다 적당히 속이고 당한 대로 갚아주며 사는 게 정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 왔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지금 우리 안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될 때까지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 바닥에 내려와 있고 우리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세상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롬 12:2).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라고 하십니다(고후 10:5). 세상이 인간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믿는 자들에 대해,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들이 사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입니다. 인간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춘 것에 대한 결과물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복 주심을 알고 그 안에서 만족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고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며 하나님의 생명과 빛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라면,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분리된 자들이라면,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세상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고, 인간을 인간의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혹 내 생각의 어느 한 부분, 내 삶의 어느 한 구석에서 이 자리가 바뀌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피고 바꾸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를 아는 자들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