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시험중의 인내
본문: 야고보서 1장 1절~8절
설교: 최 종 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 1절에서 언급했듯이 이 편지의 발신자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이고,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야고보가 두 명 등장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이자 장로로 일했던 야고보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인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유대인들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유대인들이 각 곳으로 떠나 흩어졌는데 그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일반적으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믿는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즉 교회에는 믿지 않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진정한 믿음은 무엇이냐’, ‘믿는 자의 참된 모습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 믿음이 어떻게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참된 믿음이니 그것을 향해 나아가라고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또는 자신이 믿었다고 착각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참된 믿음인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구원을 점검해보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야고보는 때로는 사랑 많은 목자처럼 격려하고, 때로는 선지자처럼 심판을 경고합니다.
1-8절 말씀은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시험을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려움, 시험이 있을 때 “왜”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시험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 이 어려움 속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들의 합당한 질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시험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 시험이라는 것은 참 다양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어려움입니다. 또한 그런 것과 상관없이 당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인간관계의 어려움, 육체적인 어려움, 뜻하지 않은 사고 등 시험은 다양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시험이 다양하게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으레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또한 시험은 당연한 것입니다. 혹시 당할 지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가능성에 대해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번역은 차라리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니”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베드로도 시험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고(벧전 4:12), 주님 역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우리에게 시험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험은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 진정한 믿음은 이러한 시험을 통과해서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헬스장에 가면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거운 기구를 드는 것은 근육을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시험이라는 것이 참된 믿음에 찾아올 때 인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단련되고 강해지며 또 다른 시험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단, 참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시련의 결과로 인내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거짓믿음은 시험을 만났을 때 그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거짓믿음은 인내를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회복해서 주님의 일군으로 일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시험이 찾아왔을 때 넘어지고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 넘어졌으나 다시 돌이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절에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고 있고, 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5절에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가장 핵심되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시험이 왔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 다른 번역에는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순전한 기쁨으로 여기십시오”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 막연히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 자체를 온전한 기쁨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사랑이든 기쁨이든 그 무언가의 가장 높은 수준을 말합니다. 바로 기쁨 중에 기쁨,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래서 원망하고 좌절해도 모자란데 어떻게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험은 당연한 것이고 다양한 것이며 그것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험은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더욱더 닮아갈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모습을 닮아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4). 이 말은 ‘어떤 것의 목적을 성취해내라’는 것입니다. 인내 자체가 최종적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한 모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참된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죄악된 육신을 벗고 새로운 몸을 입을 때 참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향해서 이뤄가라는 것입니다. “그냥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는 자로서 어느 정도만 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때로 실패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 하나님은 왜 하필 지혜를 구하라고 하실까요? 시험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을텐데 왜 하필 지혜일까요? 왜냐하면 지혜가 어려움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 중에 승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어려움이든지 그것은 우리를 죄로 유혹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죄짓게 하시려고 유혹하신 것이 절대 아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불평함으로 죄를 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나’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계속해서 어려운 환경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고 팔려가는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유혹에 넘어가게 하시려고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14절 참고).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욕심에 미혹되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험 가운데 승리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들을 이겨내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영광 돌리는 것, 그것이 승리입니다. 시험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그(아브라함)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 아브라함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아들을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로 주신 것이므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험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는, 의롭게 사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7절에 가면 그가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보았을 때 그제야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시편 기자는 자신이 우매 무지함으로 짐승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우리에게 어떤 환경을 허락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 속에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지혜가 없으므로 지혜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5). 하나님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도 후하고 넘치게 주시는 분, 아무 면박도 하고 않고 주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혜를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나아갈 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구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 “의심하지 말라”는 단어는 ‘옳게 분별한다’, ‘판단한다’,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를 저울질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저울 한쪽에 하나님이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진리이고 절대적인 공의이십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에 하나님을 비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고,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곧 두 영혼이 있는 것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분명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려움은 단지 어려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크신 하나님과 여러분이 처한 환경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저울질 하지 마십시오. 크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계속해서 다양하게 당할 것입니다. 제일 큰 시험이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곧 다시 더 큰 시험이 다가오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에 불평과 불만으로, 원망을 가지며 반응하시겠습니까?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지혜를 구합니다. 주님을 더욱 닮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그러한 믿음을 증명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