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속에 빠진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2절~17절
설교자 : 조정의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모세의 인도를 받아 들어가게 됐다. 하나님은 한 가지 중요한 명령을 주셨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만 따르라. 절대 가나안 신과 가나안 풍습을 따르지 말라(신 7:1-4). 그들은 가나안 땅에 살지만, 가나안 백성처럼 살지 말아야 했다.
새 언약의 백성,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다(요 17:16). 세상 가운데 일하지만, 세상과 함께 일하진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이웃을 사랑하지만(요 3:16), 주께서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신 세상을 교회는 본받지 않는다(롬 12:2).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다(약 4:4).
하나님은 옛 언약의 백성이 세속에 빠지면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라고 경고하셨다(신 7:4). 예수님은 새 언약의 백성, 교회에게 같은 경고를 하셨다: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세속에 빠지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을 적으로, 원수로 두는 죄다. 버가모 교회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원한다. 먼저 교회의 머리이신 주께서 교회에게 성령으로 하신 말씀을 들어보자.
1. 칭찬: 세상의 핍박을 이겼노라(12-13절)
버가모(터키의 베르가마)는 이방 종교와 풍습이 만연한 도시였다. 주전 2세기엔 “헬라 문명의 가장 화려한 꽃”이라 불렸고, 편지가 전해진 무렵까지 250여 년 동안 아시아의 수도였다.
해발 300m 높이의 고깔 모양 언덕(페르가몬) 위에 엄청난 규모의 제우스 제단을 시작으로 아테네,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치료의 뱀 신), 데메테르(수확) 등을 섬겼다. 봄에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3일 축제, 3월 디오니소스 제전 행렬, 5월 아프로디테 기념 축제 등 문화와 풍습이 다 우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십 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을 자랑하는 문화 중심지였다.
또한 버가모는 가장 먼저 황제 숭배를 시작했던 도시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세르베루스까지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 개나 짓고 ‘신전지기’(네오코포스)로서 충성을 다했다. 주님은 그들이 사는 곳을 가리켜 “사탄이 사는 곳”, “사탄의 권좌”라 부르셨다.
주님은 우상숭배가 가득한 버가모에서 교회가 얼마나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지 아셨다.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주님은 단지 그들이 믿음을 지키기 힘든 곳에 산다는 걸 칭찬하신 게 아니다. 그곳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살고 있다는 걸 칭찬하셨다. ‘살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영구적인 거주를 암시하는데, 그들은 삶의 터전을 극도로 이교적인 도시에 두고 갖은 억압과 핍박, 비방에(경제적, 사회적) 맞서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그것도 충성스럽게.
주님은 그들의 충성이 증명된 특별한 때를 언급하시는데, 바로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였다(테르툴리아누스, 3세기 비문). 버가모 교회의 성도 중 한 사람이었을 안디바는 후대 성인전 작가들이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아래 놋쇠 그릇 안에서 천천히 구워지다가 죽었다. 이런 극심한 핍박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안디바를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 부르셨다. 예수님께 사용된 호칭과 같다(계 1:5).
안디바만 그랬던 게 아니다. 예수님은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셨다. 버가모 교회 전체(너, 너희)를 향한 칭찬이었다. 그들은 무서운 협박, 거센 핍박에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성도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도 낙심하지 않고 더욱 굳게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라고 칭찬했다(히 11:38).
당신은 세상을 이기는 사람인가? 세상의 어떤 위협이나 핍박, 불이익이나 조롱을 받더라도 충성스럽게 주님을 믿고 따르겠는가? 요한은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우리의 믿음이니라”라고 말했다(요일 5:4-5). 세상이 아무리 무서운 칼을 쥐고 교회를 위협해도 교회는 승리한다. 교회가 믿는 분이 모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시기 때문이다(12절; 히 4:12; 계 19).
2. 책망: 세상의 미혹에 빠졌노라(14-15절)
이솝 우화 중 하나인 <북풍과 태양>에서 나그네는 아무리 거센 북풍에도 상의를 벗지 않았지만, 태양이 내리쬐자 벗었다. 버가모 교회는 거센 세상의 핍박을 이겼다. 하지만 따스하게 감싸는 세상의 미혹에 빠졌다. 주님이 바로 이것을 책망하셨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14절). 버가모 교회가 미혹된 두 가지 교훈은 발람의 교훈(14절) 그리고 니골라 당의 교훈(15절)이었다. 주님은 니골라 당의 교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진 않으셨다. 하지만 15절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보면 14절에 설명한 발람의 교훈과 유사한 거짓 교훈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주님이 책망하신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교리적이기보다 실천적이었다. 지식이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14절).
이 말씀은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한 발람과 그것을 요청했던 모압 왕 발락을 떠올리게 한다(민 22-24장).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걸 막으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모압 여인과 음행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신을 숭배하며 제사 음식을 먹었다(민 25:1-2). 후에 미디안과의 전쟁 승리 후 미디안 여자를 살려두었을 때 모세는 “발람의 꾀를 따라…여호와 앞에 범죄하려”하느냐고 책망했다(민 31:16).
니골라당의 교훈도 발람의 교훈과 유사한 것으로 이방 사회와 종교에 대한 느슨한 태도, 이교도 절기에 먹는 음식이나 이교도 축제의 일부인 음행에 참여하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삶으로 이끄는 가르침이었다(행 15:29). 앞서 에베소 교회는 ‘주님이 미워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너도 미워한다’는 칭찬을 받았다(계 2:6). 하지만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죄다.
우리는 신전이 세워진 도시에 살거나 이교도의 축제에 참여하면서 제물을 먹을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간음의 죄와(마 5:28) 세속적인 문화를 먹고 마시는 죄는 쉼없이 범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초대교회 성도는 자극적인 연극을 멀리하기 위해 극장을 금지했다. 청교도 성도 역시 세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경건하지 않은 문화를 멀리했다. 19세기 영적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극장과 술집, 윤락가들이 문을 닫았다.
만일 주님이 오늘날 성도가 보는 것과 즐기는 것을 볼 때, 버가모와 같은 책망을 하지 않으실까? 만일 교회가 세속적인 문화를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즐기고 있다면 말이다. 물론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주를 향한 사랑이 빠진 채로 율법주의자처럼 세속적인 삶을 미워할 수 있다(불관용의 죄). 하지만 반대로 버가모처럼 순교를 이기는 믿음을 가졌음에도 세속적인 삶에 무분별한 관용을 보일 수도 있다(관용의 죄). G. B. 케어드는 “관용의 죄와 불관용의 죄 사이의 안전한 길은 얼마나 좁은가!”라고 외쳤다. 당신은 그 좁은 길을 충성스럽게 걷고 있는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여 주님 미워하시는 세속을 미워하며 사는가?
3. 명령과 약속: 회개하라(16-17절)
주님은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16절). 회개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이다. 머리(인지)와 마음(죄책감)에서 시작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동의 변화를 반드시 요구한다.
만일 당신이 세속적인 삶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주님이 버가모 교회에 하신 무서운 경고가 바로 당신의 것이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여기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 성도를 가리킨다. 주님이 직접 그들과 전쟁을 치르시겠다는 경고다(악의 세력과 싸움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 계 12:7; 19:11). 과거 발람의 교훈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 24,000이 죽었다(민 25장).
누가 만민의 심판자,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을 내시는 분과 싸우고 싶은가? 아무도 없다. 그분과 싸우기 싫으면 세상과 싸워야 한다. 세상과 벗이 되려는 자는 결국 주님과 싸울 것이다.
주님의 두 번째 명령은 첫 번째 명령과 이어진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7절). 주님은 말씀을 듣고 회개에 순종한 자들, 특별히 문맥에선 세상의 미혹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 이기는 자들에게 귀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절)
꿀 섞인 과자 같은 만나와 흰 돌?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만나는 언약궤 안에 항아리에 담아 보관 중이었는데(출 16:32-34)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때 예레미야가 취하여 느보산 지하에 묻어두었고(마카비2서 2:4-7), 메시아가 오실 때 예레미야가 다시 나타나 만나를 메시아 성전에 되돌려 놓을 것이기 때문에 메시아 왕국에서 백성과 함께 먹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 만나라고 하셨는데(요 6:48-51), 잡히시기 전날 밤엔 제자들에게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면서 메시아 왕국에서 그들과 함께 만나를 먹게 될 것을 고대한다고 하셨다(마 26:29).
흰 돌은 고대 배심원들이 투표할 때 항아리에 던지는 무죄 판결 표식이었고, 당시 로마에서 경기에 승리한 자에게 준 만찬 입장권이었다. 흰 돌은 여기서 메시아 왕국에 들어가 함께 왕과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의인들의 입장권을 말하고, 그 돌 위에 새겨진 새 이름은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하게 드러날 영광과 존귀와 위엄과 힘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계 3:12).
주님의 축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세상이 먹고 마시는 문화를 철저히 통제한다. 무조건 메이드 인 세상이라서가 아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경건과 방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을 지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승리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가 영광스러운 왕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당신은 세속적인 것을 배불리 먹다가 메시아의 잔치에 갈 수 없다. 세속을 즐기는 자는 주께서 직접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유기를 위한 심판이거나 자녀를 위한 채찍질을 위해서(히 12:6).
우리는 자녀가 무엇을 보는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5세 아이가 7세 이상 볼 수 있는 영상을 보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다. 한 VOD 서비스에서 뽀로로 영상을 보는 중에 성인 등급 영상이 7차례 송출되어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등급이 성인이 되면 다 볼 수 있고 봐도 된다는 걸 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교회는 더 중요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빌 4:8).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한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덕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추구하라. 하나님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더욱 사랑하면 세상이 미워지고, 세상과 세상이 기뻐하는 것을 더욱 사랑하면 주님이 미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