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죄에 관대한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8절~29절

설교자 : 최 종 혁

사탄은 하나님과 라이벌은 아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싸우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보다는 여러모로 우위에 있는 존재이기는 하다. 그런 사탄이 가장 잘 하는 것은 바로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하셨다(요 8:44). 

처음 하와를 죄로 유혹할 때도 사탄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했다. 사실 거짓말이라는 것이 그렇다. 거짓말은 사실보다 더 그럴듯해야 한다. 들었을 때 뭔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 것 같고 따라서 더 믿을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게 하셨는데 단 하나만 금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든 의문을 가질만 했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도 이미 그런 의문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했던 그들에게 그 의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그 점을 파고 들었다. 먼저 사탄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물음으로써, 그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질문이 사실은 중요한 질문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아담과 하와가 찾지 못했던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주었다.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누구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고 믿을만 했을까? 하나님은 그저 먹으면 죽으니까 먹지 말라고만 명령하셨다. 사탄은 그게 아니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들이 하나님과 사탄이 아니라, 그냥 어떤 두 사람의 말이라고 가정해 보라. 하나님의 말씀은 친절하지 않다. 강압적으로 들릴 것이다. 어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명령’이었다. 반면에 사탄의 말은 결과 뿐 아니라 이유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 같을 것이다. 최소한 사탄의 말에는 논리가 있고 또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단정하고 명령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 나를 대변해주고 나를 더 생각해 주는 느낌도 든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입장이었어도, 아마 사탄의 말에 더 신뢰가 갔을 것이다. 내용을 떠나서도 나를 위해준다는 생각에 더 신뢰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 뭔가 새롭고 대단한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뿌듯함이나 자부심, 우월감도 생겼을지 모른다.

사탄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탄은 우리가 믿을만한 거짓말을 한다. 이해할만한 거짓말을 한다. 좋아할만한 거짓말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속는 것이다. 

오늘날은 어떨까? 여전히 사탄은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거짓으로 미혹하고 무너뜨리고 있다. 사탄은 함께 죄를 짓자고 말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자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듣기 좋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었을 뿐이다. 지금도 사탄은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 옳은 것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부추긴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을 세우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죄라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져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계시록의 넷째 편지에서는 특별히 ‘관용의 죄’를 볼 수 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까지 말했는데(빌 4:5), 관용이 무슨 죄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남에게 선을 베풀고, 내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존중해주고 용납해주는 것이 죄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이든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을 세운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죄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는 것도 죄다. 그런 면에서 관용도 죄가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용이 그렇다. 스윈돌은 이것을 ‘관용주의’라고 표현했다. “모든 사람에게 다른 모든 사람의 신념과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고 찬성하고 정당하게 여길 것을 요구하는 것”이 관용주의다(스윈돌, 75). 이런 오늘날의 관용주의에 따르면 관용주의 외에는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생각이 동등한 가치를 지녀야하기 때문이다. 맞고 틀림, 옳고 그름은 없고 오직 다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듣기 좋은가! 어떤 차별도 없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그런 아름답고 멋진 세상이 될 것만 같다. 이렇게만 하면 우리가 화합하며 다 같이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사탄의 거짓말이다. 

이런 관용주의야 말로 독단적인 가치관이다. 스스로 깨어 있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이 맞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미개하게 본다.

창조론에 대한 세상의 시각은 어떤가? 최소한 그것도 하나의 이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인이나 유명 스타가 그런 말을 했다가는 최소한의 과학도 모르는 광신도 취급 당하기 쉽상이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도 ‘다른’ 의견이 되지 않는다. 틀린 의견이 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동등한 인권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람이 된다. 낙태를 반대하면 여성을 차별하는 사람이 된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 취급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즉,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상인이 될 수 없는, 그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가치관은 조금씩 사람들의 생각에 스며들었고, 이제 그런 것들이 제도화되고 있다. 관용이라는 성경적 가치의 기준을 바꾸어 죄에 대해서까지 관대한 것, 이것이 바로 관용의 죄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용납하는 관용는 사탄의 거짓말이다.

문제는 세상은 계속해서 이렇게 흘러가고, 교회는 그런 세상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교회는 많은 압박을 받는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다르게 차별적이고 독선적이고 사랑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압박 속에 교회는 선택을 해야한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두아디라 교회가 정확히 이런 상황에 있었고, 그 교회에게 교회의 주인이자 심판주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편지하셨다.

2:18–29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3장에 기록된 일곱 편지 중 가장 긴 편지이지만, 기본적인 형식은 다른 편지들과 동일하다. 편지의 서론에는 편지를 받는 교회가 명시되어 있고, 편지를 보내는 예수님이 1장에서 사용된 표현 중 일부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편지의 본론에는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끝으로 편지의 결론이 앞의 편지들보다 좀 더 길게 기록되어 있다.

이 편지를 통해 오늘날 죄에 관대할 것을 강요 받는 교회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

 

편지의 서론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18절)

일곱 교회에게 씌여진 편지는 에베소에서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버가모를 떠나 남동쪽으로 약 60km정도를 가면 그곳에 두아디라 시가 있다. 버가모가 서울이라면 두아디라는 오산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큰 도시에 가려진 작은 도시가 두아디라였다.

두아디라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사도행전 16:14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구원을 받았던 루디아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 소개된다. 그후로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머물게 할 정도로 열심을 내었던 것을 보면 직간접적으로 루디아를 통해 두아디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루디아가 두아디라 시의 자색 옷감 장사이면서 멀리 떨어진 빌립보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두아디라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두아디라는 항구 도시는 아니어서 무역이나 상업의 허브와 같은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아폴로를 섬겼지만 버가모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중심지와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마의 통치 아래 안정을 누리면서 제조업이 특히 성행했다.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오늘날의 노동조합에 해당되는 길드가 번성했다. 램지는 당시의 비문을 인용하여 두아디라에는 울(양모) 직공, 아마(리넨) 직공, 외투 만드는 사람, 염색공, 가죽 직공(피장이), 무두장이(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 도공, 제빵사, 노예 상인, 청동 대장장이 등이 길드를 이루고 있었다고 말한다(램지, 260). 그 중에서도 가장 성행했던 것은 염색과 울 관련 사업이었다. 루디아는 빌립보에까지 진출한 두아디라의 상인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도 특정 산업이 발달한 도시를 가면, 그 산업에 종사하는 것이 단지 경제적인 부분과만 관계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곧 사회 생활을 중심이고 삶이 된다. 두아디라의 경우도 그랬다. 염색일을 하면 당연히 염색자 길드에 가입해야 했다. 물론 가입이 의무는 아니었지만, 길드에 속하지 않는다면 많은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길드는 경제 공동체의 개념을 넘어서 하나의 작은 사회였던 것이다.

당연히 길드는 종교 생활의 중심도 되었다. 길드는 저마다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었고, 길드는 자주 축제를 열어서 그 신을 기념했다. 여느 우상 숭배와 마찬가지로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에게 바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이 당당하게 이루졌다. 말 그대로 모두가 노동의 수고를 잊고 방탕함을 즐기는 시간이 길드의 축제였던 것이다.

이런 도시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마주한 압력은 굉장했을 것이다. 일자리를 유지하고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런 축제에 참여하든지, 아니면 생업을 포기하는 선택을 해야했다.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은 오늘날 교회의 상황과 정말 유사하다. 두아디라 교회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보내신 이 편지를 열어 보았을까?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18절)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1장에서 예수님을 묘사했던 표현을 다시 사용하셨다. 여기서는 1:14, 15절의 표현이 그대로 등장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추가되었다. 이 표현들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신 예수님을 강조한다.

먼저 예수님의 눈은 불꽃 같다. 우리도 눈에서 불이 나온다, 레이져가 나온다는 표현을 쓴다. 무언가를 주목하여 자세히 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보신다. 겉으로 보이는 것, 속에 감추어진 것을 모두 보신다.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속지 않으시고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신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그러셨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다. 빛난 주석이 무엇인지는 두아디라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빛나는 주석은 두아디라의 길드에서 제조하는 순전하고 단련된 놋쇠로 그곳의 군대에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빛난 주석은 정결과 강함을 의미한다. 

27절을 보면 시편 2:9을 인용하는데, 예수님은 심판하는 왕으로서 대적하는 자들을 깨뜨리고 부수신다. 이 말씀은 계시록 19:15에서도 인용되었다.

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여기 보면 발로 밟아 으깨는 것이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는 분으로서 정결하지 않은 것을 그 능력으로 밟아 깨뜨리고 제거하시는 분,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두아디라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라는 아폴로를 숭배했고, 또한 신의 아들로 여겨지는 황제를 숭배했다. 하지만, 예수님이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스릴 모든 권세를 받으셨고, 그런 높고 두려운 분으로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이 편지를 쓰고 계신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 편지가 읽혀졌을 때, 이 뒤에 어떤 말씀이 이어질지 모두가 두려운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것이다.

편지의 본론

이제 편지의 본론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 

여기 “사업”으로 번역된 단어는 뒤에 나오는 “행위”와 같은 단어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 즉 삶을 아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신 두아디라 교회의 삶의 특징은 네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이 단어들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앞의 사랑과 믿음은 삶의 내적 동기에 해당되고, 섬김과 인내는 삶의 외적 열매에 해당된다. 서로 모두 관계가 있지만, 사랑은 섬김과, 믿음은 인내와 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으로 서로를 섬겼고,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섬김과 인내에 있어서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책망을 받았었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에 있어서도 칭찬을 받았다. 그들의 섬김과 인내가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와는 다르게 두아디라는 오히려 그 사랑이 더 커졌다. 그 믿음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더욱 서로를 섬겼고 더욱 믿음에 굳게 서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100점짜리 교회가 아닐까? 사람이 넘치기 보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다. 섬김을 원하기보다 섬김의 기쁨을 알아가는 교회다. 세상이 아닌 주님이 주목하고,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 주님을 향해 있는 교회다.

두아디라 교회가 앞선 교회에게 전해진 편지의 소식을 먼저 들었는지 모르겠다. 만약에 들었다면 에베소와 같은 책망은 받지 않겠구나, 혹시 서머나처럼 칭찬만 받는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기대를 가졌을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사랑하는 주님의 입에서는 그들이 듣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가 나왔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0절) 

주님은 완벽해 보였던 두아디라 교회에게 치명적인 한가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셨다. 그들이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다는 것이다. 이세벨이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가르쳤는지는 여기서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교회의 대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그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먼저 주님은 이 여자의 이름을 ‘이세벨’이라고 하셨다. 이는 본명이 아닐 것이다. 이세벨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엘리야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던 사람으로 유명한 구약의 인물이다. 이세벨은 그저 많은 바알 숭배자 중 한 사람이 아니라 열심있는 바알 숭배자였다. 남편인 아합 왕은 우상 숭배의 대명사와 같은 인물이 되었는데, 성경은 이세벨이 그렇게 아합을 충동하였다고 말한다(왕상 21:25). 남편인 아합왕, 그리고 그를 통해 온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로 물들였던 사람이 바로 이세벨이다.

그런 이세벨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두아디라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 이세벨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교회가 이 여자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두아디라 성도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 앞서 말했던 길드가 중심이 되어 주최하는 우상 숭배의 축제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어떻게 교회가 이런 죄에 빠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앞서 말했던 두아디라의 상황을 고려해야한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거센 압박이 있었다. 생계가 달려있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했었다. 우상 숭배를 거부한 성도들은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우상 숭배를 하며 편안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어쩌면 부러운 눈으로 계속해서 바라봐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교회 밖에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 안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생계를 위해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성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도대체 이세벨은 어떤 메시지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을까? 대체 어떻게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 성도들을 이런 죄에 빠뜨릴 수 있었을까?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사용했던 전략을 이세벨도 사용했다. 이세벨은 죄와 싸우는 성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24절을 보면 주님은 꽤 흥미로운 말씀을 하셨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24절)

여기서 주님은 이세벨의 말을 따르지 않은 성도들에 대해서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는 매우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셨다. 독특한 표현이고 따로 주님께서 더 설명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가 처했던 상황과 이 말씀의 문맥에서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24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표현은 이세벨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세벨의 교훈을 받은 사람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즉,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다르게 말하면 길드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은, 그렇게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것은 괜찮은 일이고 오히려 필요한 일이라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그 뿌리는 영지주의적 사상에 있다. 몸과 영은 분리되어 있고 따라서 몸으로 하는 어떤 일도 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상이 영지주의다. 이에 다르면, 아무리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그것이 영적으로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상 숭배에 참여하여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영지주의와 맞닿아있다. 후기의 영지주의자들은 믿는 자는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요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상숭배에 참여하여 사탄의 깊은 것에 들어가야,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얼마나 무능한지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세벨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마운스, 128).

아마, 그러면서 바울의 우상에 대한 견해를 또 다른 근거로 제시했을 수도 있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따라서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고전 8장). 이 말씀 역시 이세벨이 사용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우상을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니라면 얼마든 길드의 축제에 참여할 수 있고, 오히려 그렇게 하면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좀 더 상상력을 더하자면, 예수님도 죄인과 세리의 친구셨는데, 길드의 축제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느냐고 다그쳤을지도 모른다. 이세벨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를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표현 때문에 그렇지, 쉽게 말해 이세벨은 그저 모두가 즐기는 사회 문화를 그리스도인이 즐기는 것은 죄가 아니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이세벨의 가르침에 두아디라 교회는 솔깃했을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뭔가 논리적인 것 같고 무엇보다 선택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롭고 깊이 있는 가르침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세벨의 말에 따르면 굳이 길드의 축제에 참석해서 함께 즐기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굳이 생계를 걱정하면서 길드에서 나올 이유도 없다. 이세벨은 두아디라 성도들이 원하던 것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그랬을 때 두아디라 성도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주목하신 것은 그런 우상 숭배에 빠진 것보다, 그런 거짓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우상 숭배의 죄에 빠뜨린 이세벨을 교회가 용납했다는 부분이다. 용납은 소극적으로는 묵인한다는 의미이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세벨의 가르침이 가져온 편이성이 죄에 대한 교회의 분별력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좋은게 좋은거지라고 쉽게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 부분은 버가모 교회와 유사하지만, 두아디라 교회가 더욱 심각했다. 주님은 버가모에는 그런 교훈을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고만 말씀하셨는데(2:14-15), 두아디라에게는 너희가 그런 사람을 용납했다고 말씀하셨다(2:20). 거짓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던 것 뿐아니라, 거짓에 빠뜨리는 사람을 용납하는 더 큰 죄가 두아디라에 있었던 것이다.

두아디라는 이세벨을 용납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이세벨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었지만 주님은 속일 수 없었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1-23절)

주님은 은혜로 이세벨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셨지만, 이세벨이 거절했기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 편지가 전달된 시점에서 이세벨의 심판은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세벨을 따르던 자들에게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이세벨에게 확정된 심판의 메시지를 들을 때, 회개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엄하게 경고하신다. 주님은 침상(병상), 환난, 사망 등의 표현으로 이 심판의 무거움을 분명히 하셨다. 이 심판은 이세벨의 영적인 자녀들에게까지 미칠 것이고,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통해 공의로 심판하시는 주님을 모든 교회들이 알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 경고의 말씀에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세벨은 더 이상 이 땅에 없지만, 우리는 어쩌면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이세벨의 자녀일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죄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죄를 정당화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을 알면서 아무렇지 않게 은혜라는 명목 아래 하지 말아야할 일들을 하고 있다면 그 역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내 생각을 지지해 주고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고 나를 편하게 해주는, 그런 설교, 그런 강의, 그런 책, 그런 영상, 그런 사람만 따르고 있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죄에 대해서 이런저런 허울 좋은 변명을 늘어 놓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 마음을 점검해봐야하는 것이다. 주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나도 정말 미워하는지 점검해봐야한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주님은 우리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다. 회개한다면 그 행위에 대해 보상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를 벌하실 것이다. 은혜로 받은 구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사탄의 거짓말이다. 

혹, 지금 내가 이세벨을 따르며 죄에 관대하고 내 삶을 내가 편한대로 즐기려고만 한다면, 주님의 이 경고를 무겁게 들어야 한다. 주께서 회개할 기회를 지금 주심을 기억하고 지금 회개해야 한다.

두아디라 교회의 모든 성도가 이세벨의 거짓에 속았던 것은 아니다. 주님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24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4-25절) 

주님은 이들에게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고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주께서 오실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19절에서 주님께서 이들을 칭찬하셨던 것을 보면 이들에게 더 무엇을 하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 맞다.

또한 이 성도들은 생계의 위협 속에서 우상 숭배의 유혹을 뿌리치고 있었고,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가르침, 부도덕한 생활과도 싸우고 있었다. 주님은 이들에게 더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다만 지금의 모습을 끝까지 인내로 지켜갈 것을 명하셨다. 주님이 오셔서 그들의 행위대로 갚아주실 때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킬 것을 부탁하신 것이다.

그리고 편지의 결론에서 주님은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편지의 결론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6-28절) 

주님은 여기서 시편 2편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세우시고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현실이 될 것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다스릴 권세를 자신에게 주셨던 것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님과 함께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새벽 별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다스리실 것이다.

이 땅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의 일을 지키며 이기는 삶은 쉽지 않다. 어려워서 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런 삶이 편한 삶은 아니라는 의미다. 세상의 사람들, 특히 편하게 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 마음도 모두 아신다. 세상 속에서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어리석다는 말을 들으며 사는 우리의 답답함을 아신다. 연약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섬기며 인내하는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9절)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이 말씀을 두아디라 뿐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어야한다. 사탄의 거짓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죄에 관대해지면 그만큼 우리 삶은 편해질 것이다. 더 성공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교회에 헌금도 더 많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봉사할 기회도 더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 결혼하기도 쉬워질 것이고, 직장 생활, 학교 생활, 모든 면에서 더 나을 수 있다. 죄와 싸우지 않으니, 세상과 부딪칠 일도 없다. 

우리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삶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 그 보이지 않는 영원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죄에 관대하지 않고 싸워서 생기는 지금의 불편함,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 만날 때까지 주님께서 맡기신 것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